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는 개화파 정치가이자, 교육 운동가, 지식인, 독립 운동의 방관자, 그리고 말년에 친일파였던 인물입니다.

1880년대에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고, 돌아와서는 미국 공사관에서 통역 일을 맡았습니다.

젊은 시절,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습니다. 갑신정변에 대해서도 미리 알고 있었을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윤치호 일기]에서 발췌하겠습니다.



1882년 말 김옥균의 권고에 따라 1883년 1월부터 귀국 전까지 3개월간 요코하마 주재 네덜란드영사관의 서기관 레온 폴데르(Leon. V. Polder)와 프랑스인 건축가 폴 사르다(Paul Sarda)에게 영어를 배웠다. 같은 해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조선에 부임하는 초대주한미국공사 푸트(Foote, L. H.)의 통역으로 귀국했다. 귀국 직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명되어 고종과 푸트 및 개화파 간의 교량 역할을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치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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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년  >  11월 30일~12월 28일(음력 1883년 11월 1일~11월 29일) >   22일(23일, 토, 맑음, 삼가다)


이날 반허(潘虛:박제형,朴齊炯)를 찾아가 담론하다 돌아오다. 밤에 고우장(古愚丈)께 올리는 편지를 ‘고워드’에게 보내어 고우장 김옥균께 보내도록 하다.

밤에 고우가 하는 일이 늦어지는 것은 모두 재정이 산란하고 왕명이 한결같지 않은 데 기인한다는 것을 간략하게 아뢰다.

상께서 듣기 싫어하는 기색이 있으셨다. 재삼 아뢰었더니 좌우를 돌아보면서 다른 말씀을 하셨다.

(*일본에서 김옥균이 차관 교섭을 진행 중이었다. 교섭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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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 7월 22일~8월 20일(음력 1884년 6월 1일~6월 30일) > 29일(8일, 화, 맑음, 삼가다)

낮에 고우 김옥균와 위산 서광범을 방문하다. 들으니 일본에 갔던 병학생도(兵學生徒)들이 돌아왔다고 한다. 집에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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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 8월 21일~9월 18일(음력 1884년 7월 1일~7월 29일) > 8일(19일, 월, 흐리다 개다)

오후 2시경에 중명 오세창을 방문하다. 

고(古:김옥균)·위(緯:서광범)·금(錦:박영효)·대(大:유대치)·이(而:박제형)·만(萬:한만여)·한(漢:변수)·백춘배(白春培) 등 제공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지다. 밤에 예궐하여 명일 미국공사를 인견하겠다는 하교(下敎)를 받고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집에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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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 8월 21일~9월 18일(음력 1884년 7월 1일~7월 29일) > 16일(27일, 화, 맑음, 삼가다)


아침에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밤에 예궐하다. 가친이 총융중군(摠戎中軍)에 제수되는 천은(天恩)을 입다. 인하여 전영(前營) 정령관(正領官)의 직을 주어 북병을 거느리고 오도록 하였다. 물러 나오는 길에 고우 김옥균댁에 들러 하룻밤을 자다.


# 1884년 > 8월 21일~9월 18일(음력 1884년 7월 1일~7월 29일) > 17일(28일, 수, 맑음, 삼가다)


아침에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밤에 고우 김옥균과 함께 유재현(柳載賢)을 그의 산정(山亭)으로 방문하여 즐겁게 마시고 돌아오다. 유씨는 우리 개화당(開化黨)의 중요 간부이다. 고우 댁에서 하룻밤을 자다. 이번 가친의 내직(內職) 제수에는 어영대장 한규설의 공이 매우 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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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 9월 19일~10월 18일(음력 1884년 8월 1일~8월 30일) > 18일(30일, 토, 맑음, 삼가다)


아침 9시경에 미국공사 내외, 사서기와 같이 말을 타고 동문 밖으로 나아가, 고우 김옥균, 금석 홍영식을 만나 같이 평구(平邱)의 금릉장 박영효 묘막으로 가다. 시간은 이미 오후 4시경이다. 여러 달 틀어 박혀 지내다 벗들과 같이 성을 나서 교외로 가을 풍경을 찾아 꽃보다 붉은 단풍잎을 구경하니 자못 쾌활함을 깨닫겠다. 평구에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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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  9월 19일~10월 18일(음력 1884년 8월 1일~8월 30일) > 21일(3일, 일, 맑음, 삼가다)


