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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부에서 이어집니다! 

1부


1942년 1월, 9군 사령관으로 갑작스레 임명된 모델은 강추위가 독일군의 발을 묶은 것만큼이나 소련군의 발을 묶었기에 충분히 방어해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돌출된 지형 탓에 포위되고 후방에 소련군 공수부대까지 강하하여, 수적으로도 4:1의 열세인 상황에서도 예비 부대의 정확한 투입과 화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여 사방에서 몰아치던 소련군의 공세를 모두 무력화시켰을 뿐 아니라 최상의 타이밍에서 공격으로 전환하여, 오히려 소련군을 궤멸시키며 간격을 닫아 버리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겨울 공세로 인하여 와해 직전까지 갔던 9군을 도중에 지휘하게 된 1차 르제프 전투에서부터 1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모델은 르제프 돌출부에서 끊임없이 격전을 거듭하며 소련군의 명장인 게오르기 주코프, 이반 코네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부대를 특유의 공세적 방어로 모조리 패퇴시키는 위업을 달성하여 '방어의 사자'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1942년 9월과 10월에 걸쳐,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독일군 주력이 집중되는 가운데 르제프 방면 소련군 대공세에 관하여 독일군은 정보 기관마다 그 예측이 다르고 내용이 몇 번이나 번복되는 등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델과 9군 정보참모 분트로크 중령은 감청과 항공 시찰, 소련군 포로의 진술 등을 통해 11월 25일의 소련군 동계 대공세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고, 폭설에 정찰기와 차량이 운행하지 못하자 모델은 무한궤도 군용 바이크로 매일 최전선을 오가며, 주요 방어 진지를 보강하고 지휘관들과 논의하여 이를 기반으로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원수에게 증원 부대와 보급 물자를 요청하였습니다.

여기서 잠깐, 발터 모델과 귄터 폰 클루게의 관계를 알아보자면 르제프 공방전 당시, 르제프에 주둔했던 발터 모델은 귄터 폰 클루게와 아무 관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성격이 서로 비슷했다고 합니다, 귄터 폰 클루게는 처음 만나는 사람을 일부러 무시하고 기선을 제압하는 그런 성격이 있어  그 때 그 사람이 주눅들면 평생 클루게가 무시하고, 당당하게 맞서게 된다면 나이나 계급에 상관이 없이 존경하고 존중했다고 하는데, 이에 모델의 성격과 거의 일치 했다고 하여, 클루게는 구데리안과 사이가 나빴고, 모델이 구데리안 쪽의 인맥으로 군에 들어 왔지만 성격이 맞아 잘 견뎌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모스크바 전투 패배 이후 후퇴를 결정한 원수, 상급대장, 대장급 고위 장성들을 대거 해임시킨 히틀러는 대대 병력 배치 하나에도 사사건건 개입하여 그놈의 총통 직할 명령으로 '후방 진지 구축 금지'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정작 르제프 돌출부에 있던 9군은 종심 방어를 기본으로 하여 후방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는 모델의 기본 방어 전략이기도 했고 특히 모델 자신이 엄청난 배짱의 소유자여서 때로는 히틀러의 면전에서 대놓고 총통 명령을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여서. 종전 후 한참이 흘러 기밀 해제된 독일군 군사 문서를 보면 9군 보고서는 사실대로 기록하면서도 히틀러의 명령을 어긴 것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상당히 애썼고,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문언 상에서 눈에 띄어도 아무런 이의 없이 결재해 주었다고 한다. 즉, 클루게와 직속 참모들은 전략적 판단에 의거하여 9군의 총통 명령 위반을 묵인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클루게의 비호가 없이 있는 사실 그대로 총통에게 알려졌다면 아무리 모델이 '방어의 사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해도 히틀러에 의해 해임당했을 것이기에, 클루게와 모델의 사이는 더더욱 각별한 것입니다.


