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역키잡 보고 싶은데 왜 없음?

그래서 내가 더 써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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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해 보지."

  

  마법은 마력을 담아 세계에 요청하는 기적이다.

  

  생물의 체내에 있는 마력과 촉매를 매개로, 세계가 맥동하는 운명의 흐름에 따라 세계에 요청하여, 기적을 행사한다.

  

  "넌 살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바랐다."

  

  마족은 이 과정 중, 세계에 요청하는 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개체별로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부를 제하면 인간보다 한 차원 높은 이해를 가지고있다.

 

  가끔 노력과 재능으로 일구어낸 결과 마족보다 뛰어난 이해를 가진 독종들이 있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그리고, 그런 이들도 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

  

  "그리고 이번엔, 내 치유를 바라고 세계에 요청한 거고."

  

  마왕 수준의 마족. 적법한 촉매 없이도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마력 등을 쏟아부어 기적 속의 기적을 행하는 것들.

  

  빛을 흡수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로 눈앞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어린 마족이 그에 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합리적인 의심이다. 당장 죽어가던 몸을 치료한 것도 이 녀석이 한 것이라 들은 참이지 않은가.

  

  나는 추운 땅바닥에서 잠든 끝에 가라앉다 못해 파고들어가는 목소리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왜 그랬지?"

  

  "그냥."

  

  "훌륭한 대답이야."

  

  질문을 훌륭히 회피한 어린 마족은 내가 덮어준 동화 몇 개짜리 후드를 만지작거렸다. 뭔가 달라졌군. 동족을 만나고 심정의 변화가 있었나.

  

  나는 술집으로 반쯤 기어가 주인장에게 무릎을 꿇고 받아온 동화로 산 흰죽을 들이켰다. 남은 것으로 작은 동물의 사체를 사고, 그러고도 남은 동화로 산 것이 저 후드였다. 후드의 끝단이 눈에 담겼다.

  

  새하얀 발목에 붉게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 긁힌 상처다. 마족이니만큼 질병의 걱정은 없지만, 저런 상처며 고통을 감수할 이유는 모르겠는지라 죽에서 입을 뗐다.

  

  "마력은 어디서 보충했나. 안 그래도 굶주렸을 텐데."

  

  "당신이 쓰러진 곳 주위에서 다른 피 냄새를 맡고 시체에서 수거했어. 조금 위험했지만."

  

  상관없다는 듯이 고개를 사뿐히 휘저으며 하얀 머리칼을 흩날리는 마족의 표정은 아주 당연한 일을 했노라 말하는 것 같았다. 마침 건물들 사이로 날아든 햇빛이 그 머리칼 위로 내리쬈다.

  

  나는 그 찬란한 빛무리에 눈을 찌푸리다가 추궁을 이어나갔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었나?"

  

  "당신을 살리고 싶었어."

  

  어린 마족은 담담히 말했다. 굳이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애초에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눈을 뜨고 있지도 못했을 테니. 하지만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들어라. 마족들중엔 간혹 인간을 죽이지 않는 것들이 있어. 이런 놈들의 특징이 뭔지 아나?"

  

  "몰라."

  

  "인간을 정말로 죽이고 싶지 않아 하는 건 아니란 거다. 죽이지 않는 건 어떤 조건을 성립한 인간뿐, 그 외엔 가차 없이 죽여버리지. 더 예상할 수 없어지는 건 덤이고. 마족인 이상 당연한 법칙이야."

  

  나는 문득 든 생각을 그대로 따랐다. 마족의 오른쪽 뺨에 손을 갖다 대 보았지만, 마족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반기는 듯 자신의 손으로 내 손을 감쌌다. 역시나.

  

  "…?"

  

  그러길 잠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마족을 보며 나는 도로 손을 뗐다.

    

  "넌 나를 그 조건에 맞아떨어지는 인간으로 취급하고 있는 거다."

  

  "응."

  

  "누굴 죽이는 꼴을 볼 순 없으니, 이제부턴 아예 뭘 하든 같이 다녀야겠군."

