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나는 부다페스트에 사는 한 공무원 집안의 가족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헝가리 왕국의 업무 중에서 외교와 관련된 일을 맡은 공무원이었는데, 그 덕에 아버지는 제국 내에서 쓰이는 여러가지 언어에 더해 몇가지 언어를 능숙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 구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에서 먹고살려면 여러 언어를 알아야한다며 나에게 헝가리어 말고도 독일어와 체코어도 어렸을 때부터 가르쳤다. 나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형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는 세 형제 모두에게 여러 언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신문을 읽고 갑자기 큰일이 났다며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일이 너무 바빠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버지가 7월 쯤에 퇴근했을때는 좀 더 초조해보였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아버지가 그렇게 피곤해보이고 집에 잘 들어오지 않던 이유를 나는 바로 다음 달에 알 수 있었다. 전쟁이 난 것이다. 아버지의 말로는 황태자 폐하가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당했고, 그것 때문에 전쟁이 난 것이라고 했다. 부다페스트에 멋진 옷을 입고 행진하는 군인들이 동쪽으로 걸어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씩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의 전쟁이지 헝가리의 전쟁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말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갈 때쯤 되자 전쟁은 거의 끝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은 점점 적어지거나 나쁜 것으로 바뀌어갔고, 들려오는 소식의 내용도 점점 부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제국이 항복을 선언하기도 전에, 각지에 있던 민족들이 들고일어서기 시작했다. 마침내 제국이 항복을 선언하자 전리품을 챙기려하는 승리자들이 우리 영토를 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외교 관련 일을 맡았기 때문에 또 항복 선언 이후로 집에 잘 들어올 수 없었다. 헝가리에게는 너무나도 치욕적이고 말이 안되는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했기 때문에, 조약을 일단 거절했다. 헝가리에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기도 하면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날이 지나갔다. 하지만 끝까지 땅을 원했던 승전국들이, 특히 루마니아가 집착하듯이 침공하기 시작해 동서남북 모두에서 땅이 잘려나가게 되었고, 헝가리는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렸다.



(1920년,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잘려나간 헝가리의 모습은 볼폼없었고, 국내에서 생산되었던 물건이 이제 국외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자 값이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며 이 조약을 강요한 국가들과 사람들을 비난하는 시위를 계속해서 하기 시작했다. 돈의 가치는 계속해서 떨어지기 시작해서 같은 무게의 휴지가 돈보다 가치가 높아지는 일까지 일어났다. 나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덕에 집안의 수입이 끊길 일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풍족하게 살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왕국은 점점 어려워져갔고, 점점 혼란스러워져갔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현재의 헝가리 왕국을 다스리고 있던 사람은 다른 나라처럼 대통령이나 총리같은 것이나 왕국 이름답게 왕이 아니라 섭정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섭정이라는 사람은 예전 제국 시절의 해군을 이끌던 제독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바다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왕없는 왕국의 섭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1930년,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나는 대학으로 가서 외교학과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이 그렇게 대학을 보낼만큼 좋은 편이 아닌데다가 나는 장학금을 탈 만큼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러 언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번역가로 취직하려고 했다. 하지만 온 지구를 휩쓴 대공황은 돈의 가치가 떨어져 펭괴로 화폐를 바꿀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인 헝가리의 경제상황에 큰 타격을 주었다. 나는 번역가 일자리는 얻지 못하고 그냥 부모님 집에 얹혀살 수 밖에 없었다. 형은 아버지처럼 공무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지만 동생은 나처럼 얹혀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독일이 빠르게 성장하면서 동맹국이 될 수 있었던 헝가리는 군대를 늘리고 있었는데, 나는 전차병으로, 동생은 포병으로 헝가리군에 잠시 입대하기로 했다. 헝가리 군에서 나는 예전 영토였던 슬로바키아의 일부를 얻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고, 부당하게 빼앗긴 영토인 트란실바니아를 일부 되찾는 일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헝가리의 고유한 영토 중 유고슬라비아에도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데 벌어진 전쟁에도 참전할 수 있었다.



(1941년,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나는 독일이 소련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자 동부로 파견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몇번은 위험한 적이 있었지만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여러 언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무전기로 다른 국적의 군대와도 이야기 할 수 있었으므로 무전수로 배치되었다. 여러 전투에 참가했던 나는 이 전쟁에 과연 헝가리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까하는 의문이 계속 들었지만 딱히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우크라이나 쯤까지 진격할 수 있었고,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는 동안 사이를 막으면서 조금씩 진격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헝가리 정부는 빨리 본국으로 돌아와 평화 협정을 맺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나는 헝가리로 돌아가 잠시 쉬고 있게 되었다. 하지만 평화 협상을 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독일군이 들어와 헝가리를 점령해버렸다. 그리고 독일군이 점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군이 들이닥치기 시작했고, 나와 내 동생은 소련군으로부터 부다페스트와 피난간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슬프게도, 여기서 동생은 전사했다. 나는 이 사실을 전투가 끝난 다음에야 알았다. 소련군은 무자비하게 부다페스트 시민들을 죽이고 각종 범죄를 저질렀다. 나는 소련을 굉장히 증오하게 되었다. 그렇게 헝가리는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얻어낸 정당한 헝가리의 고유 영토는 다시 뱉어낼 수 밖에 없었다.