11월 25일 새벽, 이반 코네프의 서부 전선군과 막심 푸카예프의 칼리닌 전선군이 4개 방면에서 동시에 9군을 협공하여 대규모 포위망을 완성하려 했었으나 눈과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상실한 소련군 20군 포병대의 서전 포격은 아군의 진격에 방해가 될 만큼 지형을 파헤쳐 놓은 반면,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기갑대장의 39기갑군단은 이에 대비하여 후방 진지로 물러나있었기에, 독일군 포병과 라이플은 방어 진지에 의해 제한된 소련군의 돌격로를 정확하게 예측하여 배치되어 있었기에,. 서부 전선군은 첫날에만 투입한 보병의 절반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2개의 전차여단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게오르기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는 공세를 강행했으나 비좁은 돌파구에 6전차군단과 제2근위기병군단이 몰리면서 병목현상이 발생하였고, 이들은 모델의 주특기인 포병 집중 운용의 주 목표가 되어 버렸고, 여기에 모델이 직접 지시한 슈투카 폭격까지 더해지며 20군과도 단절 및 고립되고 말았다. 아르님은 증원 기갑 부대가 도착한 11월 29일에 이미 공세로 전환, 포위 섬멸전으로 각개격파를 지휘하였습니다.
칼리닌 전선군은 22군과 41군으로 벨리에 위치한 41기갑군단의 서부 방면을 공격하고 39군은 북부 방면으로 공격했으나 41기갑군단장 요제프 하르페 기갑대장은 압도적인 전력 차이에도 소련군 선봉 부대들의 합류를 저지하였고, 통신이 두절되자 모델은 직접 벨리 전선으로 와서 지친 전투 부대를 후방으로 배치하여 휴식을 취하도록 하며 중부집단군 예비부대인 12, 19, 20기갑사단을 41기갑군단에 증원, 하르페는 돌출된 소련군 선봉 부대들을 각개 포위하여 섬멸하게 됩니다.
마침내 12월 14일 늦은 밤, 주코프는 정식으로 소련군의 탈출을 허가하였으나 간신히 확보한 탈출구에서도 하르코의 집중 포격과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 예하 기갑척탄병의 맹렬한 공격이 가해지게 되어, 결국 화성작전에서 독일군은 사상자 4만 명을 기록한 반면, 소련군은 33만 5천 명의 사상자와 정예 전차군단 6개가 와해되며 1852대의 전차 손실, 대부분의 중장비들이 독일군에 노획되는 대패를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참패 이후, 여전히 모스크바에서 18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의 르제프 돌출부를 장악하고 있던 중부집단군은 남부 방면에서 올라오는 소련군과 북부집단군의 보급 거점인 벨리키예 루키를 탈환한 소련군에 전면 포위될 위험에 처하였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9군 전체와 4군의 절반을 르제프 돌출부에서 빼내어 전선을 축소시키는 중부집단군의 퇴각 작전을 승인하게 됩니다.
모델에게는 9군 예하의 25개 사단 (장교 8691명, 군무원 2325명, 부사관 57083명, 병사 256825명)과 독일군에 협조했다는 죄책으로 보복당할 것이 확실시되는 소련 주민 6만 명을 3주 동안에 탈출시켜야 하는 중책이 주어졌습니다, 2월 4일, 모델은 들소 작전을 총괄하기 위한 특별 참모진을 구성하고 무선 통신을 엄금하며 오직 유선 전화로만 연락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특별 참모진의 첫 번째 임무는 벨리시와 키로프 사이에 새로운 방어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200km의 주 철수로의 신설과 함께 소그룹으로 이동할 피난민을 위한 600km의 예비 철로 및 도로가 부설되었고, 군수품 및 야전 식량 배급소, 의무 및 수의 구호소가 설치되었습니다, 200개 이상의 열차가 10만 톤의 물자를 수용했고 1만 톤 이상의 수송 차량이 집결하였습니다, 공병 부대는 작전 막바지에 1,000km의 철로와 1,300km 가량의 전화선과 전선을 철거 및 파괴하였습니다.

