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서 고구려 개마무사와 소련군 보병에 대해 질문하는 글이 있기에, 참고할 만한 사례를 하나 가져와 봤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8991&cid=59016&categoryId=59023 - 네이버캐스트 줄루전쟁(9): 이산들와나 전투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9193&cid=59016&categoryId=59023 - 네이버캐스트 줄루전쟁(10):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


줄루 전쟁은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신이 되는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와 줄루족 간에 벌어진 전쟁임. 최종적으로는 당연히 영국이 이겨서 줄루 왕국이 멸망하긴 했지만, 개전 직후 첫 전투인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영국이 본대가 전멸하는 참패를 당해버리는 바람에 체면을 구겨버리는 참사가 발생했음.


우선 당시 영국군 보병의 주력무장은 후장식 단발 소총인 '마티니-헨리 소총'. 따로 탄창이 없으며, 약실에 직접 탄약을 탄피채로 장전해서 쏘고, 레버를 내리면 자동으로 탄피가 튕겨나오며 새 탄약을 장전하는 식으로 사용함. 분당 12발의 탄을 발사할 수 있고, 유효사거리는 370미터. 방어구는 레드코트라는 이명답게 새빨갛게 염색한 간지나는 코트를 입었는데, 방어력은 지금 이걸 읽고 있는 본인이 입고 있는 봄가을용 천옷 정도라고 보면 되겠지. (사실 영국군엔 당연히 보병 외에도 포병이나 기병도 있었지만, 먼저 글에서 보병에 대해 논했으니 일단 지금은 보병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음)


한편, 줄루군의 무장은 쇠가죽으로 만든 방패와, '이클와'라고 부르는 창날과 자루 합해서 90cm쯤 되는 단창, 그리고 투창이 주로 쓰였음. 이산들와나 전투 이후로는 영국군에게서 노획한 소총도 사용하긴 하지만, 정확한 사용법은 잘 몰랐던 모양임.


먼저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2천 정도 되는 영국군이 2만명 가량의 줄루족 전사들(보병)에게 개활지에서 기습당해서 전멸당했음. 영국군 지휘관은 국뽕에 취해서 "우리 대영제국이 저런 미개한 흑인들에게 질 리가 없다"며 무턱대고 지리도 잘 모르는 개활지로 병력을 진군시켰고, 결국 줄루족 전사들의 포위기습에 의해 영국군 본대가 전멸하는 대참사가 발생함. 이런 식으로 기관총 등의 자동화기가 없던 시절의 유럽 군대는 냉병기로 무장한 훨씬 더 숫자가 많은 원주민들에게 압도당한 경우를 꽤 자주 찾아볼 수 있음.

이산들와나 전투 직후 벌어진 로크스 드리프트 전투에서는 양상이 조금 다름. 150명 조금 못 되는 영국군이 3천명 이상의 줄루군에게 습격당했는데, 작은 병원 건물과 옥수수 부대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버틴 결과 줄루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했음. 영국군의 피해는 17명 전사, 15명 부상에 그쳤고, 줄루군은 거의 1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사상당하는 대패를 했음.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이 두 전투를 비교해보면,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방어진지의 유무. 이산들와나에서는 영국군에게 수적 열세를 커버할 만한 방어시설이 없었음. 오만한 영길리 지휘관은 개활지에 부대를 방치했고, 정찰도 제대로 안 했다가 결국 부대가 전멸하는 대참사를 겪게 됨.  원래 케이프 식민지를 개척한 보어인들은 다수의 원주민들과 개활지에서 싸울 때는 마차나 수레 등으로 임시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싸워서 원주민을 몰아내곤 했는데, 영국군은 이런 전술을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았음.


반면, 로크스 드리프트에서는 줄루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지휘관들이 주둔지의 요새화부터 시작했음. 물론 요새화라고 해봐야 수레를 밀어서 세우고, 탄약상자와 식량포대를 쌓아 벽을 만드는 정도의 그야말로 임시변통이었지만,  그 정도 수준으로도 결국 20배가 넘는 적에게 포위당하고도 무사히 공세를 막아내고 살아남는데 성공했지. 적절한 방어진지의 구축여부가 전투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이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사례지.


이후에도 한동안 영국군은 수세에 몰려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마차 등으로 요새화한 임시 진지가 큰 효과를 발휘하며 몇차례 줄루군의 공격을 막아낸 이후에는 전세가 뒤집혔고, 결국 영국의 반격으로 줄루 왕국의 수도인 울룬디가 함락당하고 줄루 왕이 체포당하며 줄루 왕국은 멸망하며 줄루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음. 줄루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있어 케이프 식민지에서는 영국의 간섭을 거부하는 식민지 보어인들과 영국 사이에 보어 전쟁이 발발하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이니 생략.


위에서 살펴본 줄루 전쟁의 경우는 보병 vs 보병의 결과이므로 먼저 글에서 논한 다수의 기병 vs 소수의 보병의 경우와는 직접적인 비교가 안 될수 있음. 다만 보병간의 전투에서도 화기로 무장한 군대가 숫자로 압도당하는 경우에 의외로 무력하다는 사실과, 그러한 수적 우세를 적절한 방어진지의 구축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은 두 가지 경우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음.


ps. 이와 비슷한 사례로 후스파 전쟁때 얀 지슈카가 훈련이 부족한 민병들을 데리고 마차로 진지를 구축하여 중무장한 기사들에게 승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