저녁때 고우 김옥균이 미국공사를 내방하여 청·불 전쟁에 대하여 이야기했는데, “우리나라의 독립할 기미가 어찌 이때에 있다 하지 않겠는가?”라는 등의 말을 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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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 10월 19일~11월 17일(음력 1884년 9월 1일~9월 30일) > 7일(20일, 금, 맑음, 삼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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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고우 김옥균를 방문하다. 가친(*부친 윤웅렬)이 기회를 엿보아 움직이는 것이 좋겠다 하더라고 말했더니 고우가 옳다고 하였다. 집에서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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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  11월 18일~12월 16일(음력 1884년 10월 1일~10월 29일) > 29일(12일, 토, 맑음, 삼가다)


저녁때 고우 김옥균이 미국공사를 내방하다. 미국공사는 뜻있는 사람들을 널리 모아 조용히 시기를 기다리되 급히 앞으로 나아가 도리어 개화(開化)하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을 권고하였다. 고우가 옳다고 하였다. 

(* 19일에는 홍영식이 미국 공사관에 와서 친청 외교 노선과 목씨-묄렌도르프에 대해 길게 토로한 일을 기록했었다.)


밤에 예궐하다. 2경(二更) 말부터 5경(五更) 초까지 눈을 붙이고 곧 세자를 모시고 밤을 지내다. 새벽에 물러나 집으로 돌아오다.


-- 갑신 정변 --

# 1일: 1884년 > 11월 18일~12월 16일(음력 1884년 10월 1일~10월 29일) > 4일(17일, 목, 맑음, 삼가다)


아침에 퇴공(退公)하여 돌아오는 길에 고우 김옥균를 방문하고 어제 밤 상께서 내린 동전(銅錢) 1만 여 냥의 어음을 전하다.

타운센트(拖雲孫:W.D. Townsend)와 관계되는 건이다. (원저자주: 고우가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감을 개탄하였다.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저녁 7시에 미국공사, 서기와 우정국(郵政局)으로 가서 연회에 참석하다. 좌수(座首)는 홍영식, 상객(上客)은 푸트, 좌우(左右)는 김홍집이었고, 나머지 김옥균·서광범·박영효·민영익·한규직·이조연·민병석(閔丙奭)·목인덕(木人悳:뮐렌도르프)·아스톤·시마무라 히사시(島村久)·스카더(司各德:Charles L. Scudder)·카와가미 다지이지로(川上立一郞)가 차례에 따라 좌우로 줄지어 앉았다. 나는 푸트공 다음에 있었다.


저녁 연회가 거의 끝날 무렵에 어떤 사람이 후면에서 불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앉아있던 손님들이 일어나 바라보니 전동(磚洞) 근처에서 화염이 자못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모두 다시 자리에 가 앉았다. 미국공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정중(靜重)하였다. 밤에 손님과 같이 자고 있는데 가까운 집에서 불이 일어났다. 곁에 있던 사람이 매우 놀랐다. 주인이 손으로 벽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내 방의 벽이 매우 차니 우리 집에 불나지 않았음을 가히 알 수 있다. 왜 이와 같이 경동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한마디로 그 사람의 진중(鎭重)함을 가히 알 수 있겠다”고 하였다.


Lucius Harwood Foote 루시어스 푸트 공사


내가 통역을 하여 여러 사람이 듣게 하려 하였으나 놀래어 당황하는 자가 많았다. 이제 홍금석[홍영식]에게 통역을 하려 할 즈음에 보니 목씨[뮐렌도르프]가 작별하고 돌아가려고 한다. 미국공사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목씨는 “불난 곳이 우리 집과 가까워 가보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였다. 또 보니 이조연·한규직 두 영사(營使)도 가려 하고 있다. 아마 장임(將任)을 띠고 있어 불을 끄러 가려는 것이리라.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바깥으로부터 신음하면서 들어오는데 피가 흘러 옷을 적시었고 얼굴빛이 창황(蒼黃)하였다. 만좌가 놀래어 보니 그는 민운미[민영익]이었다. 자객에게 귀에서 볼까지 찔리어 떨어질 만큼 쪼개져 있었다.