3월 22일, 29000명의 공병이 7주 동안 요새화시킨 폭 100km의 방어 진지에 병력, 장비를 무사히 온존시킨 9군과 4군이 도착하면서 들소작전은 성공리에 완수되었고,. 중부집단군은 530km의 광대한 전선을 200km로 축소하면서 15개의 보병사단, 3개의 기갑사단, 2개의 차량화사단, SS 기병사단을 예비 부대로 확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공으로 4월 2일, 모델에게 곡엽 검 기사 철십자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1943년 7월 5일, 모델의 9군은 쿠르스크의 북방 공세를 맡아서 오룔에서부터 남하하여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방어선을 공격, 이를 양단 직전까지 가며 독일군의 손실을 압도하는 피해를 입혔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작전 목표인 쿠르스크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전투 개시 일주일 만인 7월 12일 소련군의 쿠투조프 작전에 의하여 오렐의 사령부에 주둔 중이었던 2기갑군이 공격당하면서 급히 회군하였다.
쿠투조프 작전은 오렐 탈환과 소련군 입장에서 철천지간 원수인 9군을 궤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던 것이나 모델은 9군뿐 아니라 2기갑군의 지휘권까지 인수하여 오렐에서 후퇴하는 헤릅스트라이제 작전을 개시하게 됩니다.


전략적 측면에서도 모델이 지휘하는 9군은 소련군 전략 예비대의 거대 부분을 약화시켰고, 덕분에 중부집단군은 5개 기갑사단을 비롯한 19개 사단을 가용 병력으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령관 이하 9군 장병 전원은 7주 동안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용전을 펼쳤으며, 특히 전장의 폭이 400km까지 확장된 상황에서도 모델은 이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끊임없이 최전선을 오가며 시간 단위로 직접 공군 폭격 지시를 내리고 예비대 투입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운용하는 등 지휘관으로서 천재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 하게 되었습니다.



1944년 1월, 갑작스레 늑대굴로 호출되어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모델은 긴급히 방어선을 재편성하였고, 특히 방패와 검 작전을 입안하여 총통의 승인을 받습니다.
특이한 것은 그동안 히틀러 앞에서 후퇴라는 단어를 꺼내면 모조리 해임당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모델은 작전안에 후퇴를 가능한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물러서서 전력을 추스르다가 적의 허점을 보이면 그대로 공세로 전환하여 재점거한다는 적극적인 전법임을 강조하여 히틀러의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모델의 북부집단군 사령관 부임 첫 번째 명령은 16군 예하 사단의 공병 부대들을 차출하여 판터 라인을 제대로 된 방어 진지로 구축하는 것이었으며, 이번에도 OKH의 쿠르트 차이츨러 참모총장과 히틀러에게 들키지 않고 진행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독일 북부집단군은 소련군에 5배가 넘는 피해를 안기며 무사히 퇴각하고, 판터 라인에 도착하여 레닌그라드 전선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1944년 3월 이 공적으로 모델은 원수로 진급하였습니다.


1944년 3월 말, 남부집단군 사령관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전략적 후퇴를 받아들이지 않는 히틀러에 의해 파면되었고 그 뒤를 이을 후임자로서 모델이 임명되며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으로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1944년 6월 22일 소련의 하계 대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되었고, 이 공세는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이 아니라 중부집단군을 겨눈 것이었습니다.
6월 28일, 모델은 중부집단군 사령관까지 겸임하며 실질적으로 혼자서 동부전선을 책임지다시피 하였습니다, 당시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전선이 사라지고 거대한 구멍이 생겨난 지옥 같은 상황에서 쉴새없이 밀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델은 그렇게 무너지던 동부전선의 독일군을 체계적인 군대로 재편성하고, 어떻게든 전열을 유지한 채 퇴각하며 엷은 방어선을 거듭 만들어내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의 진격 한계점을 포착하여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근교에서 특유의 파쇄공격으로 알렉세이 라드집스키의 제2근위전차군을 궤멸시키고 소련군을 50km나 후퇴시키며 다시금 견고한 전선을 새롭게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공적으로 모델은 독일 제3제국 최고의 훈장인 다이아몬드 곡엽검 기사 철십자장을 받으며 동부 전선의 수호자라는 별명까지 갖게 됩니다.


