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걍 어그로임 ㅈㅅㅈㅅ

 

잉벌노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처음 등장함.

糓壤縣, 本髙句麗仍伐奴縣, 景徳王改名. 今黔州.

곡양현(穀壤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검주(黔州)이다.

 

고구려/신라 시대에 당연히 이 지역을 [ingbulno]라고 읽었을리는 만무하고...

다수설은 [잉벌노]를 [늠내]라고 읽었으리라고 추정.

이유는 잉(仍)이 "느"의 음차이고+벌=ㅂ,ㅁ 음가+노(奴)는 지역임을 나타내는 어미(~홀 같이) 정도로 해석해서, 늠내라고 읽는다고 함.

 

하지만 최근에 '시흥군읍지'(1989년 출간...!) 에서 본 내용인데, 잉(仍)은 "너"의 음차이고, (실제로 사투리로 느/너 음가가 무너지는 경우는 많긴 하고...) 실제로 잉박선, 완도군의 넙도(芿島) 등으로 음차한 사례들이 있음. 그러면, 잉=너/넙 + 벌='ㅂ'음가로 보아도 넙이랑 상통함 + 노 해서 [너부노] 내지는 [너부내]라고 읽을 수 있다는 주장이 있더라고. [늠내]라고 읽는 주장 역시 19세기~20세기 초에 주장된 내용인가 그랬음. 조선시대 와서는 이미 [늠내]라는 지명은 사어화 되었겠지.

 

곡양 역시 곡(穀)이 곡식이니까 "낟"으로 읽을 수 있고, 양(壤)은 지명을 나타내는 거니까 별 의미 없는 음가라고 치면, 역시 "느/나"가 들어가는 건 분명해 보이나... 穀=늠으로 쓰는 사례가 있나 해서 찾아보면 그런건 잘 안보임;;

 

심지어 고려시대 이름인 금주(衿州)=검주(黔州) 역시 뭔가 음차인 것 같은데... 어디선가는 소매처럼 넓은 땅이라서 금주라고 붙였다고 써 놨는데 이건 그냥 현대에 사후적으로 의미 붙인 걸로밖에 안보임. 조선시대 지도 보니까 시흥관아 뒤에 '금지산'이 있는데... 이거랑 연관있는 걸까. '시흥' 역시 이미 興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토속적/전통적 지명이 아니라 중앙정부/지역관리가 의미 좋으라고 붙인 이름에 불과함. 넓게 뻗어 가는 땅? 그럼 듣기 좋게 시흥이라고 써도 되겠네~ 하는 식ㅋㅋ 실제로 우리 나라 지명 중에 유교 꼰머들이 지네 사상 대로 이름 바꿔버린 경우가 부지기수임.

 

지명의 복원 영역이 거의 국어학자들의 뇌피셜 잔치라서 정답은 없음. 자 여기서 내 뇌피셜 들어감. 

어느 쪽으로 읽든, "느/너"+"ㅂ/ㅁ"+"노/내" 정도로 읽는 건 거의 기정 사실인 것 같음. 일단 '늠내'라는 다수설 말고, 넙벌내/넙부내 정도로도 읽힐 수 있다라는 가설을 열어 놓겠음. (실제로 음가 차이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신기하게도 광명시에는 '너부대'(한자 음차로는 광廣화火대大)라는 지명이 있음. 그냥 '넓은 벌판'이라서 생긴 우연이라고 하기엔 다른 지역에서는 없는 지명이긴 함. 그래서 내 생각에는 현재 원광명 일대가 고구려 시대의 '잉벌노'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듦. 고구려 잉벌노≠신라 곡양일 수도 있는 거고(예컨대 신라에 우호적인 옆 마을로 관아를 옮긴다던지, 구 잉벌노 지역에 물난리가 나서 비교적 규모가 큰 옆 마을로 옮긴다던지 등등 이런건 비교적 근대 시기에도 발생한 사례들이 있으니깐...) 

다만, 호암산 한우물에서 '잉벌내~~' 라고 써 있는 동수저가 발견되었는데 8세기 경 유물이라고 함. 근데 호암산성 자체도 통일신라, 내지는 나당전쟁 때 유적이라고 보고 있어서, 산성을 지으면서 일대에 군사적 요충지가 생겼으니 마을이 더 발달했을 수도 있고 그래서 관아지를 현 시흥동 일대로 옮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봄. 관아를 옮겼는데 왜 옮긴 지역도 '잉벌노'냐고 부르냐라고 따지면, 조선시대 때도 이미 관아는 멀리 옮겼는데 지명은 그대로 쓰고, 원래 관아 있던 지역을 古OO으로 이름 붙이는 경우가 있음. 대표적인게 고양주(현 광진/잠실 지역)... 

 

믿던지 말던지 결론은 내 뇌피셜임. 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