밖으로부터 또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여러 손님들이 모두 뒤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나도 같이 달아나다 보니 미국공사는 아직 식당에서 목야와 같이 운미를 구호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몸을 돌려 집으로 들어와 급히 사서기(司書記)에게 총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었다. 사서기가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또 미국공사에게도 총을 가지고 있는지를 물었다. 미국공사가 “하인이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내가 집 밖으로 나아가 용기(龍基)를 불러 총을 찾아 미국공사에게 주었다.


이때 친군전영사 한규직과 승지 민병석(閔丙奭)은 관과 옷을 벗어 던지고 사람들 틈에 섞여 빠져 달아나려 하였다. 한규직은 한편으로 영을 내려 데리고 온 병정을 모아 놓고 탄환을 채우고 손에 칼을 잡고 계엄하였다. 나는 그에게 속히 호령을 내릴 것을 권하고 또 한 자루 병기를 얻어 호신하는 물건으로 삼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갑자기 한 방의 포 소리가 들려 뭇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병정들은 창과 칼을 버린 채 뛰어 담을 넘어 도망친 듯하고, 여러 하인과 손님들은 모두 뒷문으로 달려 나가 버려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미국공사와 서기관, 그리고 나만이 청상(廳上)에 서 있었다.


형세가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미국공사와 서기에게 길을 빠져 공사관으로 돌아가자 하고 같이 문밖으로 나아가 큰 길을 바라보며 달렸다. 일본공사관으로 가서 구원을 청할까도 생각하였으나 길이 멀고 또 미국공사관에 미국공사 부인을 돌볼 사람도 없고 하여 걸음을 재촉하여 공사관으로 돌아왔다. 일본공사관으로 사람을 보내어 병정 몇 사람 보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새벽이 되도록 오지 않았다. 용진(龍鎭)이 계동집으로부터 와 소식을 전하였는데, 삼전(三殿)께서는 경우궁(景祐宮)으로 파천하였고 일본 병대가 문을 지켜 호위를 매우 엄밀히 하기 때문에 한 사람도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후영(後營) 병정은 밖에서 호위하고 있다고 한다.


새벽 4시경 상께서 박한응(朴漢應)을 보내어 미국공사를 위문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변수(邊燧)가 와서 상의 뜻을 전하기를 미국공사가 행궁(行宮:경우궁)으로 나아가 같이 뜻밖의 변을 피하기를 청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들으니 지금 행궁에는 거처할 만한 방이 없고 날씨는 이와 같이 찬데 미국공사, 독일공사, 영국영사 내외가 모두 온다고 하면 그 고생과 추위가 어떠하겠는가? 이와 같이 하여 반드시 변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외국인이 반드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겁내는 것을 비웃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만약 상께서 외국공사관을 보호할 뜻이 있다면 왜 50명 혹은 100명의 병대를 보내어 수호하지 않는 것인가? 이와 같이 하면 외국인들의 고생을 면하게 할 수 있고 우리 정부에서 능히 파병하여 외국공사관을 보호하였다는 생색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를 상께 알림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변수는 박한응에게 이를 아뢰도록 부탁하고 곧 영국공사관으로 가 버렸다. 나는 변수와 이야기한 것을 한바탕 미국공사에게 설명하였다.


