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역키잡 보고 싶은데 왜 없음?

그래서 내가 써봄
1       2
? 하나씩 늘리면서 화수 표기할려 했는데 2개 한것도 이미 뇌절같아서 안하겟슮,,,


  "천천히 먹어라."

    

  아침, 혹시라도 술이 없는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술을 병째로 샀다. 마족은 죽음의 위기를 겪은 탓인지 인간의 언어를 깨우쳤다. 이례적인 속도긴 하지만 나쁘진 않다.

  

  주점에 들러 내 그리웠던 사랑을 되찾은 뒤엔 내 말투를 따라 하는 마족의 언어습관을 교정하고 잡일을 하나 받으러 갔다. 술도 못 마셨건만, 잘도 일찍 일어났다. 밤사이에 그 짓거리를 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해서 우려하고 있던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섭취해도 죽을 일은 없어."

  

  인간은 식사를 하지 않으면 죽는다.

  

  솔직히 말해, 배고팠다.

  

  거진 이틀을 굶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보수가 적은 것쯤은 일상이고, 따라서 이렇게 며칠 굶는 것 또한 예삿일이다. 나는 굶더라도 술을 포기할 순 없었기에.

  

  마족의 입장도 비슷했다. 언어를 자력으로 깨우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어제 제 몸 크기의 몇 배나 되는 괴물을 흡수한 에너지까지 쓴 건 지 불과 하루 사이에 어제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거지 같다. 상황만 그런 게 아니라 꼴이, 특히나 그러했다.

  

  적어도 허기는 채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곧장 성문을 나서 목적지로 향했다. 그렇게 일터로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샛길로 빠졌다.

  

  애초에 잡일의 보수라고 한들 술 한잔을 아부 끝에 얻어낼 수 있는 정도. 그마저도 기분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배를 어떻게 채워야 하는가. 나는 그 방법을 알고 있다.

    

  "대신 서두르다가 마력이 역류해서 불구가 될 일은 있지. 네 몸이 어떻게 되건 고칠 생각은 없다. 난 목숨을 연명시켜준다고만 했으니."

  

  그 방법은 신속하게, 그리고 덜미를 잡힐 일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과수원에서 서리를 시작했다.

  

  오다가 처리한 작은 짐승만 한 괴물 시체에서 머리를 뺀 나머지를 마족에게 던져주고, 나무를 타올라 과일을 술에 곁들여 먹었다. 외팔로 나무를 타는 일은 익숙해질지언정 여전히 고행이었다.

  

  물론 그에 걸맞게 수확의 결실과 술은 지극히 달았다. 아득히 달다. 아득히. 주인이 다니는 길로 설치해 둔 조악한 함정과 연결된 실이 움직인 것만 아니었으면, 이 흥취에 좀 더 취하는 것도 좋았을 테지.

  

  "…슬슬 오는 모양이군. 빨리 먹어 치워라."

  

  이쪽에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일찌감치 죽은 괴물의 사체로부터 검은 연기를 들이마시던 마족은, 몇분 간격으로 달라진 요구에 나를 향해 의혹을 보였다.

  

  표정이래 봐야 눈을 살짝 찌푸린 정도가 전부였으나, 표정이란 게 얼굴이 전부는 아닌 법. 나는 두발 달린 생물의 표정이라면 얼굴 없이도 대략 때려 맞추는 재주를 이루어냈다.

  

  연이어 들려온 짤랑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자 희끄무레한 인영이 시야 끝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번엔 경비병까지 대동한 모양이다.

  

  확실히 요즘 너무 자주 서리해 대긴 했지. 그래도 좀 섭섭하긴 하다. 이것도 인연이건만.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술병에 마개를 채우고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내 경고를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로부터 삶을 지키기엔 경험을 비롯한 모든 게 미숙하기 짝이 없는 어린 마족을 위하여.

