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쓴이는 이 글에 쓰인 사상/이념에는 어떠한 지지의 의도가 없음을 밝힙니다.  

* 이 글은 허구입니다.




(1910년, 영국 런던)


 나는 런던에 사는 한 해운 회사 간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회사는 캐나다, 아프리카 식민지, 인도, 호주, 홍콩 등을 연결하면서 굉장히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나는 꽤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랄 수 있었다. 아버지 말고도 삼촌들도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없을 때면 삼촌들이 와서 우리를 돌봐주곤 했다. 하지만 귀족 집안은 아니었기 때문에 귀족들과 같이 지내기 보다는 자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게 되었다. 아버지는 다른 곳으로 다녀야 하는 일 때문에 가족과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캐나다나 이집트같이 최대한 짧은 거리로 움직이는 경로를 맡아 가족들과 가능하면 많이 시간을 보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삼촌들은 어딘가에 갔다오면 나에게 엽서나 우표같은 기념품을 주곤 했다.

 내 두 누나와 형은 부유한 집안 덕분에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첫째였던 형은 아버지와 같이 다니면서 해운회사에 취직할 예정이었다. 큰누나는 아버지 회사의 배를 타고 다른 나라를 다니면서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싶어했고, 작은누나는 책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런 행복한 날은 내가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끝나버렸다.



(1914년, 영국 런던)


 영국은 독일과 전쟁을 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회사에서는 많은 물품들을 여기저기 옮기느라 바빠졌다. 특히 식민지에서 만들어낸 물건들을 브리튼 섬으로 옮거나 식민지의 사람들 중 군인으로 복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프랑스로 옮기는 일들이 많았다. 아버지는 위대한 대영제국의 해군이 우리 해운 선단을 보호해 줄 것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고, 우리 가족은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의 유보트는 몰래 와서 상선들을 격침하는 작전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그만두라고 했음에도 독일은 계속해서 했고, 전쟁이 계속되면서 격침되는 상선의 수는 늘어났다. 그리고 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도달하자, 독일은 미국의 상선을 격침하기까지 했고, 미국이 전쟁에 참전했다. 아버지와 형이 탄 배는 미국의 물자들을 런던으로 옮기던 중 전쟁의 막바지인 1918년 가을에 격침당했다. 아버지와 형이 탄 배가 가라앉았고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는 말은 아버지의 직장 동료가 정장을 입고 와서 전해주었다. 나는 어머니가 설명해 줄때까지 아버지가 인도로 발령받아 당분간 돌아올 수 없었다고 알고 있었다.



(1923년, 영국 런던)


 아버지의 회사에서 아버지가 꽤 위치가 있는 직책을 맡았던 만큼 우리 가족을 챙겨줬다. 그래서 큰누나는 아버지의 회사 배를 타고 여기저기를 탐사할 수 있었고, 작은누나는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삼촌들도 우리 가족을 위해서 노력해주시기도 했다. 나는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하고 노력했다. 옥스포드 같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유명한 대학교까지 들어가기는 무리였지만 괜찮은 대학교를 들어갈 정도의 성적은 되었고, 대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1930년, 영국 런던)


 하지만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던 때에 대공황이 터졌고, 삼촌들이 다니면서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던 회사도 점점 비실비실대다가 도산했다. 회사가 도산하면서 삼촌들도 일자리를 잃었고, 우리 가족을 도울 단체도 사라져버렸다. 큰누나는 배를 타고 캐나다로 갔다가 회사가 망하면서 돌아올 편을 구하기 애매해졌고, 작은누나는 책을 냈지만 책을 살 사람이 없어 크게 수익을 내지 못했다. 나도 일자리를 딱히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잠시 포병으로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정했다. 군대에 갔다오면서 받은 봉급과 조금 더 공부해서 장학금을 일부 받는다면 대학에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몇년간 군대에 있으면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큰누나는 캐나다에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배운 언어가 꽤 되었기 때문에 번역가 일을 하기로 했다. 작은누나는 만화를 그리는 것을 조금 연습해서 신문에 만평을 그리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군대에서 4년간 복무하고 전역한 뒤 대학에 들어갔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일부 받으면서 수학을 배울 수 있었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만난 같은 수학과의 여자는 귀여웠고, 나와 성격도 잘 맞았다. 국외 상황이 계속해서 어지러워졌고 독일이 계속해서 몸집을 불리고 있었지만, 나는 딱히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옳지 못했던 것 같다.



