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금촌 특집으로 좀 길게 간다.


일단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금촌일대는 크게 교하군 현내면과 아동면으로 나뉘어져 있었어.


 


*교하군 현내면(검산동 / 맥금동 / 금릉동 - 금촌3동 서부 / 금촌택지지구)

*교하군 아동면(아동동 / 야동동 / 금촌동 - 금촌1동 / 금촌 로타리 지역 / 금촌3동 동부)


당시 교하군 아동면은 관아가 있어서 아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닉넴썰과 다르게 관아는 없었어.

왜냐고? 관아 그러니까 교하군청은 영조 때 이미 지석면(현 교하동)으로 런-해버렸거든. 

즉, 1800년대 교하군 아동면은 그저 교하군을 이루는 하나의 변방지역에 불과할 뿐이었지.

그리고 그 변방지역에는 새말이라는 자연부락이 하나 있었어.


1900년대 대한제국에는 경의선이 건설되고 이때, 자연부락 새말에도 경의선 기차역이 설치가 돼.

그러나 새말을 쇠말로 잘못들은 일본인 조사원의 실수로 기차역은 금촌역이 되어버리지.

훗날 파주라는 동네의 중심이 될 이름치곤 꽤나 허무한 탄생이야.



* 현재 금촌택지지구 로데오 상가와 주공 1단지, 3단지 일대. 

과거 장삿배가 오르던 쇠곶나루가 위치했던 곳으로 금촌역이 들어서기 전까지 아동면의 상업중심지였다. 


무튼, 금촌역이 생기자 일개 변방이었던 아동면은 교하군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새말... 그러니까 신금촌도 금촌장이 개설되는 등 동네 자체가 활기를 띄지.

물론, 이전까지 해운으로 발달한 공릉천 근처 동네들은 장을 폐지하는 등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1914년 일제는 부군면 통합을 시행하지.

이때 교하군도 폐지되어 파주군에게 합병되고, 아동면도 파주군 아동면으로 간판을 갈고 인근 동네를 먹으면서 현 금촌일대와 비슷한 판도를 갖추게 돼.


*교하군 아동면(아동리, 야동리,  신금촌)

*파주군 아동면(금촌리, 아동리, 야동리, 검산리, 맥금리, 금릉리, 등원리) - 훗날 등원리는 조리면에게 돌아감.


그러나 아동면은 교하군 시절처럼 크게 발전은 하지 못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바로 문산면이 존재했고 바로 옆동네인 조리면에도 봉일천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야.

아무리 장이 발달한다 했어도 경기북부의 네임드 장인 문산장과 봉일천장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어.

결국 이 둘에 치인 아동면은 일제강점기 내내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게된다.

물론, 존버하면 기회는 온다고 도시일생일대의 기회가 왔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돼. 

그 결과 옆동네 장단군은 반으로 갈라져 그레이트 파주-의 일원이 되어버리고

많은 장단시민들은 아동면으로 내려와 새로운 기틀을 잡게 되지.

이 때 많은 인구가 몰린 아동면은 조리면을 꺾고 파주 남부의 중심동네로 부상하지.

게다가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문산에 있던 파주군청도 바로 코앞에 북한이 있으니

고개를 절레절레하면서 탈문산하여 아동면에 정착해버려.

그리고 미군기지가 문산과 조리에 크게 정착하면서 두 동네가 크기를 키울 수 없는 것도 한 몫 했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문산과 아동면의 운명은 뒤바뀌었다고 할거야...



*금촌리를 파주의 중심으로 만들게 한 일등공신 금촌역.

금촌역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금촌리가 파주의 중심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산과 조리를 꺾고 파주의 중심이 된 아동면.

하지만 아동면의 성장이 곧 아동리와 새말의 성장은 아니었어.

경의선 개발 이후 아동면의 성장은 어디까지나 금촌역 남부의 성장이었어.

금촌의 기원이라 볼 수 있는 자연부락 새말은 오히려 금촌이 발전하는 시기 나환자촌으로 여겨져.

그래서 금촌 거주민은 물론이고, 모든 파주시민들이 기피하는 장소가 되었지.

아동리 또한 군기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발전을 못했지. 그 결과 금촌역과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낙후된 농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파주시 아동동(옛 아동리)지역. 금촌동(옛 금촌리)과 바로 이어지는 동네이지만, 

미군PX와 군부대 주둔으로 인해 지금도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 금촌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한 새말지역(주택지역).

같은 금촌리로 묶여있었지만, 신금촌과 다르게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최근, 새말지구로 편성되어 재개발이 예정되어있지만, 신금촌지역에 비하여 많이 늦은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