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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2차 세계 대전의 독일 장군이라 하시면

여러 사람들이 떠오르실 겁니다.

하인츠 구데리안, 에르빈 롬멜, 에리히 만슈타인...등등

이 사람들은 대부분은 공격을 잘하는 장군들입니다.


하지만 수비를 잘하는 장군도 있죠,

그가 바로 발터 모델입니다.


발터 모델은 명장이며, 동시에 덕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죠.


발터 모델의 풀네임은 오토 모리츠 발터 모델(Otto moritz walter model)이라고 합니다.

장군은 별명을 가지고 있죠, 그 처럼 모델도 별명이 있는데,

대표적인 별명이 방어의 사자, 방어전의 마스터, 동부전선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

별명도 방어가 들어간 것 보면 방어에 뛰어난 장군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발터 모델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발터 모델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확인 하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발터 모델은 1891년 1월 24일 작센 주 에서 독실한 루터교 신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경제적인 여유는 없어서 생활고에 시달렸으나 김나지움에 다닐 수 있었고, 이때만 해도 라틴어와 그리스 문학 동호회에서 역사와 시에 관심을 갖는 조용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델의 가족이 새로 이사한 나움부르크가 포병과 보병 대대 주둔지였고, 군 장교를 아버지로 둔 친구들과 만나면서 큰 영향을 받습니다, 이들은 모델을 데리고 육군 기지 내 훈련을 구경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절친이 당시 프로이센 육군 대령의 아들이었던 또 한 명의 명장 한스-발렌틴 후베 상급대장이었습니다.

모델은 성적이 우수해 대입 자격증을 받았지만 보병으로 입대하였습니다, 사관 추천서로 입대하였지만 어릴 때 부터 몸이 약하여  군사 훈련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해 교관이 군대를 그만둘 것을 권유 하였고, 모델도 의대에 진학할 준비를 하였지만...

모델은 포기하지 않고 군대에 남았습니다, 이를 본 교관은 모델을 모든 훈련 및 시험을 통과하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장교가 된 후 모델은 1차 세계 대전에서 보병 장교로 근무하여 솜 전투, 마른 전투, 베르됭 전투에서도 참전하여, 용맹히 싸웠기에 철십자 1급 훈장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그는 오스카 폰 프로이센 왕자가 감동을 받아 참모 이수 과정을 직접 주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랭스 대공세에서도 참전하여 주요 참모를 모두 경험하였습니다.


전간기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군 조항에 실망하여 군을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독일군의 아버지'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뽑은 4000명의 정예장교 중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확인 하여 군에 남기로 합니다.

그 후 모델은 치안 부대에서 활동할 때, 신세를 졌던 주인집의 딸, 헤르타 후이센과 결혼하고, 결혼 후 4년 간 뮌스터에서 프리츠 폰 로스베르크 보병대장의 참모로 근무하는데 로스베르크의 전술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그의 인생을 결정짓는 계기가 됩니다. 로스베르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최전선의 패잔병들을 체계적인 부대로 재편성하고 종심방어 전술로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내다가 적절한 시기에 공세로 전환하여 큰 타격을 입히는 무훈을 세웠는데요, 특히 종래의 방어 전법에 반대하며 후방 진지 구축과 예비대의 운용을 강조하였다고 합니다.

훗날 동부전선의 소방수 발터 모델이 펼쳐낸 방어 전법은 서부전선의 소방수 로스베르크 장군의 수제자임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델과 소위 시절부터 친구였고 뮌스터에서도 함께 참모로 근무했던 에르빈 비오프 보병대장에 따르면 로스베르크 장군과의 인연과 여러 공통점들 덕분에 모델은 마법사의 제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눈물) 당시 드레스덴에 주둔 중인 4군단의 참모장이었던 모델은 폴란드 남부 침공 계획을 생각해냈고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중장으로 승진하여 16군 참모장으로 근무하였습니다. 

프랑스 침공에 참전하여 스당 돌파와 마지노선 우회 공격을 성공시켰으며 이후 영국 상륙 계획을 입안하여 16군의 훈련에 몰두하나 바다사자 작전이 취소되면서 보직을 변경하고, 제3기갑사단장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야전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모델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 휘하로 배속됩니다, 전차 부대 실전 지휘 경험이 없었기에 그러한 인사 조치에 불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델은 교량이 파괴된 시하라 강 도하를 포함하여 4일 간 310km를 질주하며 소련군 14기계화군단을 해체시켜 버리고 개전 2주 만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모델에게는 제1기병사단의 지휘권까지 주어졌고 제3기갑사단은 모델 집단이란 명칭을 사용하게 됩니다.

스몰렌스크에서 31만 명, 키예프에서 66만 5천 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며 프랑스 침공을 능가하는 독일 기갑전의 신화를 써갔다는 민스크, 스몰렌스크, 키예프 포위전에서 모델은 구데리안 기갑군에서도 최선봉에서 지휘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기갑대장으로 진급하게 됩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키예프로의 방향 전환에 구데리안 기갑집단은 모스크바 방면으로 측면이 150마일이나 노출되었으나 최선두의 모델은 이러한 위험성마저 분쇄하며 돌격을 거듭하여 9월 14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의 선봉인 제16기갑사단과 합류하면서 키예프 포위망을 완성시킵니다.

사단장으로서 모델은 언제나 선봉 부대를 직접 지휘하며 전황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소련군이 미처 파괴하지 못한 교량을 확보하고 작전 지도를 노획하여 진격 속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다, 선봉 부대는 적의 강력한 방어 진지에 반격할 틈을 주지 않도록 신속하게 우회하여 중요 거점을 우선 점거하며 전술적 우위를 장악했고 연료 부족과 열악한 도로에 의한 전차의 비전투 손실, 악천후에 후속 부대가 합류하지 못하자 모델은 정예 부대원들을 선발하여 전투단을 재편성하여, 이들 선발대를 거듭 진격시키는 전법으로 3기갑사단은 3개월 동안 단 하루도 휴식 없이 키예프까지 도달하는 훌륭한 전과를 달성했습니다. 1942년 1월, 9군 사령관으로 갑작스레 임명된 모델은 강추위가 독일군의 발을 묶은 것만큼이나 소련군의 발을 묶었기에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고 판단하여, 돌출된 지형 탓에 포위되고 후방에 소련군 공수까지 강하하여 수적으로도 4:1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예비 부대의 정확한 투입과 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여 사방에서 몰아치던 소련군의 공세를 모두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최상의 타이밍에서 공격으로 전환, 오히려 소련군을 궤멸시키며 간격을 닫아 버린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겨울 공세로 인하여 와해 직전까지 갔던 9군을 도중에 지휘하게 된 1차 르제프 전투에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모델은 르제프 돌출부에서 끊임없이 격전을 거듭하며 소련군의 명장인 게오르기 주포크,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부대를 특유의 공세적 방어로 모조리 패퇴시키는 위업을 달성하여 '방어의 사자'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휴식 없이 키예프까지 도달하는 훌륭한 전과를 달성했습니다.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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