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연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연남건은 군사의 일을 중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연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왕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겨울 10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할 때, 고종이 명령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고, 다시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大廟)에 바치게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는데, 왕의 정사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용서하고, 왕을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연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삼고, 중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으며, 이적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을 내리고,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귀양보냈다. 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檢校)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가 당나라 고종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668)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