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광주유수부는 임금이 피신을 하던 남한산성이 있는 곳이라 소금을 운반하기 위해 바닷가까지 직통 루트를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어서 저렇게 광주부가 청계산줄기를 넘어서 저멀리 반월까지 이어져있었고 그 루트로 고갯길이 형성이 되었다고 함. 그리고 전근대에는 평지길이나 산길이나 걸어가야 되는 건 매한가지라서... 저 정도의 산을 고갯길로 왕래할 수 있으면 전근대까지만 해도 저렇게 골짜기 윗부분만 모아놓은 웃기는 행정구역이라 해도 비합리적이진 않았던 것으로 보임. 그리고 나중에 광주군의 땅거스러미들을 다른 곳으로 넘기는 과정에서 일제가 귀찮았는지 그냥 그 골짜기들을 통째로 의왕면으로 묶어서 수원군에 주게 됨... 물론 이 때도 대부분의 백성들은 걸어다니던 시절... 그러다 나중에 그걸 다시 시흥군에 줄 때도 이미 면 조직 다 있고 그럭저럭 잘 운영하는 걸 갈아엎고 새로 짜긴 귀찮았는지 그 웃기는 걸 쪼개서 옆에 안양이나 남면(후에 군포시가 되는 곳) 줄 생각을 안 하고 의왕면은 그대로 유지가 되었고 물론 그때도 걸어다니던 시절... 여기까지가 들은 이야기임.


물론 80년대 쯤 되면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차를 끌고 다닐 시기라 상황이 많이 다름. 차로 가는데 평지길이 산길보다 며츄배는 편한 건 당연지사. 이때쯤 되면 시흥군의 잔해들을 어떻게 정리하느냐 말이 많이 나오는데 그렇게 기형적으로 생긴 읍면인 줄 알면서도 정이 들었는지 다른 시에 흡수당하는 건 싫었나 봄. 그렇게 번듯하게 의왕시가 돼버리면서 돌이키기도 어렵게 되었고... 나중에 평촌신도시 건설 이후로 도시러서의 안양의 자체적인 시가지 확장이 이루어지면서 의왕시에 걸치게 돼버렸고 그때서야 이 행정구역 참 뭐같다는 쓴소리가 지덕 이외의 사람에게도 나오게 되지.


정리하자면 걸어다니던 시절에는 딱히 안양 쪽으로 집어넣지않았다고 더 불편하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그게 하필 교통 상황과 도시 발전 상태가 크게 달라진 때까지도 유지가 돼버리니 병맛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