(1940년, 영국 런던)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교에서 만난 그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전쟁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군대에 전역해서 예비역이었기 때문에 나라가 나를 필요로 했고, 곧 태어날 아이를 영국에 두고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하는 것은 부대원들과 포커를 치는 것이 전부였고, 나는 독일과 곧 전쟁이 끝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은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벨기에를 지나 프랑스를 공격했다. 내 부대는 독일군에게 금세 포위되었고, 나는 이제 포로가 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내 부대는 장비를 모두 버리고 겨우 영국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 다행히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딸을 볼 수 있었다. 프랑스가 순식간에 항복했기 때문에 독일에 대항하는 나라는 영국 뿐이었다. 매일매일 독일 전투기가 날아오기 시작하자 나는 포병이었기 때문에 대공포를 쓰는 부대로 배치되어 폭격기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에 독일은 갑자기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행동이 미친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적국이 그랬기 때문에 매우 고맙다고 여겼다. 계속해서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고 런던에서 대공포를 쏘면서 독일군 폭격기를 맞추려고 하고 있다가 우리 집 바로 옆에 폭탄이 떨어져 이웃집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웃사람은 잠시 저녁거리를 사러 나갔던 차라 무사했지만 나는 아내와 딸, 그리고 곧 태어날 아이까지 위험에 휘말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가족들을 리버풀로 이사보냈다. 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가족들을 볼 수는 없었을 테지만 가족들이 위험한 것 보다는 나았다.



(1944년, 노르망디)


 독일이 계속해서 소련에게 밀리고, 독일에게 점점 안좋게 흘러가기 시작하자 영국과 미국은 상륙작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내가 쓰던 대포와 부대원들과 함께 배에 탔고,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다. 친구가 내가 편지를 쓰는 것을 보고 항상 편지를 쓰는 녀석이 소설에서는 먼저 죽더라며 농담을 던졌다. 나는 웃으면서 편지를 붙였고, 내가 전쟁에서 죽으면 묘지에 병신이 편지를 썼다고 적어달라고 했다. 친구는 전쟁에서 자신이 죽으면 편지를 쓰는걸 봐도 죽는다고 적어달라고 했다. 물론, 이 두 글귀를 전쟁이 끝나고 묘지에 쓸 일은 없었다.

 영국 해군은 무리할 정도로 포격을 날렸고, 우습게 생긴 전차들을 바다에 띄워 독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국군은 영국군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아 작전이 거의 실패할 뻔 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 영국군이었고,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나는 파리로 나아가면서 폭격을 하려는 한 폭격기를 맞출 수 있었고, 그 폭격기 조종사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떨어진 곳이 영국군 점령지였다. 나는 파리를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시킬 수 있었고, 레지스탕스 중 일부와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 레지스탕스 중 한 명이 기자라는 사실을 알고 내 이야기도 실어달라며 농담을 던졌다. 다음 해 여름이 되기 전에 전쟁이 끝날 수 있었고, 나는 점령지의 치안유지 임무를 맡고 있다 전쟁이 끝나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45년, 영국 런던 승리의 날 행사)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리버풀에 있던 우리 가족은 모두 무사했고, 딸과 아들은 잘 크고 있었다. 나는 런던으로 돌아와 승리의 날 행사에 당당히 승전국의 군인으로써 참가할 수 있었다. 런던에 있던 우리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깜짝 놀랐는데, 이웃 사람의 말로는 이 근처에 독일군의 로켓이 떨어지는 바람에 이 블록 전체가 날아간 것을 내가 퇴근하고서 봤다고 전했다. 나는 집을 새로 짓는 동안 새 일자리를 알아보았고, 수학 전공을 살리는 곳에서 일하길 원했다. 전쟁이 끝난 덕에 경제는 내가 대학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와 달리 호황이었고, 나는 쉽게 한 투자 회사에 어느 시점에서 가장 이익이 될지를 알아보는 일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55년, 영국 런던)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영국의 식민지들이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했다. 인도가 독립하면서 대영제국의 이름은 점점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해운회사에 다니면서 나에게 가끔 선물로 가져온 인도 우표에는 유니언 잭이 새겨져 있었지만, 이제 인도의 국기에는 유니언 잭이 남아있지 않다. 여러 식민지들이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운명을 찾아 나가면서 강력한 대영제국은 점점 그저 그런 영국이 되어갔다. 하지만 본토에서 특별히 문제가 생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의 경제상황은 그런대로 계속 잘 굴러가고 있었다.

