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9월25일, 연해주 페르바야 레츠카驛(역)에서 조선인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연해주 거주 고려인(러시아 시절부터 그곳에 거주하는 韓人들을 일컫던 말)들이 日帝와 내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선사범大, 조선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고등학교), 8개 초급중학교(중학교), 23개 인민학교(초등학교) 학생들,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라디오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가축처럼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鄭옹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말한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열차에 탄 사람들은 열차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던져진 땅은 불모의 땅이었다. 鄭尙進의 회고다.

『열차에서 내린 여자들은 주저앉아 통곡했어요.「죽으라고, 우리보고 죽으라고 이런 땅으로 보낸 거야」라면서….

그때 나귀에 빵을 가득 싣고서 카자흐 여인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이름 모를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빵을 구워서 식을세라 모포에 덮어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그 빵을 아이들에게 먹이며 조선 어머니들은 다시 통곡했고, 카자흐 아낙들도 그 모습을 보면서 울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카자흐 사람들, 참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우리 민족은 그 고마움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주 첫해에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으로 2만~3만 명이 죽었다. 청년 鄭尙進은 잃어버린 친척들을 찾으러 고려인 마을들을 돌아다니면서 매일같이 장례가 치러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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