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 초반기, 1811년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서북민'에 대한 차별을 이유로 봉기한 것이죠.


대한민국 임시정부 갈등도 종류가 많습니다만, 

1923년 국민대표회의를 보면

투쟁 노선: 창조 VS 개조 (VS 정부 내 현상유지)라던가 

이념: 좌파(사회주의) VS 우파(민족주의)가 아닌


지역: 기호 VS 서북의 갈등으로 인식하기도 합니다.


미국 내에서의 안창호와 이승만의 갈등을 서북 VS 기호로 풀어내기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분명히 지역감정이 존재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총독부에서 Divide and Rule 전략에 따라 방치하거나, 오히려 험한 말, 가짜뉴스를 키워나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치 독립 후에도 영남과 호남의 정치가들이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겼던 것처럼요.

마치 나무라이브에서... 유입을 늘리기 위해 오늘의 라이브를 읍읍읍읍읍읍





오늘날 가짜뉴스와 찌라시는 생산되는 속도가 빠르지만, 동시에 많은 언론사와 교수들이 확인이라도 해줍니다.

100여년 전에는 참 검증이 어려웠습니다. 


조선을 통치하는 정부가 거짓말이라도 유리하면 즉각 퍼뜨리는 '총독부'라는 점에서 더욱 확인이 어려웠죠.

윤치호는 지역 감정을 비판하면서도, 기호 VS 서북이라는 논리에 자꾸 매몰된 모습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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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 있는 개화-교육 운동가, 기독교인, 독립 운동의 방관자, 그리고 말년의 친일파 윤치호

 '윤치호 일기'에서 발췌


에모리 대학 시절의 윤치호


(01) 찌라시의 시작1920년(경신년)  8월 30일 《월요일》 오전에 후덥지근하다가 오후에 비.


  • 송도 집이다. 유성준 씨와 서광세(徐光世) 씨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점심을 들었다. 두 사람은 우리 집이 마음에 든 듯하다. 경기도 참여관인 유성준 씨가 말하기를, 독립운동이 시작된 뒤로 일본인들이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는 횟수가 그전보다 더 줄었다고 한다.

  • 내가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가 있다. 안창호 씨는 지역감정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만약 기호인 조선인들이 노력해 독립을 얻는다면 독립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조선의 서북지방 사람들은 중부와 남부지방 사람들에 대해 뿌리 깊은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창호 씨 같은 지도자가 분파적인 편견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안창호 씨가 그런 편견을 품고 있다면,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선인이 아직 독립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말 자체는 아주 무책임한 말이다. 진실은 과연??? -


(02)  기호인 박멸운동?: 1921년(신유년)   5월  2일 《월요일》 화창한 날씨


  • 이필수는 독립협회 회계원이었던 이준일의 장남이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고 시베리아의 극동지역에서 12년을 살았다. 이필수가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이필수가 합방 이전에 그곳에 갔을 때만 해도 조선인은 서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안창호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오자마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조선인의 우호적인 관계가 지역 간의 극심한 적대관계로 돌변했다. 안창호는 서북인의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기호인 박멸운동을 시작했다. 이들 간의 반목이 심해져, 급기야 평안도 사람들이 이상설을 죽이려고 한 일도 있었다. 안창호는 이상설과 함께 일하기를 꺼렸다. 정말이지 희한한 일이다. 정말이지 서글픈 일이다.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다. 하필이면 지금 보잘것없고 비애국적인 지역감정을 품는 걸까?

