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은 내가 생각하기엔 대구 -> 부산 순으로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2019년 매천은 제3의 도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매천은 항구도시는 아니었지만, 해주시가 외항기능을 하였기에 ' 중화학 공업 ' 위주의 산업을 확장했다.


산업 발달로 인해 매천에는 자연스래 인구가 모여들었고, 결국 1970년 40만 명을 넘어선다.


1970년 인구 : 약 40만 명




매천시의 인구가 모여들게 되면서 매천 주변 화천군에도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되었다.


정부는 화천군에 주거 단지 개발을 실시하였고, 매천은 상업 단지 개발을 실시하였다.


젊은 노동자들이 매천에 모이면서, 그로 인해 매천의 출산율도 증가하여, 매천시의 인구는 빠르게 늘었다.


물론 화천군으로의 인구 유출이 약간 있었지만( 집값 등 )


늘어나는 인구에 비하면 껌값이었다.


1975년 인구 : 약 50만 명




매천시는 빠르게 개발되어 매천시 중심부에 송암지구가 개발되기 시작한다.


매천국가산단도 2차 건설이 완공되어 매천에는 더욱 더 사람이 몰리기 시작한다.


( 참고로 이때 대구의 인구는 약 150만 명, 부산의 인구는 약 310만 명이었다. )


그러나 5. 28 매천 민주화운동,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민주화의 씨를 말려버린 탓에 인구가 감소하기도 하였다.


정부 입장에서는 매천시를 어떻게든 제 4의 도시로 키워야 했기에( 평양은 안된다고 생각 )


매천시에 주택 지구, 상업 지구 등등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많이 지어주었다.


1980년 인구 : 약 65만 명




매천시는 1981년 직할시로 승격하였다. 승격 당시 인구는 약 70만 명이다.


또한 남구, 서구, 동구, 북구로 행정구역을 분구했으며 훗날 이수구, 송암구 등의 구가 된다.


1988 하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매천시도 빠르게 서울 올림픽을 대비했다.


축구경기가 열릴 예정이었기에 매천종합운동장을 짓고 버스 교통편을 강화하였다.


또한 버스 안내양이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영어 교육을 하였고, 화주역에서 매천종합운동장까지 직통버스를 운행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안좋은 점도 많았는데, 달동네나 판자촌, 구시가지를 밀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시민이 반발했으며, 정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아파트를 지어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985년 인구 : 약 85만 명




서울 올림픽은 성공적이었다. 냉전의 끝을 알렸고, 부가적 가치도 대단했다.


매천시는 이를 발판으로 삼아 자동차 공장을 건설했고, 인구도 매천으로 모이게 되었다.


1989년, 1기 신도시 계획에 화천신도시가 포함되어 화천역 일대를 화천제1신도시, 매천 접경지역을 화천제2신도시로 지정하여 화천에도 인구가 몰리게 되었다.


1990년 인구 : 약 110만 명




매천직할시는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갔는데도 대중교통이 버스밖에 없어서 교통문제가 매우 심각하였다.


정부는 매천직할시에 매천 도시철도 1호선을 계획했으며, 훗날 2002년 한일 월드컵 직전에 개통하게 된다.


지하철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이사온 인구도 꽤 있었으며, 화천신도시 개발이 완료되어 매천 생활권에 화천시가 포함되었다.


그리고, 매천직할시는 매천광역시로 개칭된다.


1995년 인구 : 약 140만 명




3저호황의 막바지인 1996년이 되면서 매천광역시의 인구는 매우 급상승중이었다.


매천광역시에 국내선 전용 공항이 계획되었으며, 훗날 2005년에 개항하게 된다.


또한, 경부고속철도에 이어 경의고속철도가 계획되었으나, 화천시민의 핌피로 인해 KTX 매천역이 아닌 KTX 화천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이 때문에 기존 지하철 노선을 매천 남부에서 화천역까지 연장공사를 실시하였다. )


택지지구인 이수지구, 재령지구가 공사를 시작했으며, 매천의 인구는 약 200만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2000년 인구 : 약 190만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