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대표가 TK 공천양보 제안을 일축한 뒤 친박핵심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부임(2016년 2월)했다. 그리고 ‘친박 감별사’라는 사람들이 TK를 다니며 ‘진박(眞朴) 마케팅’을 벌였다. 얼마 뒤 살생부 파동이 불거졌다. 살생부 논란은 김 전 대표가 부인하면서 당시 잠복했지만, 돌아보면 살생부에 이름이 올랐던 비박(유승민 의원과 측근 의원들, 이재오 의원 등)은 이한구 위원장 체제에서 무더기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살생부가 왜 살생부인지 말해주는 장면이었다. 이 과정에서 희대의 ‘옥쇄파동’이 벌어졌다.
-왜 도장(대표 직인)을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갔나. 
“아이고야. 나는 도장 가지고 나른 일이 없다.  도장은 당 금고에 있었다. ”

-그런데 왜 그런 말이 나왔나.

“ (친박 측이) 가짜뉴스를 흘린 거다. (현기환의 제안을 거절하자)이한구가 와 가지고 한 일성이 ‘당 대표부터 공천 안 줄 수 있다’였다. 당시 새누리당은 9명 최고위원이 표결로 결정하는 집단지도 체제였기 때문에 당 대표였던 내가 아무것도 내 의사대로 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한구가 공천을 무리하게 해도 파국을 막기위해 수용했지만 제일 마지막 6곳(이재오 및 유승민계 대거 낙천)은 확실하게 부당한 공천이어서 최고위원회에서 의결할 수 없다고 기자회견으로 맞섰다. 최고위 소집권은 나한테 있으니까 내가 버틸 수 있던 유일한 힘이었지. 내가 회의를 안 열면 공천이 안 되는데, 도장 갖고 도망갈 필요가 뭐가 있나. 총선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망쳐놓은 거요, 이한구를 보내 가지고 판을 깨면서. ”

-어쨌든 옥새파동으로 김 전 대표는 데미지를 많이 입었다.

”내 지지율이 반기문 보다 앞선 적도 있었다. 내게 큰 사건이 터져도 지지율이 안 떨어졌다. 그런데 도장가지고 날랐다고 되니 떨어지더라. 내가 (패배 책임을) 뒤집어쓴 거지. 만약 총선 때 내가 제안한 상향식으로 갔으면 무조건 180석이었을 거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분열했을 때니. 그 때 공천 전까지는 우리는 분열하지 않았다. 문재인 집권은 박근혜 탄핵이 아니라 공천 때 시작이 된 거다.”
2016년, 박근혜정부 4년 차는 그래서 중요하다. 오늘의 정치지형을 만든 시작이기 때문이다.

[출처: 중앙일보] 김무성 화끈한 고백 "2016년 새누리 살생부 40명 명단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