-아마도, 정순만-양성춘 사건이 와전되어 끔찍한 증오가 퍼진 듯 하다.-


http://www.sangdong.org/bbs/board.php?bo_table=history&wr_id=56&page=5 (기독교대한감리회 상동교회 홈페이지: 상동인물-정순만)


대동공보에 근무하고 있는 이들 사이에 지역적인 갈등과 대립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정순만 등에 의하여 한인 전 거류민 단장인

양성춘이 피살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대동공보에서는 1910년 4월 24일자 <양씨피살상보>에서 1909년 러시아력

12월 26일 밤에 이 사건이 벌어졌으며, 그 이유는 평안도파와 기호파와의 대립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주)정순만의 양성춘 살해 사건은 기호파와 평안도파의 갈등과 대립에서 발생하였다. 당시 평안도파에 속한 인물은 차석보, 양성춘,

  유진률, 정재관, 김성무, 이강, 함동철 등이었고, 기호파정순만, 윤일병, 김현토, 안한, 강순기, 권유상 등이었다. 정순만 등

  기호파에서는 김성무가 미국에서 대동공보에 연조한 돈을 , 그리고 윤일병은 정재관이 미주 태동실업회사의 돈을 착복했다고 비난하였다.



홈페이지 캡처와 (구) 상동교회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591.html (한겨레21) 개척리 살인 사건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5730.html 독립운동 예봉 꺾은 개척리의 비극 


    ... 정순만 피살 사건도 사적 범죄로 간주되지 않았다. 한인 사회의 내분과 관련된 음모라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제 상황이 뒤집어졌다. 정순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렸다. 이상설이 지도자인 이 그룹은 러시아 관청의 힘을 빌렸다. 러시아 관청 교섭력에서는 이 그룹이 월등했다. 이는 역사가 계봉우가 논평한 바 있다. “기호파의 수령인 이상설이 러시아 헌병대 하바롭스크 정탐부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자기의 파를 거기에 많이 배속한 것은 그의 평생 역사로 보아 결점”이라고 평했다.


    정순만 사건은 민족해방운동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계기가 됐다. 살인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네 한인이 러시아 관청에 고발당했다. 안창호, 정재관, 이강, 김성무가 그들이었다. 정순만 지지자들은 이 네 사람이 살인사건을 교사했다고 의심했다.


    러시아 헌병대는 네 사람에 대한 구인장을 발부했다. 살인교사 혐의였다. 체포 위기에 직면한, 국민회 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단 피신하기로 결정했다. 안창호는 페테르부르그와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기로 작정했고, 이강과 정재관도 연해주 밖 자바이칼주로 피신했다...


        사건 전말

        1910년 헤이그 특사 이상설의 동지 정순만(기호)이 양성춘(서북)을 의견 대립 끝에 '고의' 혹은 '우발'적으로 살인함

        (법정 증언에 따르면 정순만이 '자살'하겠다면서 총을 빼어들었는데, 그걸 양성춘이 몸을 날려서 말리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총탄이 발사되었다고 주장.)

        -> 정순만은 1년이 조금 넘게 수감

        -> 1911년 정씨는 출감 후에 양씨의 가족(부인 전소사와 친형 양덕춘)에게 피살

        -> 한인 사이에서 갈등 증폭

        -> 정순만을 지지하던 측에서는 서북파가 복수극 뒤에 있다고 의심 

        -> 러시아 관청에 (안창호를 포함한)  4인을 신고함, 헌병대는 살인교사 혐의로 체포하려함.

        -> 안창호는 연해주에서 미국으로 탈출


         - 복잡한 사건을 '기호인 박멸 운동'으로 과잉 해석 = 무책임한 언사 or 진영 논리에 빠짐 or 가짜 뉴스에 선동 당함 -



        (03) 이승훈 장례 문제 1930년(경오년) 5월 10일《토요일》 화창하고 쾌적함.


        서울 집이다. 오후 1시에 정구대회 둘째 날 일정이 진행됐다. 교육사업과 일정하게 관련된 인사들 다수가 조선교육협회 회관에 모였다. 이승훈 씨 장례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사회장(社會葬)으로 치르기로 결정되었다. 난 이런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감정이 연루된 다소 미묘한 문제였다. 기본원칙은 이승훈 씨에게도 이상재 선생과 똑같이 예우하자는 것이다. 이 모두가 부질없는 일인데도 사람들은 이를 대단히 중시한다. 서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장례식 세부 절차를 조정하기 위해 13명의 위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했다.