그는 1944년 8월, 서부전선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부상에서 복귀하자 B집단군 사령관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모델이 총사령관에 부임하기 전의 서부전선 독일군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싸워왔으나, 룬트슈테트와 달리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하는 그의 모습은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된 상황에서조차 장병들의 사기를 고조시켰고, 총통 직할 명령들을 교묘하게 무시하고 하인리히 힘러의 개입을 배제하며 B집단군과의 연계 지점에 증원 부대를 투입하여 결과적으로 G군집단 18만 5천 명이 무사히 퇴각한 것은 노르망디 상륙 당시 거듭 혼선을 빚었던 서부전선 지휘 체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1944년 9월에는 영미 연합군의 마켓 가든 작전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재편성 중이던 빌헬름 비트리히의 제 2 SS기갑군단을 즉시 투입하고 3시간 만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아른헴을 방어하고 작전을 분쇄하는 데 공훈을 세웠습니다, 제 9 SS기갑사단 사단장 대리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2류 부대를 동원하여 연합군 정예 부대를 막아냈기 때문.'이라고 회고하였으니 그야말로 발터 모델이 방어전의 1인자임을 공고히 한 전투이며, 특히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패전만 거듭하던 독일군에게 있어서 최초의 승리였다고 합니다.

이어서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명장 오마 브래들리와 코트니 하지스가 지휘하는 미군의 진격을 막아냄으로서 독일 국방군 중 유일하게 연합군 측의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미국의 오마 브래들리에게 승리를 거둔 장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아르덴 대공세의 초반에는 히틀러와 요들의 작전안에 명시된 공격 시간 11시를 새벽 5시 30분으로 변경하고, 안개 속 적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틈을 타 미리 정해진 목표에 효율적인 포격과 동시에 고사포 진지에서 전조등을 비추어 보병의 돌격로를 이끌어내고, 일몰 후에 전차를 투입하여 전과를 확대시키는 만토이펠과 모델의 새로운 작전안으로 기습에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제공권이 완전히 연합군 측에 있었기 때문에 하늘이 맑게 개인 12월 23일에 진격 속도가 둔화되었고, 이날 모델은 알베르트 슈페어와 크렙스에게 작전이 실패하였음을 명시적으로 알리고 히틀러에게 공격 중단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너무 늦어 팔레즈 포위망에서 탈출시키고 서부 전선의 기적을 통해 간신히 지켜낸 B집단군의 정예 병력과 장비, 연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1945년 2월 13일, 영국 공군의 드레스덴 폭격 당시 발터 모델은 드레스덴의 자택에 거주하고 있던 아내와 딸의 생사를 알 수 없었기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2월 16일, 히틀러의 호출을 받고 베를린의 작전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 모델은 가족의 행방을 찾기 위해 잠시 동안 드레스덴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허가를 구하였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하였고, 모델은 부관인 테오도르 필링 대령을 드레스덴으로 보내었고, 필링 대령은 모델의 아내와 딸을 구출하여 뮐하우젠에 위치한 친형 오토 모델의 집으로 피신시킵니다.