얼마 안 있어 아스톤영사가 와서 미국공사와 더불어 갈 것인지 머무를 것인지를 의논하였다. 마침내 가지 않기로 의논을 정하고 나에게 행궁으로 가서 이를 아뢰도록 부탁하였다. 또 번아도우로 하여금 동행토록 하여 뜻밖의 변을 막게 하였다. 번아도우 군과 같이 걸어서 행궁에 도착하니 병정들이 총을 잡고 궁 밖을 에워싸 지키고 있었다. 궁문을 두들기니 풍현철(風玄哲)이 보였다. 온 뜻을 자세히 말하였다. 문이 열리자 그를 따라 어재소(御在所)까지 들어갔다. 여기에 고우 김옥균·춘고 박영효·금석 홍영식·위산 서광범이 있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재원(李載元), 경기관찰사(圻伯) 심상훈(沈相薰 *정변에 가담하는 척하면서 왕과 왕비에게 정보를 주었다.) 사관장(士官長) 서재필(徐載弼)과 그 밖에 여러 사람들이 모두 칼을 뽑아 들고 방을 에워싸 지키고, 유재현(柳載賢)·김규복(金奎復) 등 여러 환관이 왕을 시위하고 있었다. 여러 관인들은 모두가 평복 차림이었다. 편실(便室)에는 다케조에와 시마무라가 앉아 있었다.


(서광범: 조선에서 양복을 최초로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얼마 안 있어 상께서 나를 어실(御室)로 들어오도록 명하였다. 주상의 존안(尊顔)을 절하여 뵈었는데 번뇌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셨다. 곤전께서는 옷을 바꾸어 입고 시녀들이 앉아 있는 속에 섞여 계셨다. 동궁께서는 탕건(宕巾)과 두루마기 차림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시녀들이 에워싸 모시고 있었다. 근심스러운 빛이 방에 가득하고, 창황 처참한 광경은 눈물이 흘러 옷을 젖게 하고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게 한다. 상께서 부드러운 말씀과 온화한 기색으로 달래 풀어주신다. 겨우 슬픔을 진정하고 아뢰기를, “미국공사의 말이 ‘만약 호위병이 있으면 궁으로 나아가 폐현하겠다’고 하는데 상의 뜻이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상께서 즉시 병정을 보내어 미국공사와 영국영사를 호위해 올 것을 명하셨다. 이에 물러나와 번아도우 군과 같이 좌·우영(左右營) 병대 20명을 지휘하여 미국공사관으로 떠났다. 또 부상(負商) 20명도 뒤를 따랐다. 도중에 교동(校洞)에 들러 번아도우 군이 거처하는 곳을 살펴보고 곧 공사관으로 돌아왔다. 이미 일본병 4명이 와서 번을 서고 있었다. 미국공사에게 청하여 부상을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들이 머무는 것이 이로운 바는 없고 한갓 시끄럽기만 더할 듯하기 때문이었다. 때는 달이 이미 서쪽으로 지고 날이 밝아 있었다. 상의 소명(召命)을 전하고 아침에 폐현할 것을 약속하였다. 인하여 옷을 품고 곤하여 드러누웠다.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괴롭고 더욱 여러 가지 일이 근심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날 밤에 겪은 것이다. 아직도 빠뜨리고 적은 것이 있으나 대강 적으면 이와 같은 것이다. 조혜인(趙惠人:조영하,趙寧夏)은 궁문을 두드렸으나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궁내외문(宮內外門)의 파수가 엄밀하여 내외로 소식을 통하지 못하게 하였고, 내외인이 뜻대로 왕래하지 못하게 한다는 등의 말도 빠뜨린 것이어서 다시 적는다. 민운미는 목씨 집에 누워있다. 미국 의사(*알렌)가 가서 치료했으나 매우 치료하기 어렵겠다고 하니 딱하다.



# 2일: 1884년 > 11월 18일~12월 16일(음력 1884년 10월 1일~10월 29일) > 5일(18일, 금, 맑음, 삼가다)


일찍 일어나 미국공사·영국영사와 같이 행궁에 나아가 폐현하다. 상께서 중후한 뜻으로 위문하셨다. 미국·영국 두 나라 사신이 함께 아뢰기를, “세계 모든 나라에는 다 사소한 변동이 있고 그렇게 해서 온전한 판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귀국에 이 같은 놀라운 변이 있기는 하나 또한 주상의 생각을 번거롭게 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대군주의 성명(聖明)으로 어찌 나라일이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어 물러나와 다케조에와 담화하였다.