  

  어린 마족은 대답하기에 앞서 검은 연기를 휘감은 채로 눈을 빛냈다. 몇 년 전에 저 모습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금발의 여인과 그녀를 따르는 마족이 어느샌가 다가와 있었다.


  나는 어젯밤 기억을 풀어 해친 대가로 들이닥친 그들을 쫓아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어린 마족을 일으켰다.

  

  "그럴 생각이었어. 당신이랑 떨어지면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하얀 머리칼을 마법으로 검게 물들인 마족은 곧장 걷기 시작하며 나란히 섰다. 나는 뭐하냐는 듯 가만히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마족과 가려진 시야 한 귀퉁이를 눈에 담고 한숨을 내쉬었다.

  

  풀려나간 좀먹은 붕대를 애써 감으며, 마찬가지로 손이 닿지 않아 애쓰는 마족에게 후드를 덮어 씌워줬다. 어느쪽이건 심각하군.

  

  

  

  "주웠어."

  

  나는 붕대를 새로 갈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얼굴을 가려야만 하는 이유는 따로 없다. 그저 내가 내 꼴을 보기 싫을 뿐.


  붕대를 다 갈고서는 마족의 발목에 난 상처 위로 붕대를 감아주었다. 외팔이가 붕대를 감기 위해선 입까지 동원해야 한다. 그 우습지도 않은 꼴을 구경하던 그녀가 나를 책망했다.

  

  "미쳤구나."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나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는 마족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한 채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그놈 그거 진짜 남색가도 아니고, 아무리 약혼자 피해서 여기까지 왔다 해도 보증인이 있는 어린것까지 내쫓으려 하진 않겠지."

  

  "난 그 약혼자란 사람 이해해. 대충 뭔 심정인지 알 거 같거든."

  

  내쫓으려 하면 나가버리면 그만이기도 하고, 나도 이제 여길 뜰 때가 됐지. 따라붙으려는 뒷말을 도로 삼켰다.

  

  몇 년 동안 오래도 신세를 졌다. 추억은 별로 없지만, 확실히 있긴 했다. 나는 술집 안을 돌아보는 마족을 뒤로하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저게 무슨 표정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제 근처에서만 돌아다니며 술집을 살피는 마족은 또 어떤가. 복잡해 죽기 전에 다행히 마족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것보다, 뭐 좀 묻자."

  

  "그것도 술값으로 계산하게?"

  

  "그래."

  

  "뭐?"

  

  어디서 금화 하나라도 굴러와서 그걸로 미친 도수의 술을 사 먹지 않는 이상, 지금 당장은 술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물론 이 마음가짐은 고작해야 일주쯤 갈 테지만, 그 선언은 술집 주인이라는 직책을 맡고있는 그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늘 낮부터 돌기 시작한 소식 하나 있을걸."

  

  "있긴 한데 방금 무슨 소리야. 얘 때문에 그래?"

  

  엿됐군. 마족 냄새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맡는 것들이 사망자 하나, 부상자 스물 일곱이라는 사건에 조사를 안 해볼 리가 없다. 말단이라도 하나 파견해 보겠지.

  

  그러고 있자니 자신을 부른 것을 눈치채고 손끝에 검은 연기를 피워내려는 어린 마족의 손을 내치며 마족을 노려보았다. 이것의 악의는 지금까지 나만이 피해 갔다. 조건이 뭐길래.

  

  "아니라곤 못 해. 돈이 부족하거든."

  

  조건을 알아내기 전까진 일 자체를 줄여야 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목 하나를 날릴 수도 있다. 그게 누구의, 어떤 종족의 목인지 눈치채지도 못할 사이에.

  

  그러니 돈이 부족하다. 술을 끊지 않더라도, 일을 줄이는 것만으로도 하루걸러 한 끼씩 먹으며 살아갔겠지. 나야 익숙했지만 어린 마족에게는 아닐 테니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리 대답하자 그녀는 제 수입원이 하나 끊긴 것이 꽤 심각한 일이었는지 나름 격하게 반응했다.

