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건주택(再建住宅)

1953년 처음 지어진 안암동 재건주택의 모습



현재 정릉동 재건주택의 모습(추정)

재건주택은 전후 한국에 처음 지어진 공영주택으로(전시에 영도 등지에 난민주택이 건설되기도 함)

유엔한국재건단(UNKRA, 운크라)의 지원을 받아서 전국에 5500호, 경인지역 2500호 각 지방에 3000호를 건설하기로 하였음

건설 평수는 9평으로 방 2개 마루 1개 주방 1개의 구조를 가지며 당시 통계상 평균 1인 가구 생활공간이 6평이었는데 거기에서 50%를 추가하여 계산하였고

4급 공무원의 생활기준을 기준으로 하였는데 실제 입주자랑 생활 수준이 맞지 않아서 불평이 나온다는 말도 있었음.

당시 건축비는 12만 환이었고, 이 건축비는 10년에 걸처 상환하기로 되는 구조였음.

이 시대는 현재 환율로 환산하기 어려운데, 1950년 기준으로 이등병 월급이 3000원이고 쌀 한 가마니(80kg)값이 1400원(1952년 개혁으로 100원=1환으로 바뀜)인데 문제는 이 가치가 1년에 200%는 뛰었으니 대충 쌀 한가마니가 1953년에 5600원(1400*2*2, 5.6환)이라고 하고 요즘 한가마니에 20만원(1960년대 10환>1원으로 바꿈) 정도이니 계산해보면 약 4억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함.

현재 가치로 보아도 전 후로 엉망이 된 세상에서 쉽게 얻을 만한 주택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음. 게다가 주택을 받는 대상자가 전쟁 전에 서울에 집이 있었다가 집을 잃은 사람, 극빈 피난민, 반파된 주택 소유자인데 이들이 저 주택에 쉽게 입주할 수 있었을 지는 의문

2. 희망주택(希望住宅)


답십리 희망주택의 평면(출처 : 서울 아카이브)


보광동 상이용사 주택(1957), 위의 희망주택과는 다른 사업이기는 한데 형태가 유사해서 참고용으로 가져옴(출처 :서울 역사 아카이브)

간단하게 말하면 위의 재건주택에서 대지와 공사비는 입주자가 부담하고 자재는 영단에서 제공받는 형태로 역시 운크라의 원조를 받음

위의 재건주택에서 보이 듯 위 주택도 한개 동에 두 가구가 거주하는 형태로  지어짐. 나름 집 내부로 화장실을 들여놓아서 생활의 근대화를 꾀한 모습을 볼 수 있음

3. 부흥주택

청량리 부흥주택(1957)


위 부흥주택의 70년대 모습


제기로 부흥주택의 단면

정부 시책에 따라서 발행한 산업부흥 국채발행기금이나 주택자금 융자로 건설된 주택을 부흥주택이라고 함

부흥주택은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건설되었으며 이때는 '부흥부'(1961년 건설부로 변경)라는 부처도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부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음


우선 청량리 부흥주택으로 보면 과거에는 일제가 풍치지구(자연보전구역, 그린벨트라고 이해하면 편할 듯)로 지정한 녹지에 지어진 곳인데 한층에 2가구, 총 4가구가 사는 공동주택의 형태였음. 


이처럼 60년대로 들어서면서 기존의 단독주택 위주이던 건설 정책은 점점 공동주택으로 변하고 나중가면 시영아파트의 형태로 등장함으로써 한국의 공공 택지 개발사의 한 측면을 들여다 볼 수 있음.


다만 이때도 부흥주택 입주민들이 주택 가격의 과도한 가격, 높은 융자금 이자, 짧은 상환기관들을 들어 청원을 넣는 사태가 있었고 국회에서 특별위원회가 열리는 일도 있었다고 함. 분양가가 생각보다 비싸서 분양을 얻은 사람들 중 돈이 없는 사람들은 분양권을 팔아버리는 일도 있는 등 과거나 현재나 발생하는 문제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듬.


4. 국민주택



이화동 국민주택단지(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ut3098&logNo=220544796220&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불광동의 국민주택단지




국민주택도 부흥주택과 유사한 재원을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귀속재산 처리적립금이 들어감. 여기서 알 수 있는건 비슷한 주택건설 사업들이 재원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음.

불광동 국민주택단지의 경우 교외의 온화한 분위기와 평화로운 환경 때문에 '평화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국민주택으로 들어가는 다리는 평화교라고 불렸다 함.

당시 이 주택단지는 어린이놀이터의 분수까지 갖추어서 단순히 주거뿐만 아니라 삶의 질까지 근거를 둔 앞으로 6-70년대 지어질 단지 주거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함.

처음 지어진 재건주택이 9평으로 당시에 나름 큰 평수였는데 불광동 국민주택은 10평에서 최대 18평까지로 획기적으로 넒어짐. 거기다가 식사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식침분리를 꾀하였고, 나름 최신 기술을 동원하여 수도까지 공급되는 획기적인 곳이었음.

다만 문제가 있었음. 이 국민주택은 무주택자를 위한 주택이었는데, 입주금과 각종 상환 비용이 생각보다 높아서 대부분의 입주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함. 따라서 입주권을 받아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경우가 흔했다고 함.

다만 이 주택단지도 시간제 급수 문제나 시내와의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버스 노선을 만들어 달라던가, 통학이 불편하니 학교를 만들어 달라던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일이 있었다고 함. 이후 불광동 이후 북가좌동, 상도동, 우이동 등등에 주택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함.

이후에도 60년대를 넘어서 70년대 초까지도 한국 주거의 대세는 단독주택이었음. 1970년 주택 통계를 보면 아파트는 0.77%이고 단독주택은 95.3%를 차지했음. 하지만 점차 선호도는 공동주택으로 넘어가고 있었고

나중에는 정부에서 주택공급을 아파트 위주로 방향을 선회하면서 우리가 흔히 아는 아파트 공화국의 시초를 낳기 시작했다고 생각함.

참고 문헌

김성운. 2012. 1958-1960년 서울도심의 간선도로변에 건설된 상가주택에 대한 연구. 경기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서울 아카이브. 기타 인터넷 등등.




다음에는 아파트에 대해서도 적어볼까 고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