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말에 감동받다

현실의 보수에서는 받을 수 없는 감동을 가끔 영화를 통해 받는다. 진보인 내가 보수의 말에 끌린 적이 또 한 번 있다.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에릭 바나 분)는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 앞에서 짧은 연설을 한다. 대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말주변이 없어 긴 얘기는 하지 않겠다. 나는 조국에 충성하고, 가족을 수호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해왔다.” 군더더기 없이 자기 인생을 이끌어온 철학만 간략히 표명하는데, 이런 우직함이 그 어떤 화려한 수사학보다 더 깊은 감동을 남겼다.

현실에서 나를 감동케 한 보수의 말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행한 대국민 담화였다. 거기서 그는 상황을 솔직히 알리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열린 민주주의에 속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결정을 투명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대응을 되도록 잘 근거 짓고 잘 전달하게 해줄 겁니다. 나는 이 과제의 핵심은 시민 모두가 과제를 자기 과제로 여기는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지금 심각합니다.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여기서 그는 이 사태에 대응하는 독일 정부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열린 민주주의’와 정보의 ‘투명한’ 공개. 이어서 그는 정부 부처와 연구기관들이 방역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알리고,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체제를 갖춘 나라 가운데 하나”라며 국민을 안심시킨다. 담화에서 가장 감동적이던 대목은 다음이다. “그것은 그저 통계학 속 추상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아내와 남편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입니다.”

확진자 몇 명, 격리자 몇 명, 사망률 몇 % 등 보도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통계상의 추상적 수치가 실은 내 주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다. 이런 연설은 국민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고, 국민의 협조와 사회적 연대를 끌어내 사회를 하나로 통합한다. 독일 보수가 괜히 장기 집권하는 게 아니다. 한국 보수는 독일 보수당의 성공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최근 김종인 위원장이 독일 ‘아데나워재단’과 교류협력을 모색하는 것도 아마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민주적인 아버지상

한국 보수는 ‘가족을 보호하고 가정을 부양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잃은 지 오래다. 과거 그 아버지는 ‘박정희’로 표상됐다. 박정희가 북한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산업화로 나라를 먹여살렸기 때문이다. 보수가 박정희에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이고, 보수 일각에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세우려 하는 것도 그것과 관련 있다. 보수의 존속을 위해 ‘아버지’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아버지가 집에서 폭력(‘독재’)을 휘두르는 폭군이었다는 데 있다.

늦어도 1987년 이후 보수는 새로운 아버지상을 구축했어야 한다. 하지만 보수는 그런 노력을 하는 대신 1997년 이후 그저 박정희를 ‘리바이벌’하는 것으로 충분해했다. 외환위기 사태로 이른바 ‘고개 숙인 아버지’ 현상이 나타난 시절, 비록 폭군이었으나 그래도 집안은 먹여살리던 과거 아버지를 다시 불러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거의 아버지가 환생해도 이제는 집안을 먹여살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명박 정권의 실패가 보여주듯이 그런 시대는 오래전 지났기 때문이다.

그사이 보수 이미지는 ‘돈도 못 벌어오는 주제에 툭하면 너를 호적에서 파내겠다고 행패 부리는 할아버지’로 변했다. 아직도 자신들이 사회의 오버도그(over dog)라고 믿는지, 한국 보수는 여전히 툭하면 타인을 ‘종북좌파’로 몰아 배제하려 든다. 보수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제 보수는 이 사회의 언더도그(under dog)가 됐다는 사실이다. ‘빨갱이’ 낙인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르면 나는 “알아줘 고맙다”고 대답한다. 요즘은 외려 ‘토착 왜구’가 사냥당하는 시절이다.

요즘은 민주당이 과거 보수가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이들 역시 이견자들을 비(非)국민으로 만들어 국가공동체에서 배제하려 한다. 차이를 품어 통합하는 대신, 차이를 섬멸해 사회를 등질화하려는 것이다. 이 행태에 진보적 지식인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이런 배타성으로는 장기적으로 중도층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오는 이들은 보수가 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애먼 사람을 적으로 돌릴 게 아니라, 적까지 친구로 만드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싸움에서 적은 최소화해야 한다.

이제 보수는 ‘민주적인 아버지상’을 구축해야 한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시대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역할 아닌가. 이 새로운 아버지는 과거 아버지와 달라야 한다. 이견자를 밖으로 내칠 게 아니라 안으로 품어야 한다. 노조를 적대시하는 대신 아군으로 만들고, 외국인 노동자를 배척하는 대신 우리 사회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아버지는 말 안 듣는 자식마저 품고, 배다른 자식이라고 밖으로 내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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