 딸과 아들은 수학과였던 부모의 자식답게 수학 성적이 정말 좋았다. 딸은 경제학과에 가고싶어했고, 나는 딸이 나처럼 경제적 이유로 대학에 가지 못하는 것은 없어야겠다며 열심히 노력했다. 아들은 수학 성적이 좋았지만 아들의 마음은 문화에 가있었다. 아들은 팝음악 같은 것을 작곡하고 싶어했고, 음악과 관련해서 더 배우길 원했다. 아내와 나 모두 자식의 진로에 크게 간섭하고 싶어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면 괜찮다고 말했다.



(1965년, 영국 런던 콘서트장)


 비틀즈! 비틀즈! 비틀즈! 내 딸과 아들이 쫓아다니는 그룹이다. 나는 벌써 늙어버린 것인지 음악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요즘 젊은이들이 우르르 다니면서 비틀즈라는 그룹을 본다는 사실이 신기해보였다. 딸은 경제학을 전공했고, 경제학에 대해 더 배우겠다며 학위를 따기 위해 노력했다. 아들은 나도 비틀즈처럼 역사에 남을 음악을 만들겠다며 작곡을 계속해서 공부했고, 친구들과 만든 밴드는 완전히 유명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완전히 이름이 없다고도 못할 정도의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비틀즈는 계속해서 높은 인기를 가져가고 있었고, 미국에서 영국의 새로운 침공이라고도 한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70년대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사람들이 파업을 자주하기 시작했고, 내가 다니는 투자회사에서 내려오는 분석표도 딱히 좋은 지표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70년대가 오자 영국을 활기차게 만들었던 비틀즈는 해체되었고, 영국의 침체기도 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이를 꽤 먹었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보고 있었는데, 딸이 취직한 회사가 점점 안좋아진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복지가 좋아서 괜찮지 않느냐고 말을 해보았지만 경제학을 전공한 딸인지라 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렇게 되다가는 영국이 폭삭 주저앉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고, 나는 정부가 이대로 간다면 오래 가지 못할것이라며 표를 다른곳에 주기 시작했다.



(1982년, 영국 포츠머스 항)


 1970년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영국 경제는 딸이 예상한 대로 완전히 내려앉았고, 총리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노동자들이 시위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파업 때문에 쓰레기가 제대로 치워지지 않아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들도 음악이 잘 안된다는 것을 알고 그냥 철도 회사에 사무를 보는 사람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딸과 아들이 결혼하고 낳은 자식들이 줄어드는 복지탓에 제대로 교육받을 수 없다고도 들었다. 나는 이런 정부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아르헨티나가 영국의 영토를 점령해버렸고, 대영제국 시기에 내 인생의 거의 절반을 보냈던 나는 아르헨티나가 영국을 완전히 깔보고 있다고 생각해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했다. 나는 영국이 화끈한 대응으로 이 대영제국을 깔보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길 원했고, 영국은 아르헨티나에게 우릴 깔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었다. 포클랜드 제도는 영국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포츠머스 항구로 가서 나처럼 당당하게 승리한 우리 군인들을 환영해주었다.


(1997년, 영국 런던)


 이제 영국의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사라지게 되었다. 홍콩이 반환되었고, 영국은 이제 식민제국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손자와 손녀들은 내 아들과 딸이 그랬던 것처럼 오아시스와 블러 같은 밴드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영국이 내가 어릴 때, 그리고 전쟁에 참가했을 때처럼 군사적으로 강력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다시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포클랜드 전쟁 때처럼 영국을 깔보다가는 큰코다치는 그런 나라로 남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딸과 아들, 손자와 손녀들을 보면서 영국은 군사력보다는 문화적으로 강력한 나라로 남을 수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겪은 아버지의 죽음 같은 것을 이제 태어나고 있는 아이들에게도 겪게 할 수는 없으니 영국은 문화적으로 대영제국이 되는 것이 낫고, 그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영국은 새로운 대영제국이 되어 해가 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