  

  "왜? 왜 그러는데. 돈이 부족하든 뭐든 술은 웬만해선 계속 마셔댔잖아."

  

  "약속을 했지."

  

  그때 한 약속이 지금 옆에 둔 마족과 여인을 바라보며 한 약속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술을 마신 것도 처음엔 약속 때문에 그런 거였어. 그 약속은 지금 당장은 미뤄도 될 것 같아서."

  

  방금까지 당황하고 있던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담기기 시작했다. 감정에 낯설 터인 어린 마족도 반응할 만큼. 무슨 감정인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흥분하고 있단 것만큼은 분명하리라.

  

  나는 평범한 흑색 눈동자를 게슴츠레 뜨고 있는 어린 마족을 가까이 오게 했다.

  

  "그 애가 뭐 되기라도 해? 그 정도야? 나이가 어떻든 데리고 있는거 만으로 위험하단거 알잖아."

  

  "그래야 해. 그리고, 어차피 잠깐 나갔다 올 생각이야. 외출까진 통제도 그리 심하진 않아."

  

  나는 본능인지 뭔지 모를 것으로 발작하여 검은 연기를 피워내는 마족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며 일축했다. 적당히 해줬으면 좋겠군.

  

  내 바람대로 마족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연기를 거두고 내 손을 잡았다. 검은 머리칼의 끝부분이 본래의 새하얀 눈 같은 하얀색으로 조금, 아주 조금 물들어 있었다. 흑백이 무뎌져 있다.

  

  내 손을 꼭 쥔 마족과 눈을 마주한 그녀는 뭔가를 내려놓은 듯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도 전보다 보긴 좋네. 나 구해준 날 생각나고."

  

  언제인지도 모를 일을 떠올리려 하는 그녀를 망막에 그렸다. 은은히 내리쬐는 조명이 제법 선명하다. 거기서 뿜어져 나온 은은한 불빛이 그녀를 넘어, 자신과 어린 마족에게도 닿았다. 따스한 불빛이.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선 이 방법이 맞다. 나는 주점에 들어설 때부터 지니고 있던 생각을 꺼내 들었다.

  

  "내가 늙어 뒤지기 전에 제일 비싼 술 마시려고 미리 내놓은 돈. 돌려줄 수 있나."

  

  "투자라고 생각해 둘 테니까 뒤지지만 마."

  

  섣불리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마족과 얽힌 것만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얼토당토않은 짓이다. 무던히 은화 다섯 닢을 집어 들었다. 언제 이리 모아뒀지.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니 싱긋 웃고 있었다. 나는 의도를 알아채고 고개를 숙였다. 마족의 머리에도 손을 올렸다. 뜻밖에도 마족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손길대로 머리를 숙였다.

  

  존중의 표시를 마친 나는 발을 문밖으로 향했다. 설마 투자란 말이 정말일 줄이야. 그녀에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나의 뒤를 쫓은 마족이 나를 대신해 문을 열었다. 밖이 보였다.

  

  밖이다. 그리고, 밖으로 가야 한다.

 

 

  

  시궁창의 끝자락, 귀하신 분들의 교육과 관광을 겸하는 곳을 향해 선을 긋듯 피어난 초록이 무성한 길거리에서 옷을 사 입혔다. 나까지 옷을 입을 필요는 아직 없었다.

  

  보통 시궁창의 거주민이 이곳까지 찾아오면 소란이 일기 마련이건만, 충분한 돈엔 소란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여자아이를 위한 옷을 사진 못했으나, 후드를 덮어쓰고 있어서 어차피 모르는 이가 보기엔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도 중성적인 옷을 사입히긴 했다.

  

  모처럼 말끔한 새옷을 사 입혔건만, 소녀의 표정은 무표정한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점에 특히 만족했다.

  

  "우린 시궁창 밖으로, 도시 내부로 간다. 가만히 있다간 찾아올 교회 놈들한테 죽고, 다른 곳을 통해 도시 밖으로 나가도 출입부에 적힌 이상 추적당한다."