(1946년, 헝가리 제 2공화국 부다페스트)


 나는 전쟁이 끝나고 헝가리인을 위한 헝가리가 다시 세워지면 다시 우리의 고유 영토를 되찾을 것이라 기대했다. 나는 헝가리를 재건할 때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취급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나는 전쟁탓에 꽤나 늦었지만 물품을 취급하면서 만난 여자와 사랑하게 되었고, 크게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서 결혼할 수 있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가족들도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나는 헝가리가 언젠가 다시 강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내 동생과 헝가리의 땅을 가져가버린, 그리고 부다페스트를 망쳐놓은 소련이 갑자기 개입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자 화폐 가치는 저번 전쟁처럼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련은 추잡한 수법으로 헝가리의 정치세력들을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더러운 꼴을 볼 수 없어 내가 아는 모든 언어로 이를 알리는 글을 써서 퍼뜨렸다. 하지만 각 나라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조그마한 나라가 도와달라고 하는 것 따위는 무시해버렸다. 소련은 온갖 더러운 수법을 써가면서 헝가리를 공산화시키려고 노력했고, 소련의 끄나풀이었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정권을 잡아버림으로써 헝가리는 소련의 속국이 되어버렸다.



(1956년, 헝가리 인민공화국 부다페스트)


 내 가족은 계속해서 부다페스트에 살고 있었고, 공산당이 들어와 물자를 알아서 배급하기 시작한 뒤로 나는 건설 현장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형은 공산당의 공무원을 할 바에는 다른 일을 하겠다며 공산당에 저항하는 책을 쓰거나 번역하는 일을 몰래 하기 시작했다. 이 때쯤 나는 늦둥이 아들을 볼 수 있었다.

 54년 월드컵이 강력한 매직 마쟈르의 아쉬운 패배로 끝나버린 뒤, 나는 공산당의 통치에 강한 반발심이 계속해서 들었다. 그리고 지식인, 노동자 가릴 것 없이 모든 시민들이 이 반발심을 한번에 터뜨렸다. 여러 언어를 할 수 있었던 나는 헝가리의 일을 알리는 선전물을 번역하기도 했고, 외국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프랑스 기자도 왔고, 영국 기자도 오는 등 여러 서구권 나라들이 이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또한 나는 무전수이긴 했지만 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싸워야 할지도 알려주었다. 아쉽게도 나이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 싸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시위를 진압했다. 사람들에게 전차를 들이밀었고, 이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했다. 추잡하고 더러운 수법으로 헝가리를 속국화 한데 이어 너희들은 우리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유혈진압했다. 헝가리의 지도자는 처형당했고, 소련의 앞잡이가 다스리게 되었다. 이 시위 이후로 나는 아내를 볼 수 없었다. 형은 핀란드로 망명했다. 나에게 옆에 남은 가족은 아들 뿐이었고, 형이 보낸 편지는 검열당해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1965년, 헝가리 인민공화국 부다페스트)


 지도자가 소련의 앞잡이라는 점을 빼면 헝가리는 순조롭게 잘 개혁되고 있었다. 살만한 수준의 복지와 일자리가 계속해서 제공되었고, 아들의 교육도 아들이 원하는 만큼 받을 수 있었다. 배급을 받기 위해서 줄을 설 필요도 없었고, 배급량이 줄어들어 화를 낼 필요도 없었다. 소련도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부다페스트의 시위처럼 프라하에서 시위가 발생했을 때 군대를 보낸 것은 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헝가리인에게는 좋은 지도자가 맞다고 할 수 있겠다.

 집에는 새로운 가전제품이 들어올 수 있었고, 사람들에게는 자동차가 조금씩 생겨 여기저기를 여행할 수도 있었다.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수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돈문제로 가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니 소련의 압제에서 사는 것을 뺀다면 나름 괜찮은 것 같다.



(1975년, 헝가리 인민공화국 부다페스트)


 석유값이 갑자기 뛰기 시작하면서 헝가리의 경제 상태는 조금씩 흔들리곤 하였다. 헝가리의 빚이 조금씩 많아진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공산당 내부도 꽤 시끄럽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하지만 헝가리가 완전히 뒤집히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건설 감독 일을 나이가 나이인 만큼 그만두었다. 아들은 수학 연구원으로 대학에 취직한 것 같다. 나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아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아들이 누렸으면 하기에, 아들이 원한다는 일은 나쁜 일이 아닌 이상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김에 아들이 들고온 팝 음악을 같이 들어봐야겠다.



(1989년, 헝가리 제 3공화국 부다페스트)


 소련이 완전히 물러갔다! 내 가족, 내 조국의 원수인 소련이 물러갔다! 나는 많이 늙었음에도 헝가리 국기를 들고 뛰어나갔다. 아들도 함께 뛰어나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핀란드로 망명갈 수 밖에 없었던 형도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들은 수학과 결혼했다며 여자를 만날 생각을 딱히 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아들이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기 위해 크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헝가리는 소련의 더럽고 무자비한 압제 속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롭고 강력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헝가리는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지 않을 정도로 현재가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나는 살면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누려본 적이 없다. 민주공화국이 들어섰다 하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되거나 독재가 이어졌다. 그래서 민주공화국이 되었다고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련이 물러갔고, 헝가리를 위한 헝가리가 다시 세워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소련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소련에 희생된 가족들을 떠올렸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유골이 있는 무덤을 만들 수는 없었지만, 형과 함께 비석에 가서 소련이 이제 가버렸으니 모두가 비참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쉬라고 말해주었다. 헝가리는 헝가리를 위해 움직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