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국가명       전라 인민공화국

 

존속기간   1980년 5월 18일~5월 27일

 

수도          광주

 

국가 이념 공산주의

 

국가 종교 '대중'교

 

국부          김대중

 

교전 사례  남한vs반란군

 

교전 세력

 

남한                                            전라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제4공화국                         광주반란군다수

 

대한민국 육군                                    북항간첩새력소수

   

지휘관                                      

 

최규하 대통령                            윤상원공산투쟁 위원회

                                                        박남선인민군상황실장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진종채 제2군사령관

 

윤흥정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박준병 제20사단장

 

정웅 제31사단장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

 

신우식 제7공수여단장

 

최웅 제11공수여단장

 

안병하 전남도경국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진압병력                                   저항병력

제3공수여단                  중무장한 광주빨갱이 폭도들

제7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

제20사단

제31사단

 

 

인적피해

남한측                                               전라인민공화국측

 

군인 23명.

경찰 4명 사망                             시민군 165명

                                                     사망76명

                                                     실종3,515명 부상

군경 253명 부상

 

 

 

 

                                         결과

  계엄군의 승리및 광주수복  전라인민공화국멸망

 

1 개요 

광주에서 간첩에의한 폭도단 결성 민주화를 사칭한 폭도들이 광주를 전복 이에 해산하라는 명령을 불이행

방송국및 주요 국가기관을 기습공격및 점령

경무장 경찰로 진압시도→조기진압실패

이해 분노한 전두환 장군이 공수여단및 전차부대를 급파 중무장한 반란군에 불구하고 훌륭한 전술및 지휘체계로 전라인민공화국과 치열한교전끝에 광주 점령

 

 

2전개

반란 이전의 조짐

이미 반란은 북한의 심리전,간첩파견 공산주의가 뼈속깊이 있는 전라도인들의 작품으로 피해갈수 없는 재난이었다 이런 요소들이 합쳐 반란이전 곳곳에서 계획적이며 산발적인 불법시위로 경찰의 집중을 분산시켰다

 

 

반란의 시작

 

 

이꼴을 지켜 볼수없던 신군부는 게엄령 선포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18일 오전에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서 부상자가 발생→이에 공수부대의 정당방위 행사→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 전남대 학생 300여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실패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진압을 위해 5월18일 오후 4시에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   제7공수여단은  폭도(이때부터 폭도의 기질이 보이기 시작함으로 명침을 바꿈)들에게 행동을 시작.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으로 진압

 

 

 

 

5월 19일~20일

본성을 드러내다 시위에서 무장시위로.....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폭동에 계엄군에대한 날조및 잘못된 정보를 접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공산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계엄군의 생명이 위협받게 생겼다 . 공수부대는 폭도라면 생존을 위해 학생, 시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폭도들을 공격으로부터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방어진압을 자행했다.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기습 했으나  간단히 격퇴 당하여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폭도들은 광주MBC 방송국을 전략전이며 단체적으로 기습공격 관계자 참수 및방화했다. 20일 24시  생명에 위협을 받은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부대원들이 느낀 개개인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것을인식,나아가 부대원이 사망함에 따라 개개인의 생명에서 나아가 여단의 존망위협을 느낀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

 

 

5월21일

 

평화의 협상 그러나 결렬

국지전에서 전면전으로... 

남한의 최초의 승리 그러나 전라인민공화국의 배후세력의 계략

 

 

5월21일 오전에 전남도청과 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폭도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전라인민공화국 대표는 21일 오전에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전라인민공화국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에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이미 전우가 피를 흘려가며 살려달라는것을 본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화염병으로 인하여수세에 몰려 부상자가 속출 심각한 위협을 느낀 계엄군은 폭도들을 향해  발포(21일 정오 12시경 전남대 앞·21일 오후 1시경 당시 전남도청 앞)를 시작했으나, 폭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군부대 경찰서들 공격 총기및 화염병으로 응사하였다.또한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반란군은 수백여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폭도들에게 분배됐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이소식을 들은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수협·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패잔병 및 폭도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폭도들 특유의 무질서만 없어다면(ex폭도: 나 이마에 피나요 의사:이환자는 총상입니다 폭도: 이새끼가 나먼저 치료하라니까)더많은 생명을 구해 갱생시켜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반성해가며 살았을것이다

계엄군은 승리의 기쁨도 잠시 폭도들의 최후의 공세에광주시 외곽으로 격퇴당하였다. 폭도들은 21일 저녁에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 장군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그제서야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에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폭동을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을 낱낱히 공개하였다

 

계엄군의 반격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광주외곽봉새작전 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미니버스 총격 사건, 송암동 전투을 비롯한 전투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순직하였는데 이는 계엄군이 폭도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느겼다는 증거가된다.

 

 

 

5월22일

 

무정부도시 광주....

그리고 학살당하는 정부군

 

정부군을 전멸시킨 폭도들은 자유광주란 간판을걸고

자치를 시행한다 이과정에서 폭동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른 아이 남녀노소 할것없이 엄청난 수모를겪는다 그리고 퇴각명령을 받지못한체 자리를 사수하란말을 들은 정부군은 폭도들에의해 쥐잡이듯이 소탕을 다한다

계엄군의 반격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독립을 요구 김대중및 주요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공산화 인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인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징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공방정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졸렬한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함께 패잔병을 치료하기 위한 피를 강제 헌혈하는 행위가 이어졌다. 공산 자치 기간에도 광주 폭도들의 협박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 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 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 전라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염두하고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수탈이나 패잔병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윗동네에서 쓰는 표현과 매우일치하다). 자기들끼리 광주 자유 공산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5월27일

 

광주공방전의시작 그리고 정의 의승리

그러나 편파적인 증거로 인한 외신의보도

그리고 누명을쓴 전차의 아버지.....

 

 

5월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27일 새벽 2시에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공새의 시작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저항하던 폭도를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폭도들은 다른 곳에 배정된 폭도들을 팔아먹고 살고보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서로 싸우다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폭도들을 체포·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의의와 한계

한국에서 빨갱이 짓거리를 하면 단호히 대처한다는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한계는 조기진압의실패로 인해 다수의사상자 발생및 당시 국제 사회에서 알려지지않은나라에서 편파적인 증거를 입수한 외신들의 발표에 대체에 미흡하였다 또한 부두목을 체포하지 못해 일부 빨갱이들의 잔존 꾸준 적화를펼침

                                             영향

전두환 장군및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사람들이 누명을 뒤집어씀 

또한 전라도가 공산화됨에따라 국가에 심각한 경제 타격을 제공

또한 대한민국역사 최초로 빨갱이 대통령 당선

 

 

 

 

 

 

 

끝가지 잃어주어서 고맙다

이건 이때까지 폭도들의 관점에서 봐오던 우리를 반성하길 바라며쓴글이다

역사적으로 훨씬약한 전력을 가진 부대가 매우 강대한 부대에게 맞선다는것은 매우 정의로운 행위이며 멋있는 행위였다

인제 우리의 색안경을 벗고 진짜를 봐야할때가 오지않았는가?

이제 길고 긴꿈에서 대한민국은 깨어나서 시궁창인 현실을 직시해야할것이다

실업률은 역대 최고이며 실업률이 놓은것이 나쁜것만은 아니라는 정부.... 대한민국은 과연 우리가 알고있는 대한민국인걸까? 아님 공산민국인걸까?

인제야말로 혁명을 일으킬 시대가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