  

  습기를 머금은, 그러나 젖지 않는 바람결을 느끼며, 나무에서 내려와 어린 마족이 두르고 있는 후드를 정리해 주었다. 마족은 경계하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봤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몇 줄기 햇빛을 그대로 받아 눈이 부실 지경인 새하얀 머리칼이 후드에 감춰진 걸 확인하고, 나는 마족의 손에 들려있던 괴물의 사체를 빼앗아 땅에 내다 버렸다. 어린 마족의 눈이 크게 뜨였다.

  

  "빨리 먹고 튀란 거다."

  

  과수원 주인으로부터 도망칠 준비를 하는 나와 땅에 내팽개쳐진 괴물의 사체를 번갈아 바라보던, 당황한 마족의 목덜미를 잡아채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남자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시간을 줬음에도 전부 흡수해 내지 못한 건 온전히 본인 책임이다. 그러니 아직 다 먹지 못했다고 뭐라 하는 것에 내 과실은 없다. 정 부족하면 알아서 잡아먹겠지.

  

  나는 마침 괴물 토벌이었던 잡일을 수고스럽지 않게 마칠 수 있음을 기뻐함과 동시에 품속의 머리를 소중히 품에 안고 도시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당신을 죽이겠어. 내가 인간에게 죽는 건 당신 때문일 거야."

  

  "음, 그래. 힘내봐라."

  

  눈에 띄지 않으려 보수를 막 받은 잡일꾼에게 따라붙는 동냥꾼 흉내를 시킨 어린 마족에게 건성으로 대꾸하며, 나는 눈가를 찌푸린 채 타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목이 타 술을 몇 모금 마셨다. 약간 매캐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우다가 불현듯 달콤한 꿀과 비슷한 맛이 혀끝을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그 맛을 음미하며 술을 목구멍으로 넘기자, 산뜻하고 상큼한 잔향이 입안에 남았다.

  

  도수가 높은 술 특유의 아릿하거나 화한 느낌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은.

  

  지옥으로 맛없었다.

  

  맛이야 있었지만, 도수가 부족하다. 내 맛있는 술의 기준은 열에 열은 얼마나 독한가, 그뿐. 나머지 기준은 아직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즉, 기껏 은화를 내밀며 맛있는 술을 마시려 했더니 정말로 맛있는 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어쩐지 정신이 이상할 정도로 멀쩡하더니. 

  

  그래, 결국 이번에도 등신 같은 내 탓인걸 누굴 탓하겠는가.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자 술이 더욱 그리워졌다. 

  

  오늘도 취하지 않은 채로 이대로 잤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은 늦은 점심이었으니 저녁이 오기 전에 새로운 술을 받아와야 한다. 독한 술이 아닌 다른 것을 안고 잘, 혹시 모를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려면.

  

  내가 어떤 말을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은 벌써 열리고 있었다. 이는 필히 내 입도 진짜배기 술을 원하고 있는 것이리라.

  

  "술집에 들르지. 밖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다."

  

  "도망치겠어."

  

  "행운을 빌어주마."

  

  골목이라 부르기에도 어폐가 있는 건물더미 몇 개를 거쳐 넓은 길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위한 단초를 없애는 데에는 인적이 드문 곳이 제격인 법이니.

  

  나는 조용히 뒤따라오던 어린 마족에게 그늘에 숨어있으라 말한 뒤 그림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궁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주점 앞은 항상 비교적 조용하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인지라 역설적으로 노숙자들이 없기도 하고, 누군가 거하게 취해서 부리는 술주정에 휘말리기 싫어 암묵적으로 만들어진 관습 탓이었다.

  

  하루 중 가장 뜨거운 지금 같은 시간엔, 저 높이 솟은 성에 의해 이곳에도 그림자가 진다. 저녁만 되면 썰물 빠지듯 사라지는 구걸꾼, 소리 없는 비명, 부정적인 감정이 판치는 이곳은 성의 그림자다. 가장 믿을만한 주점이기도 했으며.

  

  "진상 받아."

  

  내 삶의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주점에 들어섰다.

  

  

  

  주인장의 취향에 철저히 맞춰진 주점은 어두운 빛깔의 나무 바닥과 밝고 은은한 조명의 부조화로 대표되었다.