  

  시궁창이란 본질적으로 거대한 수형장이다. 극한의 환경에 몰아넣고 수형자끼리 죽고 죽이길 반복하는 수형장.

  

  이런 곳에 들어오는 자들은 범죄자나 어차피 죽을 자들이요, 속세를 버리고 들어온 괴인들이다.

  

  그렇기에 엄격하게 관리된다. 주인이 따로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출입은 의뢰가 아닌 이상 단 하나의 통로로 엄격하게 통제된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래 있진 않을 거다. 교회에서 찾아온 것들이 시궁창에서 조사를 마쳤을 때, 도로 돌아가 시궁창을 통해 도시를 탈출할 거다. 느려도 사흘이면 되겠지."

  

  "물어볼 게 있어."

  

  "해둬라."

  

  앞으로 몇십분이면 고명하신 귀족 자제들이 견학차 오는 출입구에 가까워진다. 그때부터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가하며 돈을 건네줘야 했다.

  

  지금처럼 한가하게 계획을 풀어 설명하거나 사담을 나눌 여유도 없어진다는 뜻이다. 나는 술집에 들른 그 순간부터 남아있는 여유를 앗아갈 정도로 과민반응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도시를 인간들이 부르는 이름은 없어?"

  

  그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말았다. 풀어헤친 기억의 영향인지 말투도 어쩐지 날카로워진 것 같다.

  

  "난 이 도시에 정 따위 못 들여. 정 궁금하면 경비병들한테 물어볼 테니 직접 듣도록."

  

  나는 도시에 정을 못 들이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과거를 얘기해야 할 것이고, 길어질 것이다. 대신 땅바닥을 바라보며 걸었다.

  

  우리의 이름자를 써 내린 흙을 덮어 버리고 그 위로 성벽을 세우고 터를 잡고 집을 짓고 길을 깔고 웃으며 살아가고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우고 지저귐과 아침을 맞고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부부의 연을 맺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행복한 임종을 맞이하고

  

  하나같이 역겨운 것들. 난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없다. 이름깨나 알려진 도시에 몇 년간 살았으면서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궁금하지 않아."

  

  "솔직하게 말해. 그딴 걸로 널 두고 가진 않을 테니."

  

  "정말로, 궁금하지 않아."

  

  그 말에 나는 의도를 파악하려 발을 멈춰 소녀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모르는 무표정한 얼굴은 공허하나 얼핏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바람에 후드가 슬며시 내려가자, 하얀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햇살에 나부낀 흰색 머리카락이 바람의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휘날렸다. 구름처럼, 정처 없이.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흘린 눈물처럼 맑고도 덧없이.

 

  어두운 보석을 닮은 생기 없는 녹색 눈동자가 약간의 물기를 머금고 움직였다.

  

  시야에 방해가 될 것도 인기척도 없어 후드를 황급히 씌우진 않았다. 그저 잠시, 멍하니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태평한 얼굴, 일견 슬퍼 보이는 눈빛 그대로 입을 열었다.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게 맞는 거야. 어제도 그랬으니까."

  

  그 눈에, 내 표정이 비쳤다. 나는 멍하니 손을 펼쳐 내 얼굴을 후려쳤다. 방금 무슨 생각을 품었던가. 나는 심호흡하며 생각을 바로잡았다.

  

  알고 있다. 눈앞의 소녀가 나를 위해 울어주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구한 생명인데, 그 정도 생각도 안 되나? 미친것. 생각보다 정신 상태가 심각한데.

  

  "그래. 들어줘서 고맙군. 다시 가지. 도시에 들어서면 뭐라도 사주겠다."

  

  나는 소녀가 입은 리본이 몇 개 달린 옷의 매무새를 정리해 주고, 벗겨진 후드는 내가 걸치기로 했다. 지금부터는 여자아이인 것을 드러내는 게 오히려 유리하리라.

  

  물론 내 해괴망측한 생김새는 적당히 숨기는 게 유리할 테지만.

