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마지막 발키리

***





쿵쿵쿵.


시구르드는 제 심장 소리가 마치 북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발키리가 되기 이전, 용감한 전사들과 함께 발할라를 부르짖으며 나아갈 때 들었던 전장의 북소리.


대지를 흔드는 북소리에 맞춰 용감한 전사들이 발을 내딛으면 소리는 투지와 함께 점점 커지고, 적들의 얼굴에는 한없이 깊은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또 개중 소수의 전사들은 산 채로 오딘의 간택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는데, 이들은 죽음도, 피로도, 공포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흉포하면서도 강맹한 분노의 대전사(berserkr; 베르세르크)가 된다.




시구르드는 지금 자신이 바로 그러한 베르세르크 중 한 사람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벌써 2시진이 가까이 치열한 접전을 이어가고 있음에도 되려 몸은 가벼워지고 머리는 맑아지며 기분마저 점점 더 상쾌해지고 있었던 탓이다.



물론, 오딘과 신들을 저버린 자신이 바로 그러한 신들의 간택을 받아 대전사가 된다는 것부터가 영 우스운 이야기였으니, 아마도 실상은 아까부터 제 뒤에서 무언가 꼼지락 거리고 있는 길동무의 공일 가능성이 컸다.


평소에는 영 생각을 종잡을 수 없고 취향도 괴팍한 데다가 자꾸 자기를 끌어안으려 드는 못된 손버릇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주술사로서의 실력 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영특한 소녀였으니까.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시구르드는 문득 저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기이한 길동무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대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될 만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시구르드의 정신은 조금씩 과거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





시구르드와 사희의 첫 만남은 반년 전 어느 허름한 여각에서였다.




“뭐냐?”



처음 사희와 마주했던 때의 시구르드는 마치 칼집 없는 검과 같은 소녀였었다.


가꾸지 않아 꾀죄죄한 겉모습도 겉모습이었지만은, 그 이상으로 위태로우면서도 모난 정신 상태가 더더욱 날선 검을 연상시켰다.





“할 말이 없다면 꺼지거라. 너 같은 것과 노닥거릴 시간 따위는 없으니까.”




낯선 땅에서 낯선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 것도 모자라, 이 동방에서 처음으로 호의를 베푼 이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지독한 악의를 돌려받게 되었다.

명백히 피해자는 자신임에도 연줄이 없다는 이유로 거진 3년 가까이 관의 악의적인 괴롭힘을 당하기까지 했다.


정신이 몸을 따라가는 탓인지는 모르겠으나ㅡ그 3년간의 지독한 경험은 한때 북구를 호령하던 위대한 바이킹의 정신을 망가뜨릴 만큼 충분히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시구르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치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의도적으로 거칠고 공격적인 화법을 구사했었다. 

애초에 사람과 어울리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고, 간혹 반발하는 이들이 나오면 그들을 정면에서 깨뜨림으로써 한층 더 공포의 녹각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시구르드의 기대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하얀 짐승'이라 부르며 두려워 피하려고 들었으니,

지금까지의 전적만 두고 본다면 꽤나 효과적인 자기 방어 전략이라고도 할 만 했다.




허나, 자고로 녹각이란 땅을 기는 자들을 막기 위한 도구일 진저.

하늘을 날 줄 아는 그녀의 길동무는 고작 녹각 따위로 막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흐음… 네가 그 ‘생긴 건 영락없는 애인데 뿜어내는 기운이 영 괴이쩍다는 백발의 아이'로구나. 과연 직접 대면하니 흘러 나오는 사기도 사기지만, 귀엽기도 보통 귀여운 게 아니네. 아마 고생 꽤나 했겠어.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 마렴. 이 언니가 너를 도와줄 테니까. 잠깐 따끔하기만 하면ㅡ우웁…!”


“듣자하니 별 해괴한 소리가 많구나. 그 요사한 혓바닥을 잘라버리기 전 얌전히 꺼지거라.”



뻔뻔스럽게 제게 다가와 어깨 동무를 하려던 소녀를 방금 까지 먹고 있던 빵으로 제압한 시구르드는 늘 그래왔듯 거친 언사를 내뱉었다.

난데없는 언어적, 신체적 폭력에 노출된 이들은 대개 그가 예상하던 반응을 보이며 악명을 드높일 재료가 되주었으니까.



허나, 제압된 소녀가 보여준 반응은 그녀가 늘 봐왔던 두 반응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우물우물… 오, 과연! 이것이, 꿀꺽, 냉혹한 짐승계 미소녀의 맛.”



