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선교사가 살핀 조선 천주교사

 

H.B 헐버트 (Homer Bezaleel Hullbert, 한자명: 흘법)

1863 - 1949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 묘지, 국가보훈처 블로그)

 

다시 보아도 참 무시무시한 말이군요.

 

대한제국멸망사(원제: The Passing Of Korea)코리아패싱?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6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집문당에서 펴낸 책의 목차를 보면, 헌사나 역자 머리말(->헐버트의 삶), 그리고 후손의 감사가 있습니다. 책이 500쪽이 되는데, 얇게나마 다루고 있는 범위가 넓습니다. 고대사에서 근대사까지, 화폐, 건축, 운송, 무역, 오락, 문학, 음악과 시, 언어, 기념물, 유적, 민담과 속담, 여성 지위, 노예 제도 그리고 매장 풍습까지 책에 넣었습니다. 종교와 미신 부분도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풍습, 그러니까, 무당 굿, 오행, 정화수, 용왕제, 점치는 법, 풍수지리 지관 따위를 소개합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근대화와 장래에 대해서 결론을 내고 - 미국 시민들이여! 일본 편을 들지 말고, 한국 편을 들자! - 책을 끝마칩니다.

 

(주석은 임의로 달면 *표시 하겠습니다. 역주자 주석을 옮기면 # 표시하고, 역주가 길면 요약해 줄여서 쓰겠습니다. 한자는 생략함. 알파벳은 가능한 넣겠음.)

 

제7장 병자호란과 초기의 가톨릭

 

(병인박해 당시를 묘사한 기록화)


 

만주족, 병자호란, 하멜표류기 앞에서 길게 언급...

한인들이 남경에서 로마 가톨릭계의 선교사들을 만나서 미미하게나마 기독교의 교리를 배운 것을 논외로 한다면 17세기 후반기에 일어난 일 중에서는 특기할 만한 것이 없다.

...국세조사, 당쟁 잠깐 언급...

한국 측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으로 외국인들이 입국하여 기독교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686년이라고 한다.(#이전에 이미 1594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포르투갈의 신부인 세스페데스가 고니시 부대의 종군 신부로 웅천에 도착하여 고아들을 구제했다.)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중국인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달레가 쓴 유명한 기록에도 조선에서의 로마 가톨릭교회사에 관한 언급이 없어서 오히려 더 그 이해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1874년 조선교회사, 달레는 포교보다 문필로 유명했고, 조선에 방문한 적이 없다. 조선에서 포교하던 다블뤼가 보낸 자료를 토대로 집필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선에서 포교한 적이 없었다면 터무니없이 한국 측의 기록에 그들에 관한 언급이 있을 리도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에 교세는 상당히 퍼져서 어떤 고위 관리들은 왕에게 외국인들을 추방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영조 중흥기로 보이는 내용에 문단 할애...

이때까지도 로마 가톨릭의 비밀 포교는 황해도와 강원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이를 불안하게 생각하자 왕은 발흥하는 교회를 탄압하도록 명령했다. 탄압이란 말로만 금령이었지 참형하는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약간의 위협이 가해졌으리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1776년의 국세 조사에 의하면 총인구는 700만 6,248명이었는데 이는 1세기 동안에 230만 명이 증가한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당시의 생활이 번영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구의 증가율은 그 유례가 흔하지 않은 것인데 이는 대체로 오랫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인종(#이는 숙종의 오기임 *숙종 1674-1720 재위, 영조 1724-1776 재위)의 덕이었다.

 

학자였던 권철신이 무리를 모아 기독교의 교리를 연구하기 위해 입산한 것은 약 1780년 경이었다. 그들은 오직 단 한 권의 기독교 교리서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모두가 개종했다. 이 무렵에 다른 한 청년(#윤유일을 의미함. 1790년이며 그에게 영세를 준 신부는 구베아 신부가 아니라 프랑스의 로 신부였다.)이 북경에서 프란체스코회의 구베아(Alexandre de Gouvea)를 만나서 영세를 받았다. 그는 귀국할 때에 많은 교리서와 십자가와 성화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종교적인 표상을 가지고 왔다. 오늘날 양근(#지금은 경기도 양평군 일부)은 한국에 있어서 로마 가톨릭의 발상지로 불린다. 1785년에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이 시작되고 왕에게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사람(#양서의 금단을 주장한 유하원을 의미)도 있었다.

