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설 선생의 투쟁 중 백미는 바로 ‘고문 폭로’였다.


재판이 한창이던 1927년 10월 17일 동아일보는 ‘공산당 피고 5명이 요로 경관을 고소했다’는 기사를 대대적으로 다룬다. 즉 권오설·강달영·전정관·홍덕유·이준환 등 피고들이 변호사인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후세 다츠지(布施辰治)·김병로·이인·김태영·허헌·한국종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해서 이른바 고문 일제경찰들을 ‘폭행독직죄’로 고소한 것이다. 고소를 당한 자들은 종로경찰서 주임경부인 미와 와사부로(三輪和三郞)와 경부보인 요시노 도조(吉野藤欌), 그리고 조선인 경부보 김면규와 순사부장인 오모리 히데오(大森秀雄) 등 4명이었다.


“고소인(공산당 피고)들은…종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1926년 6월14~8월8일 사이 종로 경찰서 2층 신문실과 경찰부 신문실에서 우메노(梅野) 형사 및 유(劉)·한(韓) 형사 등과 함께 갖은 폭행을 가해 권오설은 앞니 두 개가 부러지고 다른 피고들도 중상을 당했다는 것인데…같이 수감되었던 다른 피고의 증언까지 세웠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전하면서 “많은 변호사가 대리인이 되어 이처럼 주요 경찰관을 고소한 것은 근래에 보기 드문 중대사건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고 전했다.


고소장을 제출한 후루야 변호사는 “경찰관이 피고를 폭행해서 답변을 강요한 것은 헌법에 보장된 인권을 유린하고 형사소송법에 보호된 피의자의 변호권을 무시하고 사법재판의 공평진실을 그릇되게 하는 법률파괴행위”라고 강력하게 규탄했다. 권오설 선생 등을 고문한 미와 와사부로는 드라마 <야인시대>에 등장하는 그 미와 경부(탤런트 이재용 분)를 가리킨다. 권오설 등은 “고문 때문에 앞니가 덜거덕거려 바람만 스쳐도 고통스럽다”면서 다양한 고문 사실을 폭로했다.


“죽도록 두들겨맞았다. 다리 안쪽에 각목 2개를 끼워 하루 밤낮을 고문당했다. 또 손가락 사이에 부채를 끼우고 양쪽을 쥐어….”


이 사건은 식민지 조선 뿐 아니라 일본 열도에까지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인 인권변호사인 후세 다츠지(1880~1953)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에서 일어난 고문사건을 맹렬히 성토해서 여론을 환기시켰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30일자는 ‘천하의 시청을 집중한 고문경관 고소사건의 전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의 노동농민당과 노동당이 합동으로 고문경찰을 강력히 규탄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면서 “이 사건은 일본정계에도 일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소사건이 권오설 선생 등의 승리로 끝나리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소장을 제출한 다음날인 10월 18일 동아일보 기사도 “권오설의 앞니 두 개가 부러졌다지만 그것이 고문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넘어져 그렇게 된 것인지 입증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시내 모 경찰서 경관의 말을 인용했다. 하기야 일제가 고문사실을 인정할 리도 없었다. 일제검사가 불기소처분을 내리자 권오설 선생 등이 항고했지만 판사가 기각했다.


그러나 고소사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고소당한 경관들도 어지간히 캥겼던 것 같다.


동아일보 1927년 10월26일자는 ‘취조를 앞두고 불안 중의 경관’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피고소 경관들도 적지않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 전했다.


“조선공산당 피고인 권오설 외 네사람이 종로경찰서 경찰 4명을 고소해서 세간의 이목을 놀래키고 있는데 고소당한 경관들도 적지않케 염려하고 있단다. 피고소 경찰 중 모씨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나는 그래도 괜찮지만 네 아내는 남편이 고문하다가 고소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때문에 구인 당하게 되면 심약한 여자가 혼자 어떻게 견딜까 걱정하고 있다’고 토로했단다.”


조선인들을 마구 구타하고 고문한 일제경찰이지만 ‘고문경찰’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도 걱정이고, 그 때문에 자기 부인이 충격을 받을까 그것도 염려된다고 했단다.


https://m.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1904171538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