10시경에 제전(諸殿)이 계동궁(桂洞宮)으로 이어(移御)하다. 들으니 유재현은 어젯밤 화약에 불을 지르려다 발각되어 참살당했다고 한다. 전영사 한규직·후영사 윤태준·좌영사 이조연 3영사(三營使)도 피살되었다 한다. 민영목·조영하·민태호도 피살되었다고 한다. 풍문이라 믿기 어렵다. 박영효를 명하여 전·후영사로 삼고, 홍영식을 명하여 좌·우영사로 삼고, 서광범을 명하여 외아문(外衙門) 서리독판(署理督辦)으로 삼고, 이재원을 제수하여 좌의정(左議政)을 삼다. 


11시경에 독일공사 젬부쉬가 들어와 알현을 마쳤고, 이어 3명의 사절(使節)들이 인사하고 공관으로부터 나오다. 이때 도로는 사람으로 가득 차 다른 사람 어깨와 맞닿고 가마와 말은 지나가기 어려웠다. 공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영·독의 공사·영사가 목씨[뮐렌도르프] 집에 들려 운미[민영익]를 문병하였다. 목씨가 일본병의 궁중호위를 크게 논하되, 비록 공법(公法)에는 어긋나지 않으나 방비를 긴밀히 하여 물샐 틈도 없으니 이게 무슨 도리냐고 하였다. 공사관으로 돌아와 점심을 마친 뒤 계동 집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옵고 저녁때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때 미국공사가 운미를 가서 보다.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저녁때 열전(列殿)이 환궁하여 인심이 조금 진정되었다 한다. 저녁때 가친과 같이 김씨[김옥균] 등이 저지른 일은 무식하여 이치를 모르고, 무지하여 시세에 어두운 것임을 논하였다. 들으니 가친을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제수하고 나와 변수를 외무아문참의(外務衙門參議)에 제수하였다고 한다. 고우[김옥균] 등 여러 사람이 하는 일이 조급하여 원망스럽다. 더구나 우리를 이 같은 직임(職任)에 제수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무슨 지각이 있다 할 것이며 어디에 쓰려는 것인가? 가석하고 가석하다. 금석[홍영식]은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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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1884년   >   11월 18일~12월 16일(음력 1884년 10월 1일~10월 29일)   >   6일(19일, 토, 맑음, 삼가다)


오후에 가친을 찾아뵙다. 가친은 고우 김옥균 등 여러 사람의 일이 반드시 실패할 몇 가지 이유를 미리 헤아리셨다.


제1. 임금을 위협한 것은 이치를 따른 것이 아니라 거스른 것이니 실패할 첫째 이유이다. 


제2. 외세를 믿고 의지하였으니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 실패할 둘째 이유이다. 


제3. 인심이 불복하여 변란이 안으로부터 일어날 것이니 실패할 셋째 이유이다. 


제4. 청군(淸軍)이 곁에 앉아 있는데, 처음에는 비록 연유를 알지 못하여 가만히 있으나 한번 그 근본 연유를 알게 되면 반드시 병대를 몰아 들어갈 것이다.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니, 적은 일본병이 어찌 많은 청병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실패할 넷째 이유이다.


제5. 가령 김옥균·박영효 등 여러 사람이 능히 순조롭게 그 뜻을 이룬다 하더라도, 이미 여러 민씨와 주상께서 친애하는 신하들을 죽였으니 이는 주상과 곤전의 의향에 위배되는 것이다. 임금과 왕비의 뜻을 거스르고서 능히 그 위세를 지킬 수 있겠는가? 실패할 다섯째 이유이다. 


제6. 만약 김·박 여러 사람의 당인(黨人)이 조정을 채울 수 있을 만큼 많다면 혹 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두서너 사람이 위로는 임금의 사랑을 잃고 아래로 민심을 잃고 있으며, 곁에는 청인이 있고 안으로 임금과 왕비의 미움을 받고 밖으로 당붕(黨朋)의 도움이 없으니, 능히 그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짐을 꾀할 수 있겠는가? 일이 반드시 실패할 터인데 도리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한스럽다.