 

그 다음해에는 북경에 갔던 한 사신이 귀로에 많은 가톨릭 교리서를 가지고 왔는데 왕이 이를 알고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다. 그 후로부터 조선에 입국하는 모든 사신들의 휴대품을 엄격히 검색하도록 결정했다. 그 해에 또한 콜레라가 전국에 퍼져서 커다란 재난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때에 37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서울에만도 회복된 사람이 8,000명이이라고 하는데 회복된 사람의 수가 이 정도라면, 콜레라의 사망률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당시 서울 인구의 반인 6만 명이 죽었음을 알 수가 있다.

 

1791년까지만 해도 조정에서는 가톨릭교도들을 그다지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교도들에 대한 극심한 탄압은 조상의 신주를 파묻은 두 사람을 처형한 데에서부터 비롯되었다.(#윤지충과 권상연을 의미한다. 이들은 윤지충 모친의 신주를 묻은 것이 아니라 불에 태웠다.) 이 때부터 비롯된 탄압은 그 후로 계속 확대되어 그 해 11월에는 새로운 종교를 믿기에 몰두한 네 명의 고위 관리가 잡혀 처형되기까지 이르렀다.(#이 사건은 신해사옥이다. 4명의 고위관리가 처형당하지는 않았다. 윤-권 양인이 처형당하고 이승훈이 삭직했고, 권일신이 귀양을 갔다.) 그 다음 해에 교황은 조선에 있는 교회의 관할권을 정식으로 북경의 대주교에게 맡기게 되자 즉시 주 페르(Pere Tsiou #주문모를 의미, 1794년 입국, 신부로서 최초로 조선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하다가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 당시에 의금부에 자진 출두하여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라는 하는 신부가 처음으로 조선에 파견되었다.

 

18세기 말엽 정조 때의 눈부신 발전... 활자주조... 문헌 출판을 잠깐 언급

 

19세기가 막을 올리자 조정에서는 가톨릭교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정책을 철저하게 실시했다. 이와 같은 정책의 이유는 외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 그와 같은 정책은 근본적으로 백성들이 어떤 종교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조정에서 유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기된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르고 나자 조정에서는 될 수 있으면 외세를 멀리하지 않고서는 안전할 수가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1801년에 그토록 끔찍스러운 참극(#신유사옥을 의미)이 일어났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약 30명이 죽었는데 그 중에는 두 명의 왕자빈과 주 페르 신부도 들어 있다.(#이 때에 참형당한 은언군 이인의 부인 송 마리아와 그의 며느리 신 마리아를 의미한다.)

 

1810년부터 20년 동안은 참극으로 가득 찼다. 홍수, 페스트, 한해가 연달아 일어났는데 오늘날 조선이 이토록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그 때에 입은 피해로부터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다. 1832년에 영국의 한 함선이 홍주(#지금의 홍성군)에 나타났었는데 그 배의 선장인 홀(Basil Hall)은 왕에게 글을 보내어 통상하고자 하는 뜻을 전했으나 거절당했다. 몇몇 가톨릭교도들이 그 배에 승선했다가 그 함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내세우자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신교도임을 알고서는 급히 내려왔다. 그들이 가져온 몇 권의 책이 왕에게 보내졌으나 왕은 곧 그것들을 돌려보냈다. 이 배에 탔던 사람들 중에서 린제이(H.H. Lindsay)와 귀츨라프(K.Gutzlaff)라고 하는 두 사람은 포교를 위해 입국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홀 선장 Captain Basil Hall : 1788-1844, 영국 지리학자 제임스 홀의 아들, 유구, 일본, 조선 등지를 여행했으며 귀국 길에는 1817년 세인트 헬레나에 들러 유배지의 나폴레옹에게 조선을 소개하기도 했다. 1818 「조선 서해 탐사기」를 남겼다.)

 

(# 귀츨라프 Karl F. A Gutzlaff : 1803-1851, 독일의 선교사. 한자명 곽실렵. 루터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중략... 1832년 한국에 입국하여, 백령도, 군산만의 창선도, 홍주의 고대도 등에 머물면서 감자의 재배를 가르쳐 주고 주기도문을 한자로 번역해 주었다.)

(* 저자가 혼동한 게 아닌가 싶다.)

 


(Karl Gutzlaff, 위키백과)

 

 

이 무렵 교황 그레고리 16세에 의해 조선의 주교로 임명된 브루귀에르(M. Bruguiere)는 북경을 통해 조선에 입국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이 때 그는 이미 조선에 와서 있는 중국인 유 신부(Priest Yu)에 의해 방해를 받고 있었는데 이는 유 신부가 조선에 최고권력을 잡고 싶은 마음에서 브루귀에르 신부의 입국을 저지하려고 애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브루귀에르 신부는 국경에서 기다리기만 하다가 끝내 입국을 못한 채 죽자, 모방(Pierre-PhIlibert Maubant) 신부가 그 대리로 임명되어 1835년에 드디어 입국하는 데에 성공했다. 1837년까지 두 사람의 프랑스인 신부가 더 입국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앙베르(Laurent-Marie-Joseph Imbert) 주교였다. 가톨릭측의 기록에 의하면 이 때 신도의 수는 거의 9천에 달했다.

