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란 걸 쓰는 사람은 늘 하루를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신선하게 봐야 한다. 가령 내 삶이 계속 똑같이 이어가고 변함이 없다 해도 말이다.

물을 엎질른 것, 길에 가다 넘어진 것, 크게 혼을 난 것도 말이다. 늘 우리 생활에 흔히 볼 수 있는 상황들이지만, 글은 이것들을 하나의 요소로 자리잡게 한다. 글이란 것은 곧 우리의 일상을 나타나는 마음일 것이다.

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글을 써 본적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글을 쓰는데 정해진 형식은 없다. 글이 두 자가 됬든, 한 자가 됬든, 그건 글이 되는 것이다. 마음 속에 되세긴 욕 한 뭉텅이나, 야한 생각을 하든, 그건 전부 마음 속에 새겨진 글이 된다.

난 사람들이 한 번쯤은 글이라는 취미를 잡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가끔식 보면 글을 쓰는 것에 어려움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글이란 건 결코 어려운게 아니다. 

우리는 항상 말하고, 또 세상을 보며 펼친다. 당신의 일상에서 나온 경험도 곧 글이 된다. 시를 쓰고 그 쓰여진 시를 보며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어쩌면 그 시는 남들의 시의 형식이나 내면을 작게나마 흉내낸 결과물일지 모른다.

글이라 함은 마음 속에 우려나와야 한다. 그것이 진할 수록 더 좋다. 마음 속에 있는 요소를 정제하지 않고 다 꺼내와, 이것들로 글을 쓰고 내게 보여준다면, 그리고 그 글이 도통 보기도 힘들고 뭔 소린지도 모를 글이라 해도, 난 그럼에도 인상깊게 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상의 시들은 대부분이 난해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상의 시들은 자신의 마음 전부를 짧은 글에 쓰여내는데 최선을 기여한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상의 시들이 어려워 보여도 그 어려움에 매력이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쓴 시들 중에서도 내 마음 전부를 쓴 시는 단 하나도 없다. 전부 어느 시들의 형식을 보고 그 형식을 조금이나마 따라한 것들 뿐이다. 되려 난 난해함과 새로움, 일상에서도 그 새로운 태양을 보며 반복되는 일상에 새로움을 느끼는 그 어려운 새로움이 가장 글의 좋은 요소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마음의 전부를 발하여 글을 쓰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리고 마음의 전부를 들고와도 그 마음만을 사용해야 할까? 시들을 보면 전부 감정이 많이도 포함된 글들이 많았다. 난 그 시들을 계속 보고 있다. 정말 많이도 보고 있다. 

요즈음의 시들은 감정을 일직선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대부분이 어둡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점점 세상을 더 깊숙히 알아감과 동시에, 우리의 감정은 더욱 예민해진다. 예민은 긍정을 거의 가져오지 못하는 듯 하다.

감정을 이용한 글들이나 시들은 다양해져야 한다.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게 아니라, 이용해야 한다. 감정을 이용해 바위를 만들고 풀을 만들어야 하는거다. 그래서 모더니즘이 탄생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의 전부가 감정이고 곧 그 감정을 이용해 글을 쓴다면 우리는 그 뭉친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게 아니라, 우리는 조각을 해야하는 것이다. 감정 뭉치를 조물딱 거리거나, 아님 짜르고 말아서 하나의 조각품을 만들어야 한다.

난 그것을 가장 훌륭하게 해낸 시인을 김수영이라 생각한다. 그의 젊은 나날은 예술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의 이후의 삶들은 대부분 암울하고 어두웠다. 그가 세상을 한탄하며 시들을 썼을 지도 모르지만, 난 그의 암울함을 이용한 시를 보자면 암울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는 암울함을 고요함과 미묘함으로 만든다. 그가 4.19에 들어서 자유를 노래할 때 쓴 시들, ‘푸른 하늘을’ ’구름의 파수병‘… 등 꽤나 세상을 보며 억압되어진 사방을 보면서도 그는 암울함을 전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특히 ’푸른 하늘을‘은 내게는 고요한 강인함을 준다. 죽어도 꺾이지 않는 생명의 독백 처럼 들렸다. 시의 구절중에 하나인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이것은 암울한 화자의 좌절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김수영의 사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도 할 수 있다.

김수영은 시를 쓸 때, 혹은 글을 쓸 때의 시작은 심장으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몸으로 하는 것이라 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고 말이다. 인간이 모든것에 필요한 것은 바로 강인함이다. 암울함 마저 이 강인함으로 나가 바꿔야 하는 힘 말이다.

우울을 나약함으로만 인식하지 마라, 이것은 곧 다시 새로운 강인함을 피어오르게 만드는 준비일 뿐이다. 우리는 글을 쓸 때든 말을 할 때는 강인함을 보여야 한다. 크든 작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는 마음을 강인한 몸과 동일체 시켜야 할 것이다.

그 강인함으로 마음을 조각하라, 정제도 되지 않은 그 마음을 우리 손으로 조각해야 할 것이다.


일상이 우울하고 또 지루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이것을 완전하게 받아드리면 안된다. 작은 행복이라도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보기만 해도 작은 미소가 피어오르는 상황들이 있다. 큰 우울이 그것을 인식 못하게 할 뿐이다.

엄마와 아빠가 싸우고 이내 아빠가 회사에 갈 때도, 난 작은 웃음이 나왔다. 이것을 하나의 작은 시트콤이라 생각하니 약간의 웃음이 나온 것이다. 또 내가 항상 바보같은 짓을 할 때에도 이것들을 개그로 돌린다면 사람들 입장에서는 꽤나 웃긴 상황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일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은 정신이고, 또 이 정신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몸이다. 좀 과격하게 말하자면 내가 암울하고 또 이 암울함을 시로 쓴다고 하면 그 시는 그저 감정팔이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몸은 나약함에 불과하다.

그래서 난 시를 거의 쓰지 못한 것 같다. 이 사이트에서 가장 좋아요를 많이 받은 내 시 중에는 소국이 있는데, 사실 이 소국 보다는 ’물‘이라는 시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소국은 내 감정을 거의 조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시는 김수영의 시중 하나를 패러디로 쓴 것 뿐이다.

우리는 모조품을 만들지 말고, 항상 새로움을 찾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고 이제 서서히 새로움은 사라져 갈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 패러디라 함도 나중에는 하나의 새로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아직이다.


정리하면, 글은 마음의 전부를 쓸 수록 좋다. 그리고 그 마음을 몸으로 조각하고 형태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자. 무엇을 더 추가해도 괜찮고, 아님 정신을 넓혀 감정을 다른 의미로 바꿔도 좋다. 앞으로 시의 세계가 감정만 일직선인 곳이 아닌, 가지각색의 다양하고 감미롭고, 새롭고, 알 수 없는 글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마지막은 이 글을 충족시킨 시 김수영의 ’눈‘으로 끝낸다.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을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