        -  (현대인 입장에서) 이상재나 이승훈 모두 훌륭한 분들이고, 

        장례 절차 따지는 사람은 어느 지역에나 있는데

         굳이 '서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라고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괴로워하던 서북인의 차별의식이 밖에 나왔나? 혹은 윤치호가 가진 서북인에 대한 편견?


        윤치호는 며칠 후 사회장 '명의' 때문에 총독부 경찰에게 조사를 받았는데,

        '멍청한' 장례 위원회 때문에 조사를 당했다며, 짜증을 일기에 풀어낸다. -



        (04) '편견'을 집어던진 선각자 윤치호?1929년(기사년) 3월 12일《화요일》 흐리고 찬바람


        이 결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 그저 주님만이 알고 계실 뿐이다. 우리는 그저 최상의 결혼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이다. 저명한 서울 가문에서 평양 출신 남자를 사위로 맞는 것은 우리 가문이 처음이다. 나는 조롱과 비난, 심지어는 욕을 듣게 되리라. 사람들은 내가 1883년에 인력거를 탄다고 욕했고, 1907년에는 자전거를 탄다는 등의 이유로 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를 욕한 이들보다 내가 더 현명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번에 맞은 평양 사위가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길 바란다.

        -  서북을 은연 중에 무시하는 풍토가 아주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평양성 보통문)


        (05) YMCA에서 목격한 '갈등' 1930년(경오년) 9월 23일《화요일》 화창하고 쾌적함.


        서울 집이다. 오후 5시 30분 서울YMCA에서 조선YMCA연합회 회의가 열렸다. 뉴욕 국제위원회의 내쉬 씨 소환이 이번 회의의 주요 쟁점이었다. 김동원(金東元) 평양YMCA 회장은 내쉬 씨가 조선에 잔류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조만식 평양YMCA 총무도 당연히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이번 회의에 평양측 인사가 몇 명 더 있었더라면 그들과 서울 위원, 특히 유억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뉴욕에 내쉬 씨의 소환을 취소해달라고 전보를 보내자는 의견을 두고 장시간 동안 입씨름이 오갔다. 에비슨 박사가 그런 내용의 전보를 보내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위험하다고 말함으로써 논쟁을 매듭지었다.

         ʻʻ만일 뉴욕 국제위원회가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이면 신흥우 씨와 반하트 씨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반대로 우리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조선YMCA연합회의 체면은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ʼʼ 결국 내쉬 씨의 소환 결정을 묵인하기로 결정했다. 정말이지 탐탁지 않다. 신흥우 군은 내쉬 씨가 서북 인사들에게 서울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제거하려 한다. 이제 내쉬 씨가 소환되면 서북과 서울은 더욱더 사이가 멀어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06) 안창호에 대한 악소문

        1931년(신미년)  1월   8일《목요일》 눈 내리고 따뜻함.

        1931년(신미년)  4월  17일《금요일》 계절에 맞게 화창하지만 몹시 추움.


        ...(전략)... 하와이, 미국, 시베리아, 만주, 상하이 등 사실상 조선인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조선인을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갈라놓는 두 파벌, 즉 서북파와 기호파가 이제는 서울에서 더욱더 적대적인 양상을 연출하고 있다. 서북파 지도자인 안창호 씨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ʻʻ먼저 기호 사람들을 제거하고 난 후에 독립해야 합니다.ʼ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다. 나는 항상 지역갈등과 파벌투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애써왔다. 그런데도 신흥우 씨, 유억겸 씨와 함께 기호파 지도자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나는 서북파 인사 중 일부, 예를 들어 작가인 이광수 군을 매우 좋아한다. 신 군과 유 군은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데도 말이다.


        ...(전략) 안창호가 이끄는 서북파가 기호파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와이, 미국, 시베리아, 중국 등 조선인이 살고 있는 모든 곳에서 이 두 파벌은 도저히 용해될 수 없는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 서북파는 기본방침으로 일본인을 몰아내기 전에 기호파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해외에 나갔다가 돌아온 기호인은 한결같이 두 진영 사이에 적대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서북파에게 더 큰 잘못이 있는 것 같다. 모든 조선인이 폭풍우가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한 배를 타고 있는데, 안창호 같은 인사들이 어떻게 이 하잘 것 없는 분파정신과 증오심을 고취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  서북 제일의 개XX??: 도산 안창호, 과연?? 진짜? 가짜? 10년 전과 동일한 입장인 것인가?? -


        1931년(신미년)  4월 19일《일요일》 오전에 화창함. 추움.