 

(# 유방제는 정하상의 안내로 1834년 입국하였으나, 브루귀에르 주교의 입국을 방해하여 성무가 정지되었다. 그는 그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안내하여 만주, 몽고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는 훗날 회개하고 귀국하여 신부로 선종했다.)

(# 모방, 1803-1839 :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 1836년 겨울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여 교세 확장에 힘쓰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시켰다. 1839년 충청도 홍주에서 체포되어 한강에서 처형되었다.)

(# 앙베르 :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 마카오, 월남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제 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37년 입국했다. 정하상의 집에 숨어서 포교하다가 수원에서 체포되어 기해사옥-*1839년- 때 한강변에서 순교하였다.)

(# 샤스탕, 1803-1839 : 앙베르를 따라 조선에 입국하여 포교하다가 기해사옥 때 순교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발전은 다음에 올 피비린내 나는 탄압의 시초를 알리는 전조였다. 가가호호마다 감시가 심해지고 3명의 프랑스인 신부가 잡혔으며 그들이 조선으로부터의 출국을 거절하자 반역죄로 지목되어 처형되었다. 이것은 시초에 불과했으며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기질 중의 가장 사악한 측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70명이 참형 당하고 60명 이상이 교살당하거나 장살 당했다. 이 숫자는 박해로 인해 죽은 전체의 숫자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의 10년 동안에 조정에서는 이 밉살스러운 종교를 근절시키는 데에 손을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철저하게 박차를 가했기 때문에 지난날보다 더 심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 정하상 바오로는 정약종의 아들,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이다. 상재상서를 작성했다. 상재상서는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란 뜻으로 우의정 이지연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며, 이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호교론이다. 정하상은 1839년 박해 때 순교했다.)

 

1844년에는 두 명의 또 다른 프랑스인 신부가 폭풍과 격랑으로 모진 고생을 한 끝에 제주도를 거쳐 입국했다.(#필자의 오기다. 1840년대에 제주도를 거쳐 입국한 신부로는 1845년 9월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대건 신부밖에는 없다.) 2년이 지나서 프랑스 정부는 조선에 글을 보내어 3명의 프랑스인이 죽은 것을 힐문하고 이에 대해 응징하리라고 위협했으나 이는 오히려 한인들을 격분시켰을 뿐이었다.(#이 때에 파견된 사람은 Jean B. T. Cecile 해군 소장 세실이었다. ...)
 

1847년 여름에는 두 척의 프랑스 전함, 즉 라 글루와르(La Gloire)라고 하는 쾌속순양함과 라 빅토리우스(La Victorieuse)라고 하는 구축함이 작년에 보낸 글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조선의 해안에 나타났다. 이 두 척의 배는 진창에 빠져 조수가 밀려 나가자 파선되었다. 선원들은 가까운 섬으로 도망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힘이 닿는 데까지 그들을 도와주고 음식과 그 밖의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 주었으며 심지어는 그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를 마련해 주는 데까지도 협조해 주었다. 마침 이 때에 영국의 기선이 이 곳을 우연히 지나다가 생존자들을 상해로 싣고 갔다.

 

그 다음해에 조선에서는 전에 받은 프랑스 정부의 글에 대해, 프랑스인 신부들은 이 나라에 잠입해 한복을 입고 반역자들과 꼭 같이 행동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그들은 체포되면 프랑스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한국의 이름을 대었으며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도 이를 완강히 거절했다. 이러한 처지에서 조정으로서는 이제까지의 태도 이외에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해다.. 단순히 법적으로나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조선의 조정으로서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러했지만 인도주의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잘못을 저질렀다.

