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소리-

 

예전엔 작은 꽃집이 있던 자리였다. 남아있을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다른 건물이 들어왔을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원룸인가.”

 

설령 다른 가게가 되었더라도 들어나 가 볼 생각이었는데, 원룸 건물로 변해버린 걸 보니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름도 제대로 기억 못했으면서 이제와서 찾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냐고 비웃는 것만 같다. 추억이라면 추억이 잔뜩 서린 곳이지만 남은 건 없었다. 과거의 행동을 부정하는 건물에서 발을 돌린다.

중학교때 애들과는 갈라지고싶어서 일부러 먼 곳의 학교를 왔다. 누군지도 모르는 반 애들의 얼굴중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익숙하다고해도 어렴풋한 기억 수준이었지만, 그간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던 그 여자애의 모습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그 여자애가 살던 집까지 찾아왔다. 같이 다녔던 초등학교 바로 옆 골목의 꽃집과 작은 주택의 풍경은 이제 없다.

그 여자애에게 그때의 너가 맞냐고 물어보면 어땠을까? 그건 어려웠다. 이제와서 옛날에 같은 반이었다고 얘기해봐야 자신도 잊은 판국에 그 애도 자신을 잊었을니까. 어색한 관계가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던 그 애가 맞다면 물어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그렇게나 무가치한 일이다. 너도 나도 보이지 않으면 금방 잊는다.

 

“괜히 걸었네.”

 

집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옛 초등학교 동네 구경이라도 하며 걸으면 20분이면 도착할 거리지만, 자꾸 남는 아쉬움이 괜한 짓을 하게 했단 생각을 만든다. 뭣하러 이제와서 미련을 갖냐고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다.

가만 보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겨우 4년째인데 동네의 모습도 곳곳이 변했다. 워낙 작은 동네라 검붉은 벽돌 담장이 줄지은 낡은 느낌은 그대로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그 여자애는 자신을 기억할까? 아마 마주하면 그 때의 일을 기억은 할 것이다. 그냥 친구라기에는 보통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1년을, 그렇게 함께 했는데도 잊어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보이지 않으면, 잊기 마련이다. 고마웠던 감정도, 추억도 모두.

이젠 외벽의 페인트칠이 벗겨져가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간다. 2년 전까지는 자신이 살던 아파트였지만, 재개발이 된다며 이사를 왔다. 이젠 올 일 없는 곳이지만, 초등학교에서 오는 길은 이 쪽을 지나쳐야 빠르다.

아무도 없는 고요함이 가득하다. 자신이 발을 디딘 곳을 포함해 이 작은 단지 안에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화단이라기엔 작지만 아파트 단지를 두르는 작은 흙밭의 나무들은 관리가 되지 않아 돌바닥을 넘보고 있었고 가지들은 꼭 숲마냥 자신의 팔을 뻗고 있었다.

모래밭이 깔려있던 작은 놀이터는 이름 모를 잡초같은 것들이 허리높이까지 뻗어있었다.

 

“어?”

 

모래밭 놀이터의 작은 담장에 앉아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이상한 사람이면 그냥 돌아가는 것이 나았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설마 자신을 기다린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너.”

 

그리고 인기척에 자신을 돌아보는 얼굴, 입을 꾹 다물고있던 그 얼굴이 지금도 살짝이나마 보인다.

 

“우호림 맞지?”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대답은 없다.

 

“너, 나 기억해?”

 

꾹 다물고 있는 입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그 모습이, 자신이 알던 호림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소리는 없지만, 호림과 같이 있을때 가장 많이 들은 소리였으니까.

 

“련이 맞지….”

 

얼음이 녹는 소리처럼 고요한 한 마디. 그나마도 다른 사람이라면 못 들을 것이 분명한 목소리였지만, 련은 들을 수 있었다. 그녀와 같이 있을때는 항상 그렇게 귀를 세우고 다녔으니까. 그때처럼, 이번에도 들을 수 있었다.

 

“기억하는구나.”

 

호림은 고개를 끄덕인다. 눈 앞에 있는 학생이 련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꾹 다물고 있던 입이 조금씩 달싹거린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초등학교 2학년 이후로는 처음이지?”

 

호림은 고개를 끄덕인다. 옛날이랑 별로 바뀐것도 없구나 싶다.

 

“생각도 못했는데, 같은 반이 됐네.”

“응.”

“중학교는 어디였어?”

“초람여중…너는?”

“민하중.”

 

대화를 주로 끌어가는 것은 련이다. 보통이라면 8년만의 재회에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호림을 아는 련은 계속 혼자서만 떠들어댄다.

 

“너 3학년때는 몇 반이었어?”

“기억 안나.”

“나도 그래.”

 

초등학교때 몇 반인지까지 기억하는 것은 어려웠다. 련은 호림과 자신이 다른 반이었던 것만을 기억한다.

 

“학교에서 말 걸지 그랬어.”