        서울 집이다. 나는 지역파벌에 반대하면서 하루빨리 화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그래서 난 서북인 중에서도 전형적인 서북인이라 할 수 있는 평양 청년을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신흥우나 유억겸 같은 지도자들은 평양 인사들이 기호인을 싫어하는 것 못지않게 서북인을 싫어한다. 얼마 전 이화여전 학생들이 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에 저명한 소설가 이광수를 초빙했다. 팸플릿이 인쇄되었다. 그런데 예정시간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유억겸이 이화여전의 미국인 교장 註 001(엘리스 아펜젤러)에게 이광수의 강연을 금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광수가 전처와 이혼했다는 사실이 명분이었다. 이광수로서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얼마 전 이화여전은 내 사위의 형인 정두현 씨를 초빙해 일부 교과목을 맡기려고 했다. 신흥우가 그런 특수 과목은 여교사가 가르쳐야 한다고 제안하여 아주 교묘하게 이 계획을 취소시켰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두 파벌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한다. 그들에게는 상대방을 가혹하게 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지역적 적대감이라는 사치를 부릴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07) 안창호의 수감 (*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가 일어나자,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조선으로 인도되었다.)
        1932년(임신년) 7월 15일《금요일》 매우 더움. 지금까지 최고로 더운 날이다.


        서울 집.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폭우가 쏟아졌다. 안창호씨는 오후에 수감되었다. 註 001오후 4시 30분 이광수씨의 부탁을 받고 안씨와의 짧은 면담을 가졌다. 그런데 김활란양은 내가 당국자들에게 안씨를 석방해줄 것을 빈번히 요청했다는 소문에 분개하였던 것 같다. 이승만 박사와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서북계를 이끄는 안씨 사이에 볼썽사나운 싸움이 서울에까지 도달한 것 같다. 신흥우, 유억겸. 김활란 등은 내가 이광수, 누구보다도 안창호와 같은 서북계 지도자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는 것으로 인하여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 우정과 정치적 당파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註 001 안창호는 경기도 경찰부에서 39일간 취조를 받은 후 1932년 7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 윤치호는 한일병합 이전에 신민회에 가담한 전력이 있었고, 안창호는 대성학교를 세우고, 윤치호를 교장으로 초빙했다.)



        (몽양 여운형)


        (08) 서북파와 기호파 1933년(계유년)  10월  2일《월요일》 사랑스러움. 따뜻함.


        서울 집. 조선인들이 있는 장소인 하와이, 아메리카, 상해, 만주, 러시아 등에서 계속되고 있는 서북파와 기호파(경기충청파) 사이의 볼썽사나운 경쟁과 갈등 그리고 모함이 서울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에서 서북파의 지도자들은 이광수, 정인과, 이용설씨들로 이야기된다. 반면 신흥우 박사, 박용희, 함태영 목사는 두드러진 반서북파로 간주된다. 새문안교회 차재명 목사는 서북파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이야기된다. 상해와 그 밖의 장소에서 파벌싸움을 경험한 여운형씨는 기호파의 유력한 인물이다.

        얼마 전 동아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조선일보사 부사장이 된 이광수씨는 김성수씨와 송진우씨에게 배은망덕의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가 몇 년 전 빈털터리가 되어 조선에 돌아왔을 때 김성수씨와 송진우씨는 그가 조선 사회에서 신임을 받아 재출발하기까지 물질과 도덕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는 동아일보의 편집장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조선일보가 서북파의 기관이 되자 이씨는 그 신문에 참여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작업하였다. 물론 거기에 어떠한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09) 아주 이상한 기록: 1933년(계유년)  10월  4일《수요일》 멋진 날.


