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 1937년 7월 노구교사태부터 1945년 일본의 항복 때까지 벌어졌던 중국-일본간의 전쟁으로, 전쟁의 지속기간이나 사상자 수나 태평양 전쟁보다 훨씬 높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주목받지 못해 현재까지도 중일전쟁에 관련한 몇몇 잘못된 편견이 남아있기도 하다.(이 편견에 관해서는 에필로그 때 서술한다)


전쟁 초기 일본은 중국 동부의 주요 해안도시와 일부 내륙을 파죽지세로 점령하는 등 승리가 거의 눈 앞에 보이는 듯 했지만 일본은 결국 패배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차근차근 알아보자.



<경술국치 당시 경복궁>

예로부터 일본은 항상 대륙쪽으로 확장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일정부분 있었고, 그 욕구는 예전 일본이 전국시대였을 때 부터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으로 나타난다. 임진왜란의 목적도 조선을 명(=대륙)을 정벌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함이 컸고, 실제로 함경도까지 진출한 일본군이 시험삼아 두만강을 도하해 건너편의 여진족 성을 점령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거기서 패배했고, 이후 들어선 에도 막부때는 한국과 별 다른 충돌이 존재하지 않았다. 끽해봐야 안용복과 독도 관련 정도?

그러나 미국의 페리제독이 일본을 개항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주변국에 비해 우월한 군대를 얻게 된 일본에서는 "저기 서양놈들도 식민지 잘만 만드는데 우리라고 못할게 뭐냐! 우리는 대륙으로 진출해야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선 조선을 정벌해야한다!" 라는 여론, 이른바 정한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본은 차근차근 조선의 이권을 침탈해가며, 청일전과 러일전을 거쳐 마침내 한반도에서 완벽한 우위에 서게 된 후 드디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했다.



<21개조 관련 사항이 논의됐던 파리 강화회의>


하지만 일본의 확장욕구는 거기서 끝난게 아니었으니, 일본은 조선의 다음 타자로 만주지방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런 노력은 이미 청일전쟁 이후 요동반도 할양 요구나 러일전쟁 당시 만주의 이권 침탈로 나타났다.

1920년대 당시 중국 북부에 들어섰던 북양정부의 위안스카이와도 '21개조'이라는 이름의 중국 입장에서 굴욕적 조약을 맺으려고 하는데, 이를 들은 중국 민중의 반일감정이 폭발했고 일본 입장에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요구를 잘 들어주던 북양정부가 국민정부의 북벌로 망하고 만다.  

이에 상황의 여의치 않게 된 젊은 영관급 일본 장교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하고, 마침내 그들은 '지금 만주를 장악한 군벌 장쭤린을 죽이고 무주공산이 된 만주를 꿀꺽해야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물론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급의 아이디어지만 이때부터 돌+I의 싹수가 보이던 일본군답게 곧 그들은 그들의 상상을 실제로 이행했다.


<폭파당한 장쭤린의 열차>

결국 1928년 6월 4일, 국민당의 2차 북벌로 인해 기반 일부인 화북지방을 잃고 만주로 돌아오던 장쭤린을 일본 관동군이 몰래 폭사시키고, 장쭤린은 치료 도중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장쭤린이 당시 가장 친일적인 군벌 중 하나이기도 했고, 일본에 최소한의 양심과 정상적 사고가 남아있던 때라 관동군의 행동은 일본 내에서도 "뭐하는거야 미친놈들아!" 라는 질타를 받았다. 또한 국제사회에서까지 관동군의 만행이 욕을 먹어 관동군은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만주지방을 도로 장악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일본 정부는 아예 만주를 중국에서 분리시켜 일본의 괴뢰국을 만들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장쉐량이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언함으로(동북역치) 불가능해져버렸다.

이때 일본에서는 이사와라 간지라는 장군이 등장하는데, 이 장군은 "언젠가 100% 동양(일본)과 서양(영미)간의 전쟁이 생긴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만주 몽골을 무력으로 먹고 대동아공영권 가즈아!" 이런 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던 분이었다. 당연히 만주를 당장 무력침공으로 먹어 쓸데없이 중국과 싸울 생각이 없던 일본 참모본부는 이를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간지가 아니었다. 그는 관동군의 청년 장교들을 꾸준히 선동했고, 마침내 1931년 기회가 왔다.

1931년 당시 중국은 중원대전과 양광사변 등으로 정신이 없었고, 만주지방을 지배하던 봉천군벌이 본진인 만주를 제끼고 화북 확장에 몰두하고 소련과 전쟁을 뜨는 등 정신 없던 상황이었다.

1931년 6월, 일본군 장교가 농부로 위장해 중국령인 만주의 대싱안링 지방에서 간첩질+정찰을 하다가 봉천군벌에게 발각되어 살해된 '나카무라 사건'이 일어난다. 분명 잘못은 먼저 스파이 행위+무단침입을 한 일본 장교가 했지만 일본제국이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던가. 일본 제국은 자국의 장교가 살해당한 사실에 초점을 맞춰 봉천군벌과 중국에 무리한 요구를 했고, 봉천군벌은 가능한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요구사항을 모두 받아줬다.

이런 갈등 분위기는 1달 뒤 있던 중국 농민과 일본 경찰 간 총격전이 벌어진 만보산 사건으로 정점을 찍는다. 하지만 장쉐량은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는 등 최대한 비위를 맞췄고, 일본 내각도 "우리도 만주 침공하고 싶었는데 명분이 없어서 못해." 이런 식으로 결론 지어지는...줄 알았다.



