봉천 사당쪽 까치고개처럼 칼같이 구분되는 곳도 있지만 (장승배기나 숭실대 뒤 살피재도 약간 그렇지만 비교적 애매)

노량진쪽 유한양행 부근이나 안양 구도심과 같이 구분이 힘든 곳도 있음


그래서인지 조선 초기에 잠시 금과현 통합이 시도되었고 일제 부군면 통폐합 초안에서도 원시흥ㆍ과천 통합이 짜여졌던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