        서울 집. (이광수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러나 그의 잘못은 은인인 송진우에게 동아일보를 떠나는 날 밤까지 조선일보로 간다는 계획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내가 신흥우와 여운형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광수는 김성수와 송진우에게 매우 불쾌하게 행동한 것이다. 서북파의 방응모, 하일청씨 등에게 전적으로 재정지원을 받는 조선일보는 안창호씨를 위한 직장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보도에 의하면, 부유한 반(反)기호파인 안창호가 일본인들은 최근에 와서 적이 되었지만 기호지역의 조선인들은 500년 동안 서북인들의 적이었기 때문에 기호파 즉 경기충청파는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안씨가 이러한 진술을 했다고 거의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호인들은 그가 그러한 말은 물론이거니와 더 심한 일도 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신흥우와 여운형은 나에게 서북파의 파렴치한 음모와 계획에 대응하기 위해 기호인 지도층들로 구성된 당을 결성하자고 제안하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조심스럽게 그 제안을 숙고하고, 여씨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야기했다:이어지는 페이지를 보라.


        안창호가 과연 그러하였는가? 여운형이 그러하였는가? 굉장히 의아한 일이다. 윤치호는 대체 왜 이런 말을 써놓았을까?
        당시 안창호는 수감 중이었다. 물론 과거에 그러한 발언을 하고 다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여운형이 과연 기호파인가?

        1)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하여 독립운동을 시작 했고,


        2) 안창호의 신임을 받았으며,


        3) 임시정부 안에서 안창호의 노선을 따랐으며,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으나 무신론적 유물론이 아니라 기독교 사회주의자, 사민주의에 가까웠다.)


        4) 안창호의 면회를 다니고 출소 후에 마중까지 나간


        5) 진성 안창호 빠돌이였다??? (사진은 여운형과 말년의 안창호)
        설마, 안창호 빠돌이 여운형이 윤치호에게 기호가 어떻고 서북이 어떻고 말했던 것인가? 실제로 있던 일인가?
        윤치호의 신뢰성이 너무 팍 떨어진다. 진짜로, 이렇게 믿고서 쓴 것인지, 일부러 이렇게 쓴 것인지 굉장히 의아하다.

        설마, 자기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려고, 조작질을 했으려나? 아니면, 일제의 눈치가 보여서 자기 검열 차원에서, 동지 안창호 욕을 써놓은 것인가? 
        미스터리하다. 왜 이런 글을 써놓았는지 여전히 의문이다. 그러나 '나름대로 바른 생각' 을 저장하는 것 같기는 하다.

        (10) 진실의 조각: 1933년(계유년)  10월 6일《금요일》 오전 구름. 오후 흐린 태양.


        서울 집. 나는 여씨에게 이야기했다. 사실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 첫 번째 사실:서북인, 특별히 평안도 사람들은 오랜 세기 동안 억압과 그들 가운데 계층적 분열이 없어서 결집력이 더 있다. 서북인들은 남쪽 조선인들보다 일찍 선뜻 기독교에 귀의하여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근대 교육을 더 빠르게 받았다.
        • 두 번째 사실:서북인들은 다른 지역의 조선인에 비해 보다 더 결집력이 있고 더 많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 사업, 정부 관료 등 여러 곳에서 지도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결집시킬 수 있고, 실제로 결집시키는 조직적이며 사적인 중심인 흥사단과 중심 인물인 안창호를 가지고 있다.
        • 세 번째 사실:그들은 일본인들보다도 남쪽, 즉 기호지역 조선인들을 더 증오하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인들에게 아부함으로써 기호파에 대항하고자 계략을 꾸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 근거는 없다. 안창호가? 조만식이? 왜?)
        • 네 번째 사실: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파벌간의 대결을 기꺼이 이용할 것이다.

        일본인들은 박수치며 좋아한다는 것.  '보도에 따르면'  안창호는 기호인들을 증오한다고 했다.

        오랜 '서북의 차별과 억압'을 이용해, 총독부는 '서북의 분노와 기호인을 향한 복수'라는 프레임을 활용했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연합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1933년(계유년)  10월  8일《일요일》 흐린 태양. 구름. 맑은 아침.