 

조선에 끝까지 남아서 교도들과 함께 순교한 그들의 영웅적인 사고 방식에 대하여는 머리를 숙이지마는, 조선의 조정으로서는 자기들의 처사에 대해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조선인들의 처사에 대하여는 비난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화시키는 일이 시급했다. 프랑스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지만 1848년에 프랑스에서 내란이 일어났을 때에는(*2월 혁명으로 루이 필리프가 쫓겨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출범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3년 뒤 황제로 즉위해 제2제정을 선포했다.) 얼마 동안의 타협을 거쳐 일이 순조롭게 종식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849년에 새로운 왕 철종이 등극했는데 그의 전 재위 동안에 가톨릭 교도들에 대해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평온한 시기가 계속되자 신도의 수는 1만 1,000명에서 2만 명으로 증가했다. 정치면에서만 본다면 이 때는 위축의 시기였으니 무능한 신하들에게 둘러싸인 무능한 왕의 정치였던 것이다.

 

(좌: 중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 / 우: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이 천진을 함락하고 북경을 침공했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지기 이전까지는 아무런 중요한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1856-1860 제2차 아편전쟁, 이 과정에서 문화유산인 원명원이 폐허로 변했다. 전쟁 결과 러시아인들은 연해주를 얻고 두만강에 출몰하였다.) 그 때에 서울과 조정이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던가는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헐버트는 1886년에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에 왔다. 직접 목격한 일은 아니다. 혹시 영어 수사법의 일종인가?) 어느 강한 양이가 감히 중화제국의 성채를 공격했단 말인가! 한인들은 일이 매우 다급하게 되었다. 황제가 조선으로 난을 피해 올는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어서 길을 지켜야 한다. 조선과 만주의 사이에서 횡행하고 있는 무뢰한들이 쳐들어올지도 모르니 국경의 성을 손질하고 병력을 증원해야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외국의 군대마저도 몸소 쳐들어올는지도 모른다. 시가는 불타고 양민은 학살당하며 부녀자들은 능욕당할 것이고 불량한 종교가 득세하게 되겠지… 군대를 다시 편성하고 서울에 이르는 관문을 수선하고 강화에 성을 쌓고 서울에 이르는 수로를 지켜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외국인 신부들이 그들의 동포들에게 이곳의 정보를 제공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일은 착수되었다. 그러나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서울 주민의 대부분은 산으로 피난을 가고 그 경황 중에도 로마 가톨릭 교도들을 찾아다니면서 자기들을 보호해 줄는지도 모르는 어떤 징표를 얻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흥분은 차차로 가라앉고 방위 작업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왕은 1863년에 죽고 새로운 왕정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의 왕 고종은 선왕과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 새로운 왕에 대한 기술은 다음 장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제 8장 문호의 개방

 

대원군(국태공) 시대에 2-3 문단 할애: 인물 평가 + 몇 가지 실책... 쇄국 정책, 로마 가톨릭 근절, 며느리(명성황후 민비) 선택, 경복궁 중건...

아무리 그가 강자였다고 하더라도 위대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절두산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1866년 정월에 러시아의 전함 한 척이 원산에 닻을 내리고 조선과 자유로이 교역할 것을 요구하는 글을 조정에 보내었다. 가톨릭 교도들은 당시 조정의 불안을 틈타서 들어오려는 러시아의 접근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영국 및 프랑스와 손을 잡는 수밖에 없다고 진언했다고 한다. 국태공은 자신을 권좌에 오르게 한 반기독교파로부터 압력을 받아 1866년에 어쩔 수 없이 대박해를 감행하게 되었으며, 이는 마치 「만약 그대가 그것을 하지 않으면 그대는 시저(J.Caesar)의 친구가 아니노라」 하는 경우와 꼭 같은 것이었다고 프랑스인들은 믿었다.

 

(*요한의 복음서 19:12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줄 기회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만일 그자를 놓아 준다면 총독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왕이라고 하는 자는 카이사르의 적이 아닙니까?"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공동번역)

 

그는 북경의 하궁(*여름궁궐)이 불타고 중화제국의 도성이 점령되었던 옛일을 자꾸만 연상하더라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 전에 이미 청국인들이 먼저 프랑스인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설명했지만 아무리 심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국태공은 드디어 외국인 신부들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정월 23일에 베르뉘 주교는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재판정에서도 그는 자신이 조선인의 영혼을 구출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이미 10년이 지났다고 말했다. 그는 강제로 추방당하지 않는 한 이 나라를 떠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의 사형 집행 영장이 다음과 같이 낭독되었다.

 

본 죄인은 성이 ‘장’이라는 사람으로서 왕명을 거역했다. 그는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도 않으며 심문에 응하여 판관이 요구하는 정보도 말하려하지 않으며 또한 출국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소정의 재판을 거쳐 참형에 처한다.