  

  거기에 모양도 재질도 제각각인 탁자와 아무렇게나 정돈된 의자로 불협화음을 끼얹고, 약간 그을린 흰 벽으로 엉망진창 마무리 내린다.

  

  나는 그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 있을 기다란 탁자 겸 계산대로 걸어갔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탁자 너머에는 술병과 잔들이 수납장에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나는 마시던 술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쿵―

  

  계산대 밑에서 아늑하게 드러누워 자고 있다가, 부스스한 머리로 잠에서 깨어난 흑발의 여인은 찰랑이는 술병과 내 얼굴을 한 번씩 훑어보더니 다시 드러누우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단순 변심에 의한 환불은 불가능합니다. 절반은 넘게 마셔놓고 뻔뻔하게도 불만을 제기하시는군요, 혹시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도 불만을 제기하셨나요?"

  

  "부모님 쪽이 먼저 불만을 표하시던데. 환불할 생각은 없으니까 다른 술 줘."

  

  "대낮에 잘도 찾아와놓고 요구사항까지 있네. 무슨 손님인지 원."

  

  "진상 손님이지. 태평하게 자고 있는 걸 보니 돈 걱정은 안 되나 봐."

  

  돈 얘기에 정신이 든 것인지 여인은 눈가를 비비적대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인은 기지개와 하품을 한번 내뱉은 뒤, 껄렁한 태도로 계산대에 팔을 괴고 못다 한 잠꼬대를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누가 가게에 못 오게 막고 있어서 어차피 아직 낮이겠다, 그냥 잠이나 잤지. 너만 아니었으면 아마 밤엔 일어났을걸."

  

  내게 돈이 술을 마시기 위해 삶을 이어나가게 하는 수단이라면, 이 여인에게는 삶의 목적이었다. 그녀 앞에 설 때면 나는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누리지도 못하고 멀쩡히 삶과 삶을 교환하곤 했다.

  

  기싸움을 이기는게 목적이 아니라면 겉치레나 안부 인사 따윈 생략하는 것이 서로 이득인 사이인 만큼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애당초 몇 시간 만에 다시 만난 인연이니 당연히 감흥도 없었다.

  

  "술 줘. 독한 거로."

  

  "돈 줘. 그래도 남겨오긴 했으니 싸게 받을게."

  

  양심이 없는 건 내가 아니다. 이미 자기 입으로 양심은 옛적에 팔아먹었다고 한 건 그녀다. 다만 내게 양심을 술안주 삼을 놈이라고도 했고, 반박할 거리도 찾지 못했지만.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줄건 이 주점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불밖에 없는데."

  

  "불을 질렀다간 술로 불을 꺼주마."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쥐뿔도 없는 협상이 열렸으나,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나의 패배 이력 갱신이었다. 나는 침음을 흘리고 눈웃음까지 지어가면서 희희낙락하는 여인에게 얌전히 동전을 넘겨주었다.

  

  동전을 눈동자 앞으로 가까이 댄 여인은 비웃는 게 목적이 아닌가 싶을 만큼 웃음소리까지 내며 크게 웃어댔다.

  

  한참 동안 동전을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돌려 동전과 탁자 위의 술을 뒤편의 수납장에 쌓아두고 내게 줄 술을 찾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발언을 해놓곤 무심히 일하고 있는 그녀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기정사실 되는 순간이었다. 어찌 사랑을 인질 삼고 저리 태연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속으로 내 욕했지?"

  

  "들켰군."

  

  "하, 사람 속 끓게 하지 말고 술이랑 결혼이나 해라."

  

  "안돼."

  

  순간 진지하게 고민해 봤으나, 그랬다간 손에 드는 술마다 식을 올려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아버렸다. 한 번도 고역이었거늘, 그런 고생은 빈약한 인내심을 가진 나로선 무리다.

  

  "어, 미안해. 독한 거 다 나갔네."

  

  "누가."

  

  그리고 어떤 같잖은 것이 심적인 뭔가가, 주로 인내심이 부족한 놈의 삶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차라리 술이 없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독한 술이 없단 것은 마땅히 나를 겨냥한 도발임이 틀림없으리라.