<류타오후 사건 현장>


위에 서술한 이사하라 간지 장군은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고,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만주를 장악하자는 계획을 꾸미게 되고 내각이 끝까지 제지할 경우 쿠데타까지 불사할 계획이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명령불복종으로 처벌감인 일이지만 당시 일본에는 위의 지시를 씹고 독단적으로 전투를 일으키거나 한 장교를 애국자로 칭송하는 문화가 있었다. 이런 문화는 일본제국 패망 때까지 쭉 이어지게 돼 이후 노구교 사변+홍콩 공격의 주 원인이 된다.

어쨋든 미나미 지로(조선 총독을 지냇던 그 사람 맞다)와 가나야 한조, 이사와라 등을 중심으로 침공 명분을 만들기 위한 계획이 수립되는데, 그 계획이란 만주철도를 폭파시키고 중국군이 했다고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도 내각 등 윗선에서는 관동군의 이런 막장짓에 제동을 걸려고 했고, 심지어 히로히토 천황까지 이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굴복한다면 관동군이 아니었다. 이들은 점을 쳐 가지고(...) 계획을 할지 말지를 정하기로 했고, 나무 젓가락을 쳐서 왼쪽으로 가면 실행, 오른쪽으로 가면 중단으로 하고 쳤는데 오른쪽으로 떨어졌다. 이에 그들은 계획을 중지하려고 했으나 관동군 내의 몇몇 장교들이 반발, 결국 점을 친 결과를 뒤집고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이들은 류타오후 지역의 만주철도를 약간 폭파했고, 폭발의 강도는 경미해 열차도 멀쩡히 지나다녔으나 관동군은 "중국군이 우리가 세운 만주철도를 폭파했어요!"라고 위에다가 구라를 친다. 관동군과 한패였던 이타가키 대좌는 혼조 관동군 사령관을 사칭해서 심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관동군의 이 짓거리를 본 상부는 당연히 "그만해 미친놈들아!" 라는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공격에 들어간 관동군 장교들은 사령관인 혼조와 그들을 막으러온 다테가와를 설득하고, 다테가와는 그들의 설득에 감동해 그들 편으로 넘어가고 마침내 요지부동이던 혼조도 허락을 해주고 만다. 이들을 저지할 마지막 보루인 일본 총영사는 관동군 장교 타다시에게 칼로 위협당해(...) 마지못해 계획을 수락한다. 이로 인해 마침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발한다.


<만주사변 당시 무크덴(심양)에서 진군하는 일본군>

일본군이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가자 저항하던 장쉐량의 동북군은 화력 차이로 쪽도 못 쓰고 깨지고 개전 3일만인 20일 심양이 일본군에 함락된다. 다음날인 21일에 창춘과 지린성이 항복하고, 같은 날 조선 주둔군이 무단으로 압록강을 넘어가며 사태는 심각해진다. 어이없는 것은 일본 정부의 대응이었는데, 조선 주둔군에게 원대복귀를 내리던 당시 일본 수상 와카쓰키는 이미 그들이 강을 넘었단 말을 듣자
"그래? 어쩔 수 없지. 올해는 특별 군사 예산을 써야 하겠구먼." 이라는 희대의 개드립을 날리며 이를 묵인했다.

장쉐량의 대응도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그는 일본이 심상치 않으니 만주에 군대를 더 주둔시켜달라는 수하들의 말을 씹고 화북으로의 세력 확장에 골몰하며 수십만 병력을 화북지방으로 보내놓은 상태였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장쉐량은 화북 군대를 만주로 돌리라는 말을 듣지만 일본 vs 중국의 전면전으로 확전을 두려워한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현장의 병력들에게 무저항 지시를 내린다.

당시 장쉐량의 동북군은 300대의 전투기+함선까지 있을 정도로 질도 수준급이고 물량도 50만에 육박하는 엄청난 수를 자랑했고, 상식적으로 아무리 일본군이 날고 기어도 고작 1~2만의 관동군이 질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 50만 군대를 상대로 이길리가 없었다. 이것이 만주사변에서의 아쉬운 부분이다.

어쨋든 진군하던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만주지방을 점령해나갔고, 헤이룽장, 치치하얼이 함락되자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안 장쉐량은 그제서야 저항을 촉구하지만 이미 늦었다. 5만의 병력으로 그나마 남은 도시인 진저우를 방어하려고 했지만 장쉐량의 병력이동을 안 옌시산 등 화북지방 군벌이 곧바로 뒤치기에 들어갔고(...) 결국 동북군이 와해되며 진저우와 하얼빈이 함락됨으로 만주 전역이 일본에게 떨어진다. 이후 그 지역에는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이 설립된다. 어쨋든 이사하라의 소원대로 된 것이다.

참고로 국제연맹은 최소한 말리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다. 역시 명불허전 국제연맹 답다.

일본군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33년 관동군 촉탁 이시모토가 게릴라 부대에 납치된 '이시모토 사건'을 빌미로 산해관 등 러허성을 공격해 탈취하고 화북지방 일부까지 점거해 이제 중-일 국경은 베이핑 바로 앞까지 후퇴하게 된다. 이 책임을 지고 장쉐량이 사령관 자리에서 사퇴하고, 일본은 국제연맹의 압박으로 인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만다. 


이후 중국군-일본군 양측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