  

  서서히 검게 물들어가는 머리카락에 묻은 나뭇잎을 떼주며, 그러한 행동이 자연스러운 관계를 연기하기 위해 몰입하기 시작했다. 어린 여자애를 내버려두지 못한 몰락한 인간,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생각만으론 불충분했다. 관록이 있는 자들을 속여넘기려면 응당 그리해야 한다. 고민 끝에 소녀를 품에 들였다.

  

  "이대로 가지. 경비병을 만나고서부턴 네 뜻대로 해라. 그게 더 자연스러울 테니."

  

  "알겠어."

  

  극적인 효과를 위해선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험상궂은 붕대 외팔이와 평범한 어린아이, 꽤 훌륭한 대비가 되어주겠지.

  

  아예 품에 가까이 붙으려는 마족을 조금 밀어낸 후, 다시 발을 디뎠다.

  

  

  

  그로부터 몇십분을 걸은 남자는 저 멀리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입 한번 뻥긋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정도는 오른팔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 매달린 소녀 때문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긴 했다. 상대가 인간이고, 소녀는 마족이니만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저 멀리 젊은 경비병이 이쪽을 알아보고 다가올수록 그럴 결심을 굳혔다. 자신이 연기해야 할 움직임이 저절로 펼쳐졌다.

  

  "정지. 뒤에 계신 분은 거주민이고. 앞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허리춤에 검을 매단 갑옷 차림의 경비병이 몇 걸음 앞에서 멈춰서자, 소녀는 빤히 고개를 들어 자신을 후드로 감싼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젊은 경비병일수록 시궁창의 분위기에 짓눌려 존대를 일삼기 마련, 온상의 표시. 

  

  남자는 속으로 다짐하고 곧장 행동에 돌입했다.

    

  마주 본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은 순간, 뭔가를 눈치챈 소녀는 그러기 싫다는 듯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표시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남자는 소녀의 등을 떠밀어 경비병에게 다가가도록 했다. 그러자 소녀는 정말 품으로부터 떠나기 싫은지 저항하기 시작했다.

  

  "…"

  

  실랑이를 지켜보던 경비병은 일단 소녀를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옷차림이 시궁창의 것이라기엔 상당한 사치였다.

  

  서둘러 남자의 허리춤을 붙잡고 있는 소녀의 손을 뗀 뒤, 데리고 몇 걸음 물러서니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단검일지도, 만에 하나 화약일지도 모를 일이다. 경비병은 검에 손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도 붕대로 얼굴을 가린 남성의 표정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동작과 표정에 경비병이 긴장을 풀면서도 경비소를 향해 고함칠 준비를 하는 사이, 소녀는 본래 무표정했던 표정을 더욱 낮게 가라앉히며 검은 연기를 피워올릴 준비를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진 모른다. 그저 알아서 행동하라며 모든 것을 맡겼다. 사실상의 방임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믿음을 잃는 이유가 되기에는 너무나 사소하다. 소녀는 품을 뒤적이는 남자를 주시하며 눈동자의 생기를 죽였다. 

  

  우선 의도를 따르자.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르자.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은 반짝이는 무언가였다. 자신 옆의 인간을 당장 해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안 어린 마족은 눈을 깜빡였다.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경비병에게 다가와 불쑥 무릎을 꿇은 남자는 경비병을 향해 절하며 그것을 건넸다.

  

  긴장하고 있던 경비병은 조심스레 다가가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았다. 정교한 그림이 은 위에 그려져 있었다. 은화처럼.

  

  "은화?"

  

  태양을 향해 비춰보니 틀림없는 은화였다.

  

  알 수 없는 남자의 의도를 뒤로한 채 일단 경비소로 돌아가 상관을 데려올 찰나였다.

  

  절하고 있던 남자가 황급히 품속을 뒤져 은화 두 개를 더 경비병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닌가.

  

  아니, 어째서?

  

  이쯤 하니 신입이던 그도 의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이들은 시궁창으로부터 내보내달라 하고 있었다.

  

  이 말도 없는 두명이 왜 시궁창을 탈출하려하는가?