  

  나는 술을 위해 기꺼이 놈의 도발에 응해주기로 했다.

  

  "가게 못 오게 막고 있던 놈들이 다 사 간 거 같은데. 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기억을 못했네?"

  

  "당장 떠올려. 어떤 새끼들인지."

  

  "알겠으니까 얼굴 풀어. 술 냄새도 풍기지 말고."

  

  나는 순순히 그녀가 시키는 대로 당장 뛰쳐나가려던 몸을 다시금 앉혔다. 괜히 그녀를 자극해 봤자 좋은 일이라곤 없거니와, 그녀가 나름 성심성의껏 나를 도우려 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는 합리적인 이성 판단을 거쳐 내린 그녀와 나 사이의 느슨한 계약의 말로였다. 그녀가 돈에 광적으로 집착함에도 이곳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데에는 그에 알맞은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명백한 병자다.

  

  나와 같다는 뜻이다.

  

  서로의 정신상태를 눈치챘기에 무슨 일로 이 시궁창에 흘러들어온 건진 묻지 않았지만, 그녀 또한 인면수심의 금수다. 짐승끼리는 살기 위해서라면 돕는 법.

   

  이번 생각은 용케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기억을 되짚으며 애쓰던 그녀는 손가락으로 딱소리를 내더니, 연이어 미간을 찌푸리곤 사근사근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사람 파는 애들 같더라. 아, 그런 애들이 한둘이 아닌가. 근데 내 욕했어?"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 말없이 몸을 일으켜 추궁을 피했다. 외팔이는 사회에서 불쌍한 시선을 받게 해주지만 시궁창에선, 그리고 특히 그녀에겐 통하지도 않았다.

  

  "돈 가져. 마시고 또 올 거니까."

  

  "그 말 안 해도 가지고 있으려 했는데?"

  

  나가기 전 들려온 뻔뻔한 말투에 뒤를 돌아보니 검은 머리칼을 찰랑이며 지독한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내가 뭐라 하려 하자 그녀는 잘 가라는 듯이 손을 높게 들고 좌우로 흔들었다.

  

  불만을 말할 기회를 일방적으로 봉쇄당했다. 기회를 놓친 이상 할말도 없었기에 나도 손을 대충 흔들며 문밖으로 나섰다. 

  

  문득 눈을 부릅뜬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한 건가. 그러고 보니 내가 원래 이런 짓을 했었나.

  

  오늘은 그러지 않았을 텐데. 아니, 어쩌면 어제도. 모르겠다. 취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테니 어련히 알게 되겠지.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주점을 나가 술을 뺏어간 이들과 놓고 온 마족을 쫓기 시작했다.

  

  

  

  "좆됐네."

  

  그림자가 빼곡한 골목길 사이로 들어서자마자 이변을 깨달았다.

  

  술집 밖에서 대기시켜 두었던 마족이 사라졌다.

  

  후드로부터 찢어진 것이 분명한 천 쪼가리만을 남겨두고.

  

  천 쪼가리의 거친 감촉이 살갗에 닿자 해야 할 일이 두 개가 되었다는 것이 몸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일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면 죽는다. 마족은 도망갈 힘이 남아있다면 내가 없어도 잠시간은 살아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간의 심사숙고 끝에 해야 할 일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할 일은 오직 하나.

  

  내 술을 훔쳐 간 놈들부터 찾는다. 마족이야 늦지 않게 찾아가기만 하면 되는 문제이지 않던가. 설령 내가 늦는다고 한들 여자아이인 걸 밝히면 죽진 않으리라.

  

  마족이니 경우가 다를 수도 있지만, 시궁창의 머리가 여자아이를 건드리면 죽는다고 신신당부했으니. 그러니, 안심하고 단서를 찾아도 문제없다. 설마 죽기야 할까.

  

  다행히도, 내가 단서를 찾을 필요도 없이 이 근처엔 단서가 많이 남아있었다. 주위의 인기척을 살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출몰하며 지울 수도 없는 단서가, 근방에 널려있었다.