 

자기도 못 본 척한 주제에 호림에게 그 질문을 넘긴다.

 

“...까봐.”

“응?”

“아닐까봐.”

“그래서 여기서 기다린거야?…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네, 몇 번 오지도 않았잖아.”

“생각하려하니까. 기억났어.”

 

아직 아파트 단지에 사람이 있을 무렵에 호림을 데리고와서 배드민턴 같은 걸 쳤던 기억이 난다.

련은 자신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 최소한 이 도시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호림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너는?”

“응?”

“너는…왜 말 안했어?”

 

예전엔 고개만 끄덕이던게, 이젠 자신에게 질문도 한다.

 

“뭐, 그냥 까먹었겠거니 싶었지.”

“그래?”

“예전이잖아? 초등학교 2학년때였으니까. 8년쯤 됐나.”

 

그때엔 분명 호림이 자신보다 조금 컸던 것 같은데, 이젠 자신의 키가 더 크다. 키를 빼고도 변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기억해…배드민턴 쳤던 것도, 과자 먹은 것도, 많았어.”

“하긴, 1년동안 거의 붙어다녔으니까…그러고보니 요즘은 말 잘해?”

 

호림은 습관에 가깝게 고개를 끄덕인다.

 

“필요할 때에는…모르는 사람이랑 얘기하는 건 어렵지만….”

“다행이네, 예전엔 한 마디도 못했잖아…그래서 내가 맨날 붙어다녔고.”

“맞아.”

 

8년 전, 처음 만났던 호림은 정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하루, 이틀, 그렇게 여름방학이 될 때까지 련은 호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2학년 지나고나서부터는 조금씩 얘기했어.”

“그 고생을 했는데, 다행이네.”

 

한참을 대화에 끌려가던 호림이 입을 연다.

 

“그런데, 여기…왜 이래?”

“아 여기? 재개발된다고 사람들 다 나갔거든, 나도 이사갔어.”

“집은?”

“저 위에 까르엔, 여기가 지름길이라 그냥 들어온거야…생각해보니 너 여기서 계속 기다렸던거야?”

“10분 정도…집에 들렀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아. 맞아. 너네 집은 어디야? 꽃집 없어졌던데.”

“이사갔어. 꽃집은 민하역 근처로…집도….”

 

고개를 끄덕이던 호림과 련의 사이에 찬 바람이 지나간다. 봄이라고는 해도 3월 2일, 영하를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콘크리트 담장에 앉아있던 엉덩이가 시려온다.

 

“어디 카페라도 가서 얘기할래?”

 

호림은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련아.”

“응?”

“꽃집…없어진거, 어떻게 알았어?”

 

호림의 한 마디, 련은 자신이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도 했구나 하고 생각한다. 얼버무려도 되지만, 고요한 분위기탓일까? 어릴적의 감성이 올라온 탓일까?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한다.

 

“나도 가봤거든, 혹시나 싶었지.”

 

련의 한 마디에 호림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다지 티가 나지는 않지만, 기분이 변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련아.”

 

먼저 일어나서 엉덩이를 터는 련에게 호림의 목소리가 들린다. 8년 전에 딱 한 번 들었던 또렷한 목소리가 련의 몸을 돌린다.

 

“고마웠어.”

 

8년만의 감사인사에 련은 미묘한 웃음을 짓는다.

잊고 있었던 건 자신이면서, 잊었을거니 뭐니 생각하고 있던 것이 떠오른다. 잊고 있지 않았다는 호림의 감사에 련은 잠깐 눈을 감는다. 무언가 잊고 있던 감정을, 호림이 다시 알려준 것만 같았다.

 

“다시 만나면, 꼭 얘기하고 싶었어.”

 

빙긋 웃는 련은 일어난 호림을 본다. 많이 변했지만, 8년 전의 그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만 같다. 검은 곱슬머리며 앞머리를 깐 헤어스타일과 앙 다문 입, 몸을 베베꼬던 모습은 없지만 분위기는 어른이 되어도 남는 듯했다.

 

“키 많이 컸네? 몇이야?”

“168cm.”

“내가 170cm니까 거의 비슷하네.”

 

130cm를 넘기지 못하던 꼬맹이들이 이젠 겉보기에는 어른이 되어 재회했다. 많은 것이 변했지만, 또 변하지 않은 것들이 남아있었다.

 

“너, 그러면 친구는 있어?”

“아니, 그다지….”

 

카페로 걷는 길, 혹시나 했던 질문을 련이 묻는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답을 그대로 받는다.

 

“뭐, 상관 없겠지.”

“도와줄거야?”

“어?”

 

도와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인걸까? 호림의 한 마디에 련이 호림을 바라본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부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

 

다른 사람이었다면, 도와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련의 한 마디에 호림이 싱긋 미소짓는다. 대답은 없지만, 가장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첫화빌런 첫화빌런 하는데

사실 첫화빌런해도 신경도 안쓰는 게 태반이긴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