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사실을 말할 뿐, 없는 사실을 날조하거나 있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님.


우선,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에 시위대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를 당시 기록을 통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국방부, 광주사태의 실상(’85.7) 36~68쪽에 나오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사건들이다.


- 5.20 밤10시경 콘티빵 특약점에 불을 지른다고 위협하여 100만원 상당 빵 강탈
- 5.21. 09시경 풍광식품 난입 몽둥이 휘두르며 빵 5천개 탈취
        10시경 금성센타 난입 경상도 사람 운영한다며 전자제품 방화
        13시경 양림동 등대주점에 시위청년 침입하여 현금 1백만원 강탈
        시민 협박 오늘 밤 쌀과 돈을 가지고 나오라며 서명을 받음
        비폭력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폭도 난동 만류하다 폭행 당함
- 5.22 황금동 박순휴 외과병원 폭도 2명 침입, 현금 귀금속 등 2백만원 강탈
        양동 우진아파트 침입 폭도 침구 강탈
        삼익아파트 주민 등 식사 제공 강요
        주유소에 들어가 탈취 차량에 강제 급유
        학동 지원동 일대 폭도들이 집을 비우라고 총기 위협 내쫒음
        목포 보해양조 현금 35만원, 행남사 1백만원 아세아전자 시계 10개 강취
        상점마다 음료수 빵 요구, 거절하면 쏘아버리겠다고 총구 들이댐
        가가호호 방문하여 사망자들 장례비 명목 금품 요구
- 5.25 11시경 황금동 금은방 병원 침입, 공포 위협 후 3백만원 강취
       오후 3시20분 광천동 양곡수송차량 1대 탈취
- 5.26 새벽 학운동 거주 최득춘 일가족 3명 살해
       황금동 박비뇨기과병원 폭도 3명 침입 공포 위협 후 3백만원 강취
       동명동 3가구에 무장 폭도 침입 재물 강취

국가안전기획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85.6) 62~89쪽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 5. 21.
 ․17:00∼20:00 한국낙농 급습, 매일우유 9백상자, 요구르트 1백만원 상당
 ․20:00∼23:00 삼립식품 식빵 676상자, 영일식품 식빵 86,592개
- 5. 22.
 ․08:45∼09:35 광산 서창, 아파트 침입 군인가족 색출
 ․10:00∼11:45 광주 일원, 민가 및 방위산업체 기습 약탈
 ․15:00∼20:00 도내 일원, 무장 폭도 도내 주민 살상
               해남, 식칼소지 폭도 10여명 계엄분소장 공관 침입 기도타 검거
               지산동, 광주 법원 앞 민가 침입 약탈(쌀 생필품 및 현금)
 ․ 20:00∼22:00 풍향동, 민가 약탈 강도 자행
- 5. 23.
 ․00:30∼05:00 함평, 문장고개에서 행인 대상 금품 탈취(계엄군 1명 검거)
               목포 응해, 민가침입 강도 약탈 자행(현금 40만원, 다이아 1개 등)
 ․06:00∼12:00 도청 앞, 무장폭도 시체 59구 전시 후 호별방문 장례비 강제징수
- 5. 25.
 ․08:00∼14:00 도청, 무장폭도 강경파간 내분 발생 총격전(민간인 2명 사망)
               황금동, 무장폭도 금은방 및 병원 침입 현금 3백만원 탈취
 ․14:00∼22:30 지원동, 무장폭도 민가침입 1가구 3명 사살
- 5. 26.
․07:55∼08:10 학운동, 무장폭도 민가침입 최득춘 등 일가족 3명 사살
              학운동, 무장폭도 의상실 침입 및 가족 3명 사살
              황금동, 폭도3명 청자여관 영향약국 해동식당 침입
              총기 난사 후 금품 약탈

그 외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위대들의 만행들은 여러 증언들이 있다.


19일의 폭력시위에 사용된 무기들에는 쇠 파이프 외에도 각목, 철근 토막, 쇠갈퀴, 낫, 쇠스랑 등이 있었으며, 오후 7시에는 곡갱이와 삽과 몽둥이로 무장한 폭력시위대도 등장하여 백 명 단위로 여러 지역으로 분산되어 통금 9시가 넘도록 난동을 벌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72). 


20일 광주 외곽지역에서는 폭력시위대가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징발하여 화염병을 제작하여 학동, 산수동, 계림동, 양동 등 대부분의 파출서를 파괴하고 방화하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78).