  

  나는 우중충한 건물더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가장 가까운 인기척을 향해 걸어갔다.

  

  저녁이 되어 돌아갈 준비를 하려는 동냥꾼은 예고도 없이 다가온 나를 사뭇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이에 어울리는 아주 훌륭한 대처법을 알고 있다.

  

  얼굴 한구석을 감싼 붕대를 더듬으며, 점점 가까워질 때쯤 검의 손잡이 위로 손을 옮겼다가 품에서 벌써 얼마 남지 않은 동전을 튕겨 건넨다.

  

  나는 망설이는 불구 연기를 아주 잘한다. 어디까지나 연기였지만 판자촌에서 잠에 들 때면 항상 그런 소리를 들었으니 사실이리라. 분명 그럴 터다.

  

  과연 연기가 통했는지, 물기 섞인 밤안개를 찾아 돌아가려던 동냥꾼은 동전을 망설임 없이 냉큼 받아 들더니 내 말을 경청한다는 자세를 온몸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의 태도를 높이 사 거리낌 없이 입을 열었다.

  

  "이 근처에서, 점심 즈음에 우르르 몰려다니는 걸 본 적 있나?"

  

  "아우, 예. 물론 입죠. 저쪽으로 가더구먼유. 근데 제가 정확한 위치까진 어히고, 이거 참.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먼요."

  

  나는 근 몇 년을 갈고닦은 연기 실력에 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제대로 된 사용법으로 사용할 때가 왔음에. 이름 모르는 동냥꾼을 향해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원하나 보군."

  

  동냥꾼은 멋쩍은 듯 허허 웃어 보였다. 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검을 최대한 천천히,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리도록 절묘한 각도로 기울이며 해에 비치도록 검집에서 뽑는다.

  

  몸으론 그대로 해를 가려 역광을 만든 뒤, 모습을 드러낸 칼날을 내 얼굴 앞으로 옮긴다. 

  

  그리고 칼날을 옆으로 눕혀 핥는다. 비릿한 쇠 맛 탓인지, 표정이 굳은 동냥꾼의 얼굴이 코를 기점으로 칼날에 가려져, 검에 베여 두 조각으로 갈라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마주 웃으며 그가 만족할 만한 답을 꺼냈다.

  

  "노잣돈을."

  

  때로는 돈보다 더 믿을만한 것이 생기는 법. 나는 그를 향해 날카롭게 갈린 철제 신뢰를 겨눴다.

  

  "저쪽입니다. 잠시 손에 드신 천을 빌려주시면 대략적인 방향을 그려드리겠습니다."

  

  나는 불쑥 내민 친절을 섣불리 들지 않고 고민했다. 확실히 약도를 받는다면 편하긴 하겠으나, 이 천 조각은 도저히 마족을 찾을 수 없을 때 마력으로라도 찾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이다.

  

  고심 끝에 명쾌한 해답을 찾은 나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조금 도려내 동냥꾼에게 건넸다.

  

  "부탁하지."

  

  이어 말해보자면, 나는 동냥꾼의 태도에 감복했다. 떨리는 손으로 붕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그의 간절함에.

  

  "거짓이 아닌 건 확실하겠지."

  

  "살펴 가십시오."

  

  그러니 이렇게, 칼을 겨누고 물은 마지막 질문에 떨리는 손으로 친절히 가리켜준 길목을 향해 아무런 의심 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것이다.

   

  망설임은 없었다. 한 번에 해결되면 좋고, 아니면 반복할 뿐. 일상처럼.

  

  길목 구석의 곰팡내와 축축한 물기가 내 몸 위로 고스란히 쌓여만 가는 술과 마족 없는 저녁, 모든 것이 긍정으로부터 멀건만 나는 긍정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긍정을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긍정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야 기억해 냈다.

  

  나는 오늘밤, 긍정을 긍정하고 술에 취해 행복하게 잠에 들리라.

   

  이는 외팔이의 맹세요, 외팔 용병의 맹세다.



다음화까지 빌드업임,,,

오탈자 지적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