또 우리 부자를 끌어들여 같은 무리로 삼으려 하니 두렵다. 그러나 이에 쫓으면 역적이 되고, 역적이 되면 망하게 되니 진퇴유곡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가? 주상과 왕비께서 우리의 청백(淸白)한 마음을 알지 못하고 우리를 저들과 같은 무리로 생각할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는가? 부자가 서로 통탄하고 삼가고 경계함을 상책으로 삼자는 것을 서로 권하고 말을 달려 공사관으로 돌아왔다. 시간은 오후 4시경이다.


겨우 공사관에 도착해 보니 병정들이 분주하게 왕래하는데 입을 모아 귓속말을 하며 발은 바쁘고 숨을 급히 헐떡거리고 있어서 마치 변란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연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듣건대 총소리가 궐내에서 연이어 나고 인민들이 길 위로 도주하고 있다고 한다. 생각건대 청인이 임금의 처소로 들어가 일본인과 접전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내가 아직 믿지 못하여 다만 엄히 경계할 것을 명하였다. 얼마 안 있어 아스톤 영사 부처와 그 속원(屬員)들이 함께 미국공사관에 모여 서로 보호할 것을 꾀하였다. 이때 총소리가 연이어 났다.


어느덧 날은 저물었는데 가친이 상인(常人) 차림으로 내임하셨다. 사유를 여쭈었더니 가친이 말씀하기를, “참으로 내가 생각한대로 되어 가는구나. 지금 청인은 임금의 처소로 쳐들어갔고, 우리 인민과 군병은 기회를 틈타 청인을 도와 되돌아섰고, 일인은 이에 총으로 대항하여 구중궁궐(九重宮闕)이 갑자기 전쟁터가 되었다. 삼전(三殿) 성위(聖位)께서는 바야흐로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어 혼자 힘으로라도 환난을 구하고 싶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나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나를 김씨의 당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형조판서에 제수된 때문이다. 그런즉 지금의 형세로는 사람들이 나를 의심하여 해치려고 하니 어찌 두렵고 원통하지 않겠느냐? 까닭에 우선 이리로 도망쳐 와서 다시 뒷일을 의논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즈음 인민들이 소요를 떨면서 지나쳐갔는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때는 황혼녘이다. 일본이 아라키(荒本)가 달려와 하는 말이 “길에서 사람들이 일본인을 만나면 반드시 해쳐서 미· 영 남녀들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각별히 경계를 엄하게 하라”고 하였다.


밤에 가친이 제물포로 가서 잠시 지내려 하였으나 성문이 닫혀 나가지 못하였다. 밤이 깊은 뒤에 덕희(德熙)의 집으로 피하여 갔다. 이날 밤에 여러 사람들은 모두 잠을 자지 못한 채 밤을 새웠다. 영국영사관의 알렌(阿連)이 앞문을 파수 보고 번아도우가 병정을 지휘하여 지키었다. 밤에 자친(慈親)이 만복(萬福)의 집으로 옮기었다. 가동(街童) 역부(役夫)들이 군기고(軍器庫)로 달려가 임의로 무기를 가지고 나와 노상에 횡행하면서 변장한 일본인들을 찾고 있었다. 밤에 다케조에(竹添)가 병대를 이끌고 물러나 공사관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날 목인덕(木人德:뮐렌도르프)이 양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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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년   >   11월 18일~12월 16일(음력 1884년 10월 1일~10월 29일)   >   8일(21일, 월, 맑음, 삼가다)


아침 10시에 미국공사·영국영사와 같이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진영에 가다. 미국공사가 나를 위하여 두려워하며 가지 말도록 주의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가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으로 안다”하고 인하여 동행하였다. 미국공사가 자신은 말을 타고 교자(轎子)를 나에게 사양하여 타도록 하였다. 그 정의가 고맙다. 같이 천쑤탕(陳樹棠)의 공관에 도착하여, 나란히 위안스카이 진영으로 갔다. 여러 사절들이 폐견하고 위문을 마치었다. 상께서 여러 공사에게 친히 제물포로 가서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만나 양국의 강화를 합동 상의하도록 청하셨다. 여러 사절들이 명을 받들고 물러나오다.