1945년 3월, B집단군은 루르 공업 지대 사수를 명령받았으나 레마겐의 철교를 탈취한 미군은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하고, 루르 포켓 작전을 성공시키며 완벽한 제공권을 활용하여 루르 일대를 폭격 합니다, 모델은 포위망의 완성 전에 보유하고 있던 전차로 역습을 가하여 미군 3기갑사단장을 전사시키는 등 탈출구를 확보하고, 휘하 전 병력을 마르부르크 방면으로 탈출시키려 했으나 히틀러로부터 후퇴 불가 현지 사수 명령만이 반복되면서 결국 루르에 전군이 고립되고 맙니다, 모델은 텔레타이프와 항공편을 통해 서부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과 히틀러에게 몇 차례나 후퇴 의사를 타전했지만 그때마다 거부되었고 4월엔 휘하 참모인 빈리히 베어 소령과 귄터 라이히헬름 대령을 포위망에서 탈출시켜 베를린의 총통사령부에 출석하게 만들어, 직접 히틀러에게 B집단군이 처한 상황을 보고하고 다시금 허가를 구하였으나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한 한스 크렙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시도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모델에게는 연합군의 손에 넘어갈 것을 대비해 루르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전해지나 모델은 제국 군수부 장관 슈페어와 처음부터 협력하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전투 손실마저 최소화하여 독일 산업 지대의 7할을 차지하고 있던 루르를 지켜냅니다, 그런 그에게 미군의 매투 리지웨이 소장이 개인적인 서한을 보내어 남북전쟁의 명장 로버트 리의 예를 들며 항복을 권고하였지만, 하지만 모델은 패장들은 독배를 마셨다며 이를 거절합니다.
같은 날인 4월 15일, 국민돌격대라는 이름 하에 훈련도 받지 못하고 총을 손에 든 유소년들과 노년층으로 구성된 부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부하고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 서류는 합법적인 것이니 만일 탈주병으로 체포되거나 미군의 포로가 되거든 제시하도록 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라는 최후의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4월 17일 아침을 기점으로 B집단군의 해산은 명령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장병들에게는 3개의 선택지 1. '항복' 2. '집이 가까운 자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사복 차림으로 귀가' 3. '포위망을 탈출하여 중부 독일 방면의 아군과 합류' 가 주어졌고 장교나 노련한 부사관들이 병사들과 동행하여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이 날, 루르 전역의 모든 전투가 종결되었고 미군에 항복한 포로는 32만 명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있었습니다.
이후 모델은 탈출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만난 발터 막시이너 하사와 어린 병사들이 고위 장성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에 놀라자 모델은 병사들의 이름, 고향, 군 경력을 일일이 물어보며 '집으로 돌아가게. 우리들의 전쟁은 끝났어.'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두와 악수를 나누며 '귀로에 행운을 비네.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청년이 되어 달라고 전해주게.'라고 말했다고 막사이너 하사는 기록하였습니다, 적어도 이 순간의 모델 원수는 전선에서 직접 장병들을 지휘하고 독려하던 평소의 모습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4월 20일 밤, 뒤스부르크 인근 라팅엔 숲에서 모델은 해산 명령 이후에도 동행한 참모들과 함께 국방군 라디오 채널에서 송출하는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한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괴벨스는 서부전선의 독일군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상황에서도 비밀 신병기가 최후의 승리와 독일의 황금기를 가져올 것을 부르짖었고, 영미 연합군에 항복하는 민간인들을 비판하며 '루르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어조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 어이없는 내용에 다들 할 말을 잃은 가운데 모델이 침묵을 깨고 이 말을 하였습니다.
"진정으로 내가 범죄에 종사해 왔음을 믿게 되었네. 나는 양심적으로 부하들을 이끌었지… 하지만, 범죄 정권을 위한 것이었어."
휘하 장교들에게도 정치적인 발언을 자제할 것을 몇 번이나 당부하였던 모델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밝힌 말이었습니다.

1945년 4월 21일, 종전 이후 모델은 빈리히 베어 소령을 긴히 불러 함께 오솔길을 걸으며 친필 편지와 결혼반지, 소지품이 담긴 봉투를 건네었t습니다. 귀관의 실력과 경험이면 해 낼 수 있을 테니 이것을 자신의 아내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에, 모델의 그러한 최후를 원치 않은 베어는 함께 살아남을 것을 간청하였고 몇 분의 침묵 끝에 모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베어,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군. 육군 원수로서 조국에 승리를 가져올 수도 없었고 수백 수천이 넘는 부하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내가 이 숲 밖으로 걸어 나가 몽고메리, 혹은 미군 앞에 서서 '내가 모델 원수다, 항복하겠다.'라며 두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
다시금 베어는 포위망에서 탈출할 희망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설득하였고, 모델은 신중하게 최악의 결말을 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오솔길 밖으로 나와 일행들과 합류한 뒤 베어는 식량을 구하고 탈출 루트를 모색하기 위해 뒤스부르크 방면으로 정찰에 나서겠다고 제안하였고 모델은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정오 무렵 귀환한 빈리히 베어에게 필링 대령과 미하일 중령이 모델 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작성자의 총평: 발터 모델은 덕장으로 지휘하던 사단들이 모델이 있는 것으로도 사기가 올랐으며, 그로 인해 모델이 얼마나 덕성과 인지도가 높은 지 알 수 있었으나, 참으로 안타깝고 비운의 죽음을 맞은 장군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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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 꺼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