말문을 틀어막기 위해 제가 쑤셔 넣은 빵을 맛있게 먹는 소녀를 보며, 시구르드는 알 수 없는 오한을 느꼈다.

그래서 저도 모르는 새 붙잡은 소녀의 팔을 놓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그리고 그 괴상한 소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발짝 더 그녀를 향해 제 몸을 들이밀었다.



“먹을 것을 나누어준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호의의 표시라고들 하지. 어때? 나랑 좀 이야기 해볼 생각이 들었어?”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어린 것이 발랑 까져서는 못하는 짓이ㅡ!”





시구르드라는 이름의 마검이 저를 보듬어 줄 칼집을 찾게 되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둘 사이의 만남이 이토록 어처구니 없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시구르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길동무를 무척이나 신뢰했다.


세상 모든 것에 가시를 세우고 두려워 숨으려 하던 자신에게 다시금 세상과 맞설 용기를 주고, 더 나아가 자신과 함께 감히 신들과 대적해주기로 약속한 이를 믿지 않는다면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시구르드는 ‘불멸의 육신'이라는 저승사자의 특성 탓에 자신의 도끼로 상대를 제압할 수 없음을 깨달았음에도 절망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구르드는 ‘전투의 고양'이라는 발키리의 특성 탓에 당초 계획과 달리 상대를 그저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는 상황을 호전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음에도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묵묵히 방패의 역할을 자임했다.

흑의의 여인이 내지르는 무수한 공격으로부터 굳건히 제 뒤의 길동무를 지켜낼 뿐이었다.


그녀의 길동무라면, 마치 자신을 어둠 속에서 구해주었을 때처럼 반드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시구르드의 그런 기대는 어김없이 충족되었다.



-아저씨! 딱 3분만 있다가 그 여자를 제 쪽으로 유도해주세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길동무의 고운 목소리에, 시구르드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머리가 명령을 내렸다면 이제 팔다리는 그것을 받들면 될 뿐이다.



그래서 시구르드는 몇 번이고 반복된 무의미한 설득을 하려는 것처럼 중앙으로 달려가 상대와 무기를 맞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무기가 얽히며 재차 무대 사이 막간의 막이 올랐을 때.



“아무래도, 자네 말이 맞는 거 같구만 그래.”


“뭐?”


“뭐든 직접 확인해 보아야 한다는 것.”



영문 모를 말로 상대의 의식을 흐트러뜨린 시구르드는 잽싸게 다리를 뻗어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전투의 열기에 취한 것에 더해, 지금까지의 무기를 맞댄 뒤 짧은 대화를 나누는 패턴에 익숙해진 흑의의 여인은 그런 시구르드의 갑작스러운 변화구에 제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상대의 몸이 지면 위로 떠오르자 시구르드는 상대의 검과 얽힌 도끼를 내던지듯 휘둘렀다.


흑의의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속절없이 사희가 준비해 둔 데 저승사자용 결계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 뿐이었다.




“그 염라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좀 있다 자세히 듣도록 하지.”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여인의 마지막으로 본 풍경은, 그렇게 말한 뒤 멀어지는 상처 투성이가 된 흰토끼의 모습이었다.




***




“후우, 지치는 구나. 이토록 전력을 다해 붙어본 것이 또 얼마만인지…. 아, 자네도 수고했네. 안 그래도 베어도 베어도 몇 번이고 몸을 재생해내는 저놈을 어떻게 당해낼까 고민이 많았는데 덕분에 잘 해결될 수 있었어.”


긴장이 풀려 대충 바닥에 주저앉은 시구르드는 주춤주춤 저를 향해 다가오는 길동무를 향해 슬며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 자신의 말 마따나 이번 전투에서 획기적인 역전 포인트를 만들어준 눈앞의 소녀는 충분히 감사를 받아 마땅했다.


평소에는 제 변태 같은 취향 탓이 자꾸만 들러 붙어와 여간 고욕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공과 사는 분명히 하는 것이 시구르드라는 사람의 변하지 않는 본성이었다.



헌데 이게 왠 걸, 칭찬을 들은 소녀의 그 고운 눈매에는 되려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게 아니겠는가?



“으, 으응? 자네 우는가? 내가 그래도 나름 칭찬에 인색한 편은 아니ㅡ우왁!”


“흐아앙! 미, 미안해요. 내가, 내가 좀만 더 유능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아저씨가 혼자 고생할 필요는 없었는데. 훌쩍, 이렇게, 이렇게 만신창이가 될 정도로 내몰릴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ㅡ”


“그만.”