 

(# Francois Berneux, 베르뇌 현지 이름-장경일 1814-1866 :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 일본과 만주에서 포교하다가 1855년 제 4대 조선 교구장으로 입국했으며 1866년 병인사옥 때 순교함.)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출처: 가톨릭 신문)

 

브르테니에르, 볼리외 그리고 도리도 그와 함께 처형되었다. 그들의 시체는 합장되었으나 얼마 후에 교도들에 의해 엄숙하게 매장되었다. 며칠이 지나서 프티니콜라스, 푸르티에, 다블뤼, 오메트르 및 우앵도 처형되었다. 이들 중에서 푸르티에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10년 동안 공들인 조선 문법에 관한 원고와 「나한한사전(*라틴어-한국어-한문)의 원고도 함께 잃었다. 이제 칼레, 페롱 그리고 리델의 세 신부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그들은 몸을 숨겨 겨우 연명했으며 끝내는 조선에서 일어난 끔찍스러웠던 사건을 글로 적어 중국에로 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그들은 11명의 조선인 신도들과 함께 조선의 연안에서 배를 타고 지부(*현재 중국 산둥반도 옌타이시 행정구역)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때에 마침 교지지나(Cochin-China)에 사건이 없었더라면 조선에 원정군이 파견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베트남 최남단에 있는 지명으로서 이 무렵에 이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로즈 제독이 이끄는 정한군이 보류되었다.)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신미양요 ... 일본과 강화도 조약 ...

 

*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정부의 공식적인 천주교 박해는 끝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서산 해미읍성,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촬영지이다. 과거 이곳에서도 천주교 박해가 있어 교황이 방문하기도 했다.)
 

 

조선은 천주교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았는데도 이 조약을 계기로 프랑스 선교사들은 상복을 벗어젖히고 자신들의 제복인 검은 수단 옷을 입고 개항장인 서울을 비롯해 원산, 용산, 인천, 부산 등지에서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조약 체결 후 점차 개신교, 천주교에 대한 지금까지의 금압정책을 폐지하여 포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위키백과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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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살펴도 재밌는 것이 종종 눈에 띄던데...

 

조선의 시작을 단군 신화로 소개하는데, 정작 ‘조선’이란 명칭은 기자가 최초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ㅎㅎㅎ?

‘신돈이 위화도 회군 때 죽었다.’라던가, 몇몇 오류가 눈에 보입니다.

 

임나일본부설을 황당한 헛소리로 결론내리는 건, 자연스럽지만, 그래도 고마운 소리입니다.

이순신 장군을 한국의 넬슨으로 인식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네요.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고맙게 생각할 것은...

9장 민비 시해 사건 / 10장 독립 협회 / 11장 러시아의 음모 / 12장-13장 러일전쟁 / 14장 한국 안의 일본인 / 에서

암울한 근대사와 친한파 헐버트 선생의 애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얼마나 조선의 민중을 괴롭혔는지(화폐정리사업과 이권침탈) 그리고 을사늑약의 공포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미국인 독자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독자들에게 미국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데에서 한국에 대한 애정을 짐작할 따름입니다.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마자 서울 공사관의 철수 및 워싱턴 공사관에 ‘외교 업무는 도쿄를 통해 다루어질 것’이라고 통보한 일 따위를 비난함 feat. 조미수호통상조약=거중조정

 

 

미국의 국민 중에는 한국을 위해 몸바침으로써 이 거대한 민족 운동의 핵심이 되고 구심력이 될 교육 기관을 설립하는 영광된 기회를 차지하고 싶은 독지가는 없는가? 교육에 투자된 자본이 더 크고, 더 확실하고, 더 유익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한국밖에는 없다는 말은 한국인의 마음씨를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제시할 수 없는 의견인 것이다.

 

535쪽 이 책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책을 쓴 목적이 은근히 드러나는군요(...)

 


tvn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요셉

 

‘고귀하고 위대한 자여’ 생각해보니까 헐버트에게 해당되는 말이네요.

 

헐버트님에 관해서는 위키백과와 나무위키에 검색해도 나옵니다. 그 외에

 

https://blog.naver.com/mpvalove/220783458176

-국가보훈처 블로그-

 

http://www.yanghwajin.net/v2/mission/mission_02.html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PC-

 

<미스터 션샤인>의 선교사 묘사 방식, 매우 고맙지만…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15656

-크리스천 투데이-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박욱주 겸임교수

 

기사에서는 사실과 드라마의 괴리를 집어내고, 구한말-일제강점기 선교사와 한국 교회에 비판적인 시선을 보냅니다.

헐버트님이 이병헌이랑 친하게 지내던 선교사의 모델이군요.

그러고 보니까 ‘황제의 밀서’를 지닌 선교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네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