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향후 한국의 역사를 바꿔 놓을 여러 가지 조언을 한다. 백 원장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낱낱이 기록했고, 외무부에 그 기록을 넘겼다. 

“박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 총리가 대통령의 손을 꼭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이야기하며 한국을 위한 조언을 했다.”

“내가 경제장관 할 때 한국에 두 번 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던데 산이 많으면 경제발전이 어렵다. 고속도로를 깔아야 한다. 독일은 히틀러가 아우토반(고속도로)을 깔았다. 고속도로를 깔면 그 다음엔 자동차가 다녀야 한다. 국민차 폴크스바겐도 히틀러 때 만든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하니 제철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연료도 필요하니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한다. 우리가 돕겠다. 경제고문을 보내 주겠다.”

실제로 박 대통령 귀국 이후 서독은 다섯 명의 경제고문을 한국으로 보낸다. 

독일 초대 경제부 장관(1949∼1963)을 지낸 에르하르트 총리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겐 은인과 같은 존재다. 당시 박 대통령을 만났을 때 서독 2대 총리(1963∼66년)로 재임하고 있던 그는 전쟁의 폐허에서 허덕이던 독일인들에게 ‘모두를 위한 번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독일 경제를 일으켰다. 이날 그는 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도 손을 잡아라”는 파격적인 조언도 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16번을 싸웠다. 독일 사람들은 지금도 프랑스에 한이 맺혀 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우리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 악수했다. 한국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백 원장은 “박 대통령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화난 표정으로 ‘우리는 일본과 싸운 일이 없다. 매일 맞기만 했다’고 말하자 에르하르트 총리는 ‘지도자는 미래를 봐야 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에르하르트 총리의 말은 결국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된 셈이다. 

이날 에르하르트 총리는 박 대통령의 손을 마주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담 후 담보가 필요 없는 2억5000만 마르크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