대뜸 눈물을 흘리며 안겨든 소녀에 처음에는 어쩔 줄 몰라하던 시구르드는 이내 허공을 배회하던 손을 내려 부드럽게 소녀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헤프구나. 그 고운 얼굴 다 망가지게. 그리고 이 정도 상처는 나 같은 발키리들 입장에서 한숨 푹 자고나면 나을 상처이니 걱정할 것도 없단다. 어디 뭐 잘리거나 하기라도 했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겠다만은 네 기지 덕에 아무튼 그 전에 해결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자네는 좀 더 당당해지게나.”



그렇게 부족한 말주변으로나마 훌쩍이는 소녀를 위로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얼추 소녀가 진정한듯 하자 시구르드는 아까부터 궁금해하던 부분에 대해서 슬그머니 말문을 틀었다.



“ㅡ그보다 내 궁금한 것이 하나 있구나. 분명 내 예전에 듣기로는 온갖 괴이, 요괴, 망령과 맞서 싸우는 저승사자는 주술 같은 것에 무척이나 높은 내성을 지녀 만나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 했었다. 헌데, 이번에는 용케 그 저승사자를 그것도 한때는 발키리이기까지 했던 녀석을 제압하는데 성공했는데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킁, 그건, 훌쩍. 흠흠. 답지 않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요. 아무튼, 어떻게 저승사자를 제압했냐고 물으시면 그저 운이 좋았다고 밖에 할 수 없겠네요. 아저씨도, 이곳의 주술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관료제적 위계질서에 기반해서 돌아간다는 이야기 저한테 들어본 적 있으셨죠?”



지금까지의 추태가 부끄럽다는 듯, 손바닥으로 연신 파닥파닥 얼굴을 향해 부채칠을 하며 소녀는 제가 저승사자를 제압한 방법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이곳 동방의 주술이란 더 강한 존재의 권위를 빌림으로써 행위를 강제함으로써 이루어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가령 ‘급급여율령’ 같은 주문을 보면 뭇 귀신들을 지배하는 강력한 율령에 근거해 빠른 대처를 요구하는 게 주요 원리죠. 저는 좀 상황이 다르긴 한데, 무당들이 제 몸주를 불러다 내림굿을 하거나 부적을 사용해 잡귀를 쫓는 것 역시 이와 같은 원리고요.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승사자들은 그 직업적 특성상 어지간한 귀신들은 감히 이빨도 박히지 않을 만큼 강대한 존재가 내린 율령에 강하게 속박되어 있어요. 그래서 한 번 임무를 받고 내려오면 평범한 주술은 통하지도 않고 칼이나 도끼 따위에도 쉽사리 상처입지 않지요.


그런데, 이는 바꾸어 말하자면 바로 그 율령에 편승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저승사자를 제뜻대로 부릴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물론 대체로 저승사자들에게 율령을 내리는 존재가 염라대왕을 필두로 한 저승의 시왕임을 생각해보면, 고작 명령 한 줄 끼어넣는 것조차 평소 같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습니다만ㅡ 이분은 저승사자인 동시에 발키리이기도 하잖아요?”



“과연, 그래서 찔러볼 구석이 있었다는 거군.”


“그렇죠. 게다가 운도 엄청나게 좋았던게 저희가 계에게 받은 명령서와 이 분이 염라대왕께 받은 명령의 내용이 공교롭게도 같은 대상을 지목하고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저희를 협력해야만 하는 동료로 변질시킨 율령이 제때 작동할 수 있었던 거에요.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결계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찢고 튀어나왔을 걸요. 


저 결계는 저희를 동료로 받아들이고 적대하지 않을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사희는 뒤늦게 제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가 떠올라, 부끄러움에 슬그머니 안겨있던 몸을 뺐다.

그러나, 즉석에서 저승의 권위에 도전하는 율령을 짠 데다가 긴장이 풀리기까지 한 탓인지 그녀의 몸은 의도와는 반대로 시구르드의 품으로 쏙 들어갔다.



“어, 어라?”


“무어, 피곤할 만도 하지. 좀 쉬게나. 어차피 저 친구 머리 식을 때까지 시간이 꽤 필요할 듯 하니 때가 되면 깨워 주겠네.” 


그렇게 말한 시구르드는 제 납작한 가슴에 부딪힌 소녀의 얼굴을 들어 그나마 살집이 있는 편인 허벅지 위로 옮겼다.

그리고는 마치 훈련 후 지쳐 잠든 제 자식에게 그러하듯, 어색하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녀가 잠에서 깨어나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1시간이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