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오 50일차


 텅 빈 거리를 쓸쓸히 걸었다.


 세상이 멸망하면 이런 느낌일 거라 막연히 생각하긴 했는데, 직접 겪으니 정말 허망하다.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한 이유는 좀비도, 핵전쟁도, 전염병도, 외계인도…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인류 전원이 이 세계를 탈출했을 뿐. 나를 제외하고.



 왜일까. 모두가 그런 계획을 세우는 동안 나는 그 어떤 정보도 듣지 못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침묵했으며 심지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전혀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텅 빈 거리에서, 남들의 집에서, 편의점에서… 온갖 곳에 남겨진 쪽지들을 통해서 뒤늦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몰랐지만, 인류는 세계를 도약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행성을 벗어나고, 은하계 너머로 벗어나는 것도 아닌, 이 우주 자체에서 벗어나는 힘.


 그래서 그 힘을 통해서, 마찬가지로 같은 힘을 가지고 인류를 쫓아오는 죽일 수 없는 어떠한 괴물을 피해 주기적으로 다른 세계로 피한다는 건데… 대충 이해는 했다. 근데, 나는 왜 버려진 걸까.



 그 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부모님이 잠깐 산책을 간다고 했고, 누나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지. 형은 결혼식 준비가 바쁘다며 못 본 지도 꽤 됐었고.


 나는 그냥 그런 줄만 알고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정전이 일어났다. 짜증을 내며 거실로 나와 물을 마시고, 창 밖을 본 그때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인류는 그들이 건설한 그 문명을 내팽겨치고, 다른 세계로 도주한 이후였으니까.



 그게 벌써 한 달 전이구나. 아니, 두 달 전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시간 감각이 고장난 지도 오래 됐으니까. 이건 아마 일주일 전…? 아니, 이것도 확실하진 않다.


 그저 정처없이 방황하고, 혹시나 나 같은 낙오자가 없을까 소리쳐 부르고, 걷고, 걷고, 또 걷고… 그러다 살던 곳을 벗어나 다른 시에 도착했는데도 나 이외의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나처럼 버려진 애완동물들은 꽤 많이 찾을 수 있었다. 코가 길쭉한 길고양이들이나 토실토실한 비둘기들도, 날벌레들도.


 참, 어이가 없다. 정말 사람들만 사라져버린 거구나.





 #낙오 100일차


 상한 빵을 먹었다가 복통에 시달렸다. 며칠을 아스팔트 바닥에서 뒹굴었는지 모르겠지만, 겨우 회복하고 일어났다. 그 뒤부터는 빵집은 거들떠도 안 봤다. 무조건 통조림과 과자만 배낭에 챙겨뒀다가 조금씩만 꺼내먹었다.



 어느 날은 걷다가, 저 멀리에서 버섯구름을 목격했다. 버려진 발전소에서 뭔가 잘못된 걸까. 그때부터 진물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그 피폭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머리는 빠지고, 배는 아프고, 피부는 떨어져나가고, 고름이 나고, 이게 대체 다 뭔가 싶을 정도로 증상이 많았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어떻게든 버텨내고 일어났다.



 나, 어쩌면 꽤 굉장한 재능이 있었던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차에 치여도, 공사 현장에서 떨어진 쇠파이프에 맞아도, 끓는 물을 뒤집어써도, 광인에게 잘못 걸려 칼에 찔려도… 어떻게든 살아나긴 했던 것 같다.


 이런 걸 악운이 강하다고 하는 거겠지. 정말 아파서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지만… 그래도 숨은 붙어있으니까.





 #낙오 200일차


 정말 식상한 깨달음이지만, 결국 나도 인간으로서의 잠재 능력을 각성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힘. 그걸 얻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어쩌면, 나는 그걸 빨리 각성하지 못한 탓에 불량품으로 판별돼서 버려진 건 아닐까. 참, 지독한 이야기다.


 애완동물들도 보면 그냥 케이지에 갇힌 채로 죽어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경우도 많았다. 그럼 어느 정도는 원하는 대상을 같이 데려갈 수도 있었다는 건데, 굳이 날 버리고 갔다는 건.


 난 애완동물만도 못한 존재였던 건가.





 #낙오 150000일차


 아하. 이런 거구나. 드디어, 능력의 사용법을 알아냈다.


 심지어, 원한다면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던 잡다한 동물들 수천 마리, 아니 수십, 수백만 마리라도 함께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감으로, 인류가 어디로 대피했는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나, 굉장하잖아, 진짜….



 이대로 가족들에게 돌아가면 되겠지. 그럼 이렇게 굉장한 능력을 각성한 것도 칭찬해줄 거고, 진정한 가족으로 대우받게 될 거다….



 근데, 너무 아니꼽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버려진 건, 인류를 쫓아온다는 그 괴물에게 시간을 벌기 위해서 미끼로 던져놓은 것 아닐까? 이건, 너무 억울한데.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그냥 쓰레기처럼 던져놓고 사라졌다고?


 근데 정작 그 괴물이란 건 만나지도 못했다. 너무 성급하게 도망친 것 아닌가? 애초에 날, 이렇게 버려둘 필요도 없었잖아.



 난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안다. 나를 따라다니는 이 동물들도, 내가 원한다면 더 굉장한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정확히는, 복수에 적합한, 사람을 죽이기에 적합한 맹수로 바꿀 수 있다.


 세계를 도약할 준비를 마쳤다. 동물들도 저마다 흉흉한 모습으로 바꿔줬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자, 복수하러 가자. 우릴 버린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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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설정


인류는 여러 차례 어떤 강력한 괴물을 피해 세계를 도약하고, 지구에서 최대한 발전한 뒤 따라온 괴물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소멸시킴.


하지만 이 괴물은 격퇴당해도 죽지 않고 인간에게 기생하게 됨


괴물은 인간의 몸을 완전히 차지했지만 한 차례 죽음을 겪으면서 자의식이 약해져 자신이 인간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생활하게 됨


인류는 괴물이 들어간 인간을 특정하고 계속 암살시도를 하지만 차에 치이거나 칼에 찔리는 정도로는 죽지 않았고, 만약 죽인다 해도 다른 인간에게 들어가기 때문에 죽이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해 암살 시도는 포기함.


대신 괴물이 자신을 인간이라고 인식한다는 점에 착안해 인류는 괴물을 버리고 세계를 넘어가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함.


문제는, 일부 인원이 흔적이 남지 않게 소각해야 하는 지령서를 남겨버렸고, 괴물은 결국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세계를 넘어가야 한다는 판단을 내려 능력을 각성하게 됨… 대충 400년 정도 걸려서.



이미 고통과 복수심 때문에 괴물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


한편 세계를 넘어간 인류는 괴물이 넘어오지 않자 안심하는 것도 잠시, 자기들끼리 뭔가 분쟁이 생겨 멸망하게 됨.


그래서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인류의 후손들이 인간과 엘프, 드워프 따위로 불리게 된 시점에 괴물이 등장하는… 대충 그런 판타지 마왕의 뒷배경으로 생각해봤음.



한 시간 동안 급조한 거라 구멍이 있을진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런 이야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