아침에 폐현할 때 내가 아뢰기를, “신의 부자가 여러 사람의 의심을 받는 처지에 있어 황송하고 두렵기 이를 데 없습니다”고 하였다. 상께서 말씀하기를, “나는 너의 부자가 죄가 없음을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성은이 감사하다.


들으니 홍금석[홍영식]이 난민(亂民)에게 피살되었고 사관생도도 반이나 피살되었으며 김[김옥균]·박[박영효]과 양서(兩徐:서광범·서재필)는 모두 도망쳤다 한다. 들으니 조정에서는 고우 김옥균 등 여러 사람의 죄를 정하여 곧 역률(逆律)로 다스리리라 한다. 상소(上疏)하여 홍씨의 집안사람을 모두 죽이는 노륙형(孥戮刑)을 거행할 것을 청하는 자도 있었다.


이날 상께서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김·박 등이 너의 애비를 해치려 하였으나 그리하지 못한 것은 네가 미국공사관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미국공사는 조선정부가 병정을 보내고 또 청군도 보내어 미국공사관에 피해 있는 일본인들을 호송할 것을 청하였다. 그것은 이와 같이 하여 가히 일본인의 노여움을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물러나 공사관으로 돌아오다. 일전에 천쑤탕(陳樹棠)이 미국공사를 찾아왔을 때 미국공사는 병단(兵端)을 열지 말고 앉아서 시세를 보도록 권한 바가 있었다. 공사관에서 자다. 들으니 서재창(徐載昌)이 갇혔다 한다. 들으니 일전에 운태[민영익]를 몰래 공격한 자는 바로 서재창이었다 한다.


*서재창은 서재필 박사, 필립 제이슨의 형제다. 


윤치호는 김옥균 일파와 자주 어울렸기 때문에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황급히 상해-미국으로 도피유학을 떠난다.

그 곳에서 만난 조선인들로부터 경원시 당하고, 감시받는 느낌을 받는다.


- 상해 도피 유학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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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개화당은 비록 수는 많지 않으나 옥(玉:김옥균)·영(英:홍영식)·영(泳:박영효)·재(載:서재필)·광(光:서광범) 등의 여러 사람은 문벌 좋은 집안 출신이어서 가히 큰 지도자가 될 만하였다. 더욱 약간의 시무(時務)에도 통달하고 있어서 나라에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었으며 그 수가 가히 하나의 당을 이룰 만 하였다. 문견을 넓히고 알지 못하는 것을 깨우치기를 날로 달로 더하여 인민들이 밝은 것을 취하고 어두운 것을 버리는 보람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가을 겨울 사이에 인민들이 검은 옷을 많이 입게 되었다. 이로 볼 때 또한 인민들이 실리를 취하여 밝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일반의 방향을 가히 엿볼 수 있겠다. (원저자주: 그러나 4~5인이 개화의 총도자(總導者)가 되어 갑자기 격패(激悖)한 일을 저질러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청인들로부터 억압과 능멸을 받음이 전날보다 배는 더하게 되고, 이른바 개화에 관한 말을 땅에 발라 흔적도 없게 하리라는 것을 어찌 뜻하겠는가?)


전에는 인민이 비록 외교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시비를 가리려 하지는 않았다. 개화당을 꾸짖는 자도 많이 있었으나 오히려 개화가 이롭다는 것을 말하면 듣는 사람들도 감히 크게 꺾으려 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변을 겪은 뒤부터 조야(朝野)에서 모두 말하기를 “소위 개화당이라고 하는 것은 충의를 모르고 외인과 연결하여 나라를 팔고 겨레를 배반하였다”고 하고 있다. 어찌 개화에 주목한 사람 가운데 마음속에 이와 같은 의사를 품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패격(悖激)하여 일을 그르친 4~5인이 곧 전날의 개화당 인물인 까닭에 세인들은 다 외교하는 사람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賣國之賊)’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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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어서 스크롤부터 내린 사람을 위해서, 학생들을 위해서 EBS 5분사탐: 갑신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