          • 서울 집. (계속 이어진다) 이제 이 네 가지 사실에 비추어 우리 기호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세 가지가 있다.
          • 첫째, 파벌 조직인 기호당을 조직해야 하는가? 아니다. 기호인들은 서북인들이 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의 조직에 집착할 만큼 충분한 결합력이 없다. 그러한 조직체를 구성하는 것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반대파에 비웃음만을 사게 될 것이다.
          • 둘째, 단결력이 있는 조직체를 형성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교회, 사업, 그리고 관직에서 개인적 증오와 반대에 계속 빠지게 될 것인가? 아니다. 나는 그것은 너무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셋째, 우리가 서북계 지도자들을 향하여 친절하게 대하고 그들과 자유롭게 교제하며 비밀스러운 계략 없이 그들과 솔직하게 경쟁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과 협력하자. 그들이 행한 잘못된 행동들을 반대하는데 주저하지 말자. 나는 이것이 조직화된 싸움 혹은 개인적 반대보다 결국에는 그들에게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들에게 조선인들의 파벌싸움을 이용할 기회를 주지 말자.

          (11) 후일담 

          1935년(을해년) 3월 11일《월요일》 사랑스러움. 차가운 바람.

          서울 집. 오후 2시 50분에 안창호씨가 평양에서 서울역에 도착했다. 많은 군중들이 그를 마중했다. 박흥식씨가 안씨와 나를 그의 차로 중앙호텔로 안내했다. 그의 건강은 그가 겪었던 오랜 구류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후 7시 반에 중앙YMCA 이사회가 응접실에서 열렸다. 홍병덕과 정성채의 사임이 수락되었다. 후자의 사임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가 사임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사들이 행동으로 자신들이 거짓되고 추하며 악하고 증오스럽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함축하는 것은 그의 보스인 신흥우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기독교인의 미덕인 진리 선함 아름다움 그리고 사랑을 본보기로 보여 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의 젊은 전향자들에 대한 신흥우의 교리와 본보기는 그저 가증스러운 것이다.

          1935년(을해년) 3월 24일《일요일》 사랑스러움.

          서울 집. 오후에 중앙호텔로 가서 안창호를 방문했다. 처음으로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게 극렬하게 기호파와 대립하고 분파를 조장했는지 따져서 물었다. 만약 그의 설명이 모두 사실이라면 안창호를 버린 사람은 바로 이승만 박사였으며 안창호가 이승만 박사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안창호는 매우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을 거라고 말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1938년(무인년)  2월 7일《월요일》 흐리고 뼛속까지 추움.

          서울 집. 오전 내내 햇빛이 약했다. 경성부청에 가서 여러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경성부윤과 회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조선인들이 황군(皇軍)에 지원병으로 참가하도록 특권을 부여하는 정부의 조치가 수일 내로 내려질 것인데, 천황폐하의 재가를 언제 어떻게 축하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한 자리다. 완벽한 계획과 세부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위원회를 꾸리고 모레 11시 같은 장소에서 모임을 갖기로 했다. 경성부청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 늦게는 얼음장 같은 북서풍이 몰고 온 눈송이들이 흩날리면서 지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대학병원에 입원 중인 안창호씨를 방문했다. 겨우 해골만 남은 모습이다. 그래도 서로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오늘 아침에 그레이스(은희)가 사내아기를 낳았다.

          1938년(무인년)  3월  10일《목요일》 눈 오고 싸늘함.

          ...(전략)...
          지난 밤에 안창호씨가 소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시에 여섯 가지 병을 앓고 있어서 회복될 기미가 거의 없었다. 그를 위해서는 차라리 죽는 게 더 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1938년(무인년)  3월  11일《금요일》 맑고 싸늘함.

          ...(전략)...
          양박사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40명의 경찰들이 안창호의 시신이 있는 방을 둘러싼 채, 가까운 친척 외에는 누구도 이름을 적지 않고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특별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이제 아무도 감히 시신에 마지막 존경심을 표하러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