광주고속터미널 부근에서는 근방의 자동차 정비공들을 중심으로 1천여 명의 시위대가 경상남도 번호를 달고 있던 8톤 트럭 1대를 불질러버렸다. 트럭에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시민들은 경상도 출신의 공수대원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소문에 치를 떨고 있는 터였다. 시민들은 운전수도 경상도 사람이니까 죽여버리자고 흥분했지만 누군가가 이를 말렸다.“그 운전수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전두환이가 죽일 놈이고 공수부대가 천인공노할 놈들이지.”그리하여 운전기사는 풀어주었다. 시민들은 트럭 위에서 플라스틱 제품을 끌어내렸다. 트럭 위에 있던 제품들(바케스, 세수대야 등등)이 우수수 땅에 쏟아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쏟아진 플라스틱 제품을 주워가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 시민 한 사람이 플라스틱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2명이 불에 타기 시작한 트럭을 몰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을 지키는 공수부대 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를 바라보던 시민들은 고압선이 탄다고 건물 뒤로 숨고 있었다. (이재의, 1988)


같은 시각 광주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에서는 근방의 자동차 정비공들을 중심으로 1천여 명의 시위대가 경상남도 넘버를 달고 있던 8톤 트럭 1대를 불질러 버렸다. 트럭에는 각종 플라스틱 제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군중들은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민을 학살하러 왔다는 소문에 치를 떨고 있던 터였다. 군중들은 운전수도 경상도 사람이니까 죽여버리자고 흥분했지만 누군가가 만류했다. (황석영, 1985, 75)


부마사태 때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사태가 광주사태 때는 일어났다. 단적인 예가“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잡으러 왔다”는 루머였다. 이 같은 루머가 뿌리 깊은 지역감정을 부채질하여 경상도 넘버를 단 트럭과 경상도 출신 재벌인 금성사 판매대리점을 습격하는 사태로 나타났다. (김영택, 1987, 381-382)



(폭도들에게 약탈당하는 금성사 사진)


17번 버스를 타고 무등경기장쯤 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 사람들 틈에 끼었다. 가만히 보니 고가도로 부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막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태워라”“죽여라”하는 함성이 들려서 그쪽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경북 번호를 붙인 트럭이, 유리창이 산산조각 난 상태로 정차해 있었다. 1대의 운전사는 도망을 쳐버렸고, 다른 차의 운전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린다는 공수부대의 얘기에 대한 보복이었다. 누군가가 정차해 있는 트럭의 연료통에서 연료를 빼내 트럭 주위에 뿌리고 있었고, 일부에서는 운전사에게도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성화였는데, 이때 4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설사 차를 불태우더라도 운전사는 똑같은 국민인데 그러는 게 아니라고 점잖게 타이르자 모두들 수그러지며 운전사를 돌려보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트럭에 불을 붙이자 트럭이 불타기 시작했다. 이미 어둠이 짙게 드리운 시각이라 트럭이 불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정기, 1989)


작은 형과 나는 화염병을 들고 불을 붙여 방송국 2층 유리창 안으로 던졌다. 불이 활활 타오르는가 싶더니 금방 꺼져버렸다. 안에서 소화기로 불을 끈 것이다. 이를 본 형수님께서 녹두서점으로 달려가 화염병을 쇼핑백 가득 담아왔다. 작은 형과 나는 계속 화염병에 불을 붙여 광주MBC 방송국 안으로 던졌다. 여동생 현주와 형수님의 친동생 사돈까지 가세하여 화염병을 날라 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공수부대의 트럭은 화염병 하나 가지고도 잘 꼬실랐는데, 광주MBC 방송국 안의 불길은 불이 붙는 즉시 바로 꺼져버렸다. 사람들이 앞 다투어 돌과 화염병을 던져대는 통에 잠시 뒤로 빠져 쉬고 있는데 드디어 불길이 솟아올랐다 (김상집 2007).


도청 부근에서 세수를 하고 시위군중들과 함께 금남로에 있는 중앙극장 앞까지 갔다. 거기에서 다시 올바른 보도를 하지 않는 방송국을 불태우러 가자고 해서 스크럼을 짜고 시위대열에 화염병을 숨겨서 MBC방송국 앞에까지 왔다. 그곳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화염병 2개를 받아서 문화방송국 건물에다 던졌다. 시위대와 함께 있다가 밤 11시경에 같이 데모하고 다녔던 시민의 집에 가서 친구와 함께 잤다 (박내풍 1988).


계엄사 상황일지 

1980년 5월 20일  21시 13분:시위대 MBC 침투,방화. 기물파손 

                             22시:MBC 연소중 

                             0시 15분:MBC 전체가 불타고 있으며 옥상에서 시민 1명 구조 요청 중 


전투교육사령부 전투상보 


                             20시 15분:MBC 화염병 투척 및 방화 

                             20시 25분:소방차 4대 탈취 

                             20시 33분:MBC를 포위하므로 경계중인 제 31사단 병력 고립 

                             21시:MBC. KBS TV, MBC 라디오 방송중단



(폭도들에 의해 불탄 광주 MBC 사옥)




(폭도들에 의해 불탄 KBS 사옥)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연구에서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너무 신성시 하는 때문에 광주민주화운동의 성격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 나오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 폭동이라는 거냐?' 라고 짱돌을 던지기 전에, 위의 글들을 다시 보시라. 없었던 일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있던 일을 말하는 것이 왜 욕을 먹어야 하는가?


광주민주화운동 안에도 분명히 폭동적 성격은 존재했다. 경상도 번호판을 단 트럭을 습격하고, 전자제품 대리점을 습격하고, 빵공장을 습격하고, 방송국을 습격하고,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의 행위들 말이다.


'나쁜 계엄군이 선량한 시민들을 학살했다' 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벗어나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거대한 사건의 여러가지 측면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