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대표 페이스북>


춘향전 공연은 시골에서도 언제나 인기였다. 배우들은 실제 주인공이라도 되는듯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았다. 이도령 역을 맡은 배우들은 진짜 어사또라도 된 듯이 사람들이 허리를 굽신거렸다고 한다.


문제는 악역 배우들이었다. 변사또 역을 맡은 배우는 시골에서 밥조차 제대로 얻어먹지 못해 애를 태웠다. 읍내 식당에라도 들어서면 시골 노인들이 달려와 "이 나쁜 놈"을 외치며 지팡이를 내려치는 바람에 혼비백산 도망가기 일쑤였다. 장화홍련전의 배우들도 그랬고 콩쥐팥쥐도 심청전도 그랬다. 악역 배우들은 어디에서나 찬밥이었다.


이런 현상은 TV와 영화, 연극이 지금처럼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조차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사람들은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배우 출신들이 자주 정치인으로 진출하는 것도 그런 효과가 잔상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장의 우상이 초래하는 현상의 일단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소송은 검사와 변호인이 격돌하는 장소이며 귀납적 증거를 확정해가는 절차이지 "네죄를 알렸다!"고 고함지르고 겁주는 그런 장소가 아니다. 그렇게 현사소송법이 확립되어 온 것이다. 미국에서조차 소송법적 절차가 확립된 것은 20세기 들어서다. 엄밀한 증거주의를 유지해야 하고 그 증거가 불법으로 채득된 것이면 그것에서 2차적으로 얻어진 증거조차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증거재판의 요구 조건이다.


누구라도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선언된 것이 바로 현대의 사법 절차이며 재판절차가 귀납논리의 전당이 되면서 비로소 구축된 인권의 기본 장치였다. 우리 헌법도 제12조4항은 '누구든지 체포 또는 구속을 당한 때에는 즉시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정하고 있다.


이 헌법적 기본 원칙이 지금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전남편과 의붓 아들을 죽이고 그 인육을 용기에 넣어 끓였다고 하는 희대의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이 사건을 수임한 변호인 5명이 일제히 수임계를 철회하는 사건이 오늘 한국에서 벌어졌다고 한다. 다수의 군중이 변호사들에 대해 온갖 종류의 비난을 퍼부었고 결국 변호사들이 못견디고 수임을 포기하였다는 것인데 이런 야만적인 일이 백주에 일어난 것이다.


아직 재판은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대중들은 경찰과 언론이 경쟁적으로 가르치는 대로 벌써부터 피의자에게 매질을 하고 돌맹이를 던지면서 인민재판을 시작하였다는, 대한민국이 중국만도 못하다는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임계를 헌신짝처럼 내던진 변호사들도 문제다. 변호사도 법조인이다. 대중의 비난이 있다고 변호사의 의무와 과업을 포기한다면 이는 법조인 자격 미달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재판정이라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냉정성을 되찾게 하고 사적 보복의 충동을 억제케 하는 그런 장소다. 변호사들이 해야할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돌맹이가 날아와도 피의자를 위해 한발 한발 전진하도록 명령받은 것이 변호사라는 직업의 소명이다. 그런데 너무도 가볍게 변호인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내던지고 말았다. 대한민국 법치주의 수준이 이렇다. 국가만이 형사 처벌권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국가는 구조적 냉정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법정이야말로 그런 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대중들이 미리부터 돌팔매질을 하는 것이야 또 그렇다 하더라도 변호사라는 전문가 집단조차 그것에 무릎을 꿇고 편승한다는 일은 실로 있어서는 안되는 것일이다. 하기야 박근혜 대통령조차 변호인을 못구했다고 하지 않는가. 한국은 아직 그런 수준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