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는 좀 부정확한 면이 있음


1. 흥덕왕 사후 왕위 다툼과 희강왕 김제륭의 정변

836년 12월 후사 없이 승하한 흥덕왕의 뒤를 이어 흥덕왕의 사촌동생 김균정과 오촌조카 김제륭의 왕위 다툼이 일어났다. 김균정을 지지하는 자들, 즉 김균정파는 아들 김우징, 조카 김예징, 심복 김양 등이었고 김제륭을 지지하는 자들, 즉 김제륭파는 김명, 김이홍, 배훤백 등이었다. 김균정파는 김균정을 왕으로 추대하고 적판궁에 들어갔지만 김제륭파의 기습 정변으로 김균정은 피살되었고 김양은 중상을 입은 채 포위망을 뚫고 경주 북쪽인 한기 방면으로 탈출하였다.


2. 김우징파의 청해진 도피 및 연합 결성

산야에 숨은 채 남은 병력을 수습한 김우징은 837년 8월 청해진으로 가서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거사 성공으로 김우징이 왕위에 오를 시 나중에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을 것 등을 약속하고 김우징과 결탁해 서라벌로의 진격을 계획하였다.


3. 민애왕 김명의 정변

정변에 성공하여 즉위한 희강왕 김제륭은 자신을 도와준 김명을 상대등, 김이홍을 시중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실권을 장악한 김명은 김이홍과 함께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왕의 근신들을 살해하고, 희강왕은 자결하였다. 이에 김명이 즉위하여 민애왕이 되었다.


4. 김우징파의 거사 준비

838년 1월 민애왕 김명의 정변으로 희강왕이 자결하고, 김양은 그해 2월에 병사를 모집해 청해진으로 왔다. 김양은 김우징,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 타도를 모의하고 그해 3월에 거사를 일으켰다.


5. 김우징파의 무주 침공

김우징파는 강병 5000명으로 무주를 습격, 함락시켰다.


6. 김우징파의 남원 공략

김우징파는 무주 함락 후 남원으로 진출해 정부군을 격파하였다.


7. 김우징파의 청해진 철수

김우징파는 남원에서 정부군을 격파했지만 병사들이 피로한 기색을 보이자 청해진으로 철수하였다.


8. 김우징파의 재진격

838년 12월, 김우징파는 장보고 휘하의 강병 5000명을 이끌고 다시 진격하여 현 나주시 남평읍, 무주 철야현에서 대감 김민주 휘하의 정부군과 격돌하였다. 김양은 기병 3000명으로 적진에 돌격해 이를 섬멸하였다.


9. 달벌대전

839년 1월, 김우징파는 현 대구광역시, 달구벌에서 대장군 김흔이 거느리는 정부군 10만명을 격파하였다.


10. 민애왕 김명의 피살과 신무왕 김우징의 즉위 및 짧은 재위

달구벌에서의 주력군 섬멸 소식을 들은 민애왕은 이궁 혹은 별궁으로 추정되는 월유택으로 도주했으나 병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산림으로 도망간 김이홍도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 배훤백 등을 비롯한 민애왕 정권의 요직에 있던 사람들을 용서해 인심을 얻었다. 김우징은 신무왕으로 즉위하였지만 반년도 안 되어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이 즉위했다.


청해진군이 정예 병력이고 정부군의 사기가 낮았다고 하지만 달벌대전에서의 승리는 언제봐도 흥미로운 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