  

  평소 상상력이 풍부했던 그는 자연스레 머릿속으로 상상을 뿌리내렸다.

  

  기구한 사연, 시궁창에 떨어진 소녀, 붕대투성이의 남자. 그리고 침묵, 침묵…

  

  순식간에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만들어낸 굳센 경비병은 여차하면 칼을 뽑아들 준비를 했다.

  

  "불가능합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이야기였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시궁창에서 내보내 줄 수 없었다. 합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공작으로 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시선을 내려 남자를 향해 애처롭게 손을 뻗은 소녀를 관망했다. 이 소녀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높이에서 표정을 볼 순 없지만, 시궁창을 벗어나는 데에 필사적이면서도 망설이고 있을 소녀 한 명이라면.

  

  "그래도 이 아이 하나라면 가능할 겁니다. 애초에 여자아이니만큼… 뭐, 도시 안에선 보육원에서 살아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경비병이 그리 말하며 붙잡고 안심시키려 애쓰고 있는 소녀는 그와 떨어진 이후부터, 자각할 일 없는 미약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 감정만은 연기가 아니었다.

  

  행동 또한, 비록 그의 의도에 맞춰 일부러 과장한 면이 있을지언정, 어느 정도는 자신의 뜻이 담겨있었다.

  

  불안감과는 동떨어진 것, 허나 분노라기엔 애달픈 것.

  

  그것이 어린 마족의 면면 위로 피어나지도 못한 채 도로 소녀의 몸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감정에 영향받은 소녀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경비병에게서 손의 감각을 느끼며 죽일지 말지 고민했다.

  

  죽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어린 마족에겐 그가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우선 따를 뿐이었다.

  

  물론 붕대를 감은 남자는 어린 마족이 제발 그러지 않길 빌며 꼭 좀 부탁한다는 듯 머리를 땅에 박으며 절하기 시작했다.

  

  땅바닥에 튄 피에 경비병이 당황하긴 했지만 이미 튀어나온 돌부리에 머리를 긁히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그가 입을 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분위기를 잡는 방법에는 침묵이 가장 효율적이니까. 그리하여 신음도 내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던 경비병이 방심한 사이, 소녀는 곧장 그에게 뛰쳐나가 그를 감싸고 경비병을 향해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얼마 안 남았다. 경비병이 고민하고 있어."

  

  자신만이, 그것도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만큼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쐐기를 박기 위해 경비병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으로.

  

  그런 소녀를 보며 경비병은 장장 몇분에 걸친 고심 끝에 남자를 일으켜주었다. 얼굴을 뒤덮은 붕대에서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빨리도 일으켜주는군, 썩을. 물론 남자는 그런 말을 내뱉을 틈도 없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럴 때일수록 간결함이 중요한 법.

  

  "앞으로 세 시간쯤 지나면 교대 시간입니다. 그때 경비소 옆에 있다가 제가 나오면 성문으로 들어가세요. 남성분은 외출까지만 봐 드리겠습니다. 그 이상은 무리예요. 사흘 드릴 테니, 그 안에 돌아오시지 않으면 경비대에 신고하겠습니다."

  

  다음 근무일이 사흘 뒤인가. 남자는 방금 얻은 정보를 기억에 남기고, 방금 전과는 달리 머리를 꼿꼿이 세우려는 마족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우선 경비소 근처를 떠났다.

  

  시궁창의 주인을 왕께서 믿음직스럽게 보시는지 경비인력이 많이 줄었다거나 등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던 참이다. 애초에 그래서 시도한 게 아니었나.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남자는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 어린 마족을 굳이 업어가며, 끝까지 연기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유유히 시궁창을 나섰다.

  

  어린 마족은 남자의 계획에 순순히 협조해 주었다.

  

  

  

  어린 마족 하나와 외팔 용병.

  

  길고 긴 사기극 끝에 도시 내부로 무혈입성 성공.

  



얀끼란 무엇인가,,,??? 나는 몇년간 얀데레를 좋아했지만,,,
막상 쓸때가 되면,,,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구나,,,
오탈자 지적,,,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