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500년경에 라가쉬와 움마는 그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야인 구에딘에 대한 경계선과 관개 수로 사용권을 놓고 충돌하였음


이에 키시의 왕 메실림이 중재자 역할을 하여 밭을 재어 라가쉬와 움마의 경계를 새로이 정립하고 그것을 표시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최종 결정문이 적힌 비석을 세웠음. 하지만 움마는 이 경계조약으로 라가쉬가 혜택을 받는 것을 부당하게 느꼈고, 결국 후대의 움마 왕 우시가 기둥을 파괴하고 비석을 뜯어낸 다음에 라가쉬 평원으로 진격했음


이에 라가쉬의 왕인 에안나툼도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음. 들판에서 양측이 마주치자 에안나툼은 전차에서 내려 부하들을 이끌고 도보로 나아갔음. 창을 내린 라가쉬 군대는 움마의 밀집한 팔랑크스 부대로 큰 전투망을 펼치며 진격하였음. 결국 이 야전에서 움마의 왕 우시는 3600명의 군사를 잃는 큰 패배를 당하고 수도 움마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붙잡혀 사형에 처해졌음


이후에 우시의 뒤를 이러 움마의 왕이 된 에나칼레와 라가쉬의 왕 에안나툼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고, 갓 합의된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깊은 운하를 파서 두 개의 비석, 즉 전에 있었던 메실림 비석과 새로 조각한 비석을 세웠음. 선서와 신전의 건립으로 밀봉된 조약에는 완충지로써 의도된 '소유자 없는 땅'의 설치도 포함되었고, 움마가 라가쉬를 침입하지 않겠다는 약조가 있었음. 그리고 라가쉬로부터 차관으로 접근한 구에딘 지역의 움마 보리를 모두 이자로 취급하는 등 구에딘 지역을 움마가 사용할 수 있지만 임대료를 지불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 되었음. 그러나 움마는 안정적으로 돈을 갚지 못했음. 또한, 에안나툼의 승리로 움마가 라가쉬의 간섭을 받게 된 이후 움마의 사람들은 니나 여신과 잉구리사 신의 금고에 일정량의 곡식을 지불해야 했음


움마가 라가쉬로의 곡물 지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에나칼레의 아들인 움마의 왕 우르룸마는 불만을 품고 에안나툼의 형인 에난나툼 1세가 라가쉬의 왕이 되었을 때 군대를 이끌고 라가쉬를 침공하여 에안나툼의 비석과 그 옆에 있는 신들의 사당을 불태우고 에난나툼에게 승리를 거두고 라가쉬를 점령했지만 몇 번의 전투 끝에 에난나툼이 우르룸마를 물리치는데 성공했음


그 후 에난나툼의 아들인 엔테메나가 라가쉬의 왕이 되었을 때, 우르룸마의 조카이자 사제왕인 움마의 왕 일은 닝기르수의 경계 채널과 난세의 경계 채널에서 물을 빼돌렸고 이에 엔테메나가 움마에 사절을 보내자 움마의 왕 일은 닝기르수와 난세의 경계 채널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경계선을 안타수라에서 에딤갈라브즈로 옮기겠다고 하고 라가쉬를 침공하였으나 라가쉬의 왕 엔테메나와 평화동맹조약을 맺은 우루크의 왕 루갈키니셰두두의 도움으로 움마의 왕 일은 엔테메나와의 전투에서 패했음


그러나 엔테메나의 아들인 에난나툼 2세가 왕이 되었을 때 움마의 왕 일은 다시 라가쉬를 침공하였고, 결국 움마의 왕 일이 승리함으로써 우르난셰가 세운 라가쉬 제 1왕가를 종식시켰음. 그 뒤에 라가쉬의 최고종교지도자인 에넨타르지가 라가쉬의 왕위를 잇게 되지만, 기원전 2350년경 우루카기나가 라가쉬의 왕이 되었을 때 움마의 왕 루갈자게시에게 라가쉬가 함락되어 라가쉬 제 1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음. 그리고 루갈자게시는 수메르 전역을 통합했지만 아카드의 사르곤 대왕에게 계속 패전하였고, 결국 움마는 아카드 제국에 합병되었음


기원전 2500년경에 시작된 라가쉬와 움마의 국경분쟁은 약 150년간 지속되다가 두 왕국의 멸망으로 종결된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