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직업에 맞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활발하게, 남자가 말했다.


"쉿, 조용히 해. 이러다 들키겠어."


그러나 청자의 반응은 남자만큼 좋진 못했다.


"괜찮아. 어차피 다들 술이나 퍼먹으러 갔을 거야."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남들에게 이 이야기가 들려서는 안된다는 듯 숨죽여 말하는 남녀.


이 남녀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선 남자의 과거사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1 불행


본명 불명, 임의로 '베이컨'이란 이름이 붙여짐, 나이 20 대로 추정됨, 국적 드래고니아, 직업 군인.


이게 남자에 대해서 세상이 아는 모든 것이며, 동시에 남자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아는 전부이다.


의식이란 것이 생길만큼 성숙해졌을 땐 이미 군에 입대하여 소년병으로 살고 있었고, 군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드래고니아 국적의 군인이라 하면 언제나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복지 수준이나 만족도는 현대의 드래고니아 군인이 더 높다는 것도 드래고니아 군인이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만큼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자는 구시대의 드래고니아 군인이었다.


남자는 말하자면 운이 지독하게 없는 사람이었다.


하필이면 1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지속된 신마왕기가 아닌 구마왕기에 태어났고, 하필이면 그와중에 하류층이 제일 생활하기 어려웠다는 드래고니아 구왕정기에 드래고니아에서 태어났다. 그것도 고아로.


군에서 벗어나봤자 일생을 군에 헌신한 그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니 군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하지만 불운하게도, 남자가 배정받은 기숙사 인원들의 질은 좋지 못했다.


"내가 배고파서 그러는데, 먼저 좀 먹는다?"


새치기는 일상이었다. 그나마도 이렇게 말이라도 해주는 사람은 일류였다.


"이름이 베이컨이라고? 드래곤한테 뒤지기 딱좋은 이름이네!"


이름에 대한 비아냥도 간혹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9급 문관 아카키 아카키에비치 같은 사람이었다.


재능은 바닥에 가까웠고, 태생적으로 나서지를 못하는 성격이며, 언변도 없고, 뒷배도 없다.


살아다니는 샌드백. 그게 베이컨의 위상이었다.


그러나 샌드백도 여러 번 치면 한 곳에서 솜이나 모래가 터져나오는 법이다.


베이컨의 내부엔 터지기 직전의 솜이 잔뜩 쌓여 곪아가고 있었다.


아마 그의 구세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는 터져버렸겠지.



#2 헛간의 구세주


구세주를 만난 건 용기사 훈련 이후였다.


유독 사람을 따르지 않던 한 드래곤을 눈여겨 보던 베이컨이 그답지 않은 과감한 용기를 발휘해서 용 우리에 숨어들고 그 드래곤에게 말을 건 것이다.


"아! 이봐, 여기야 여기. 너, 나랑 동류지? 죽지 못해 사는 그런 부류 말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상식에 따라 당연히 답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족을 발견한 남자는 끈질기게 계속 말을 걸어 마침내 답을 받아내고야 만 것이다.


"감독들 호출하기 전에 꺼져!"


물론 정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하지 않았는가? 남자는 그 외로운 드래곤의 마음을 녹이기 위해 갖은 방법을 사용했다.


"여기 오늘 배식받은 생선이야!"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기도 하고-드래곤에겐 간식도 안되는 수준이었지만-,


"어디 가려운 부분은 없어?"


구속된 상태인 드래곤의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그만큼, 남자에겐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동족이 절실했던 것이리라.


남자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일까? 드래곤도 슬슬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래. 계속 나를 귀찮게 하는 이유가 뭐야?"


어느 날은 문득 드래곤이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남자가 답했다.


"너도 나처럼 죽지 못해서 사는 부류니까. 힘을 합치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종족 자체가 압도와 지배를 상징하는 드래곤 앞에서 하기엔 다소 오만한, 힘을 합친다는 발언.


그러나 드래곤은 피곤하기도 하고, 그다지 의지와 긍지가 있는 성격도 아니었던지라 남자를 굳이 위협하진 않았다.


그저 의문만을 표시했다.


"힘을 합친다고?"


남자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응. 실은 말야, 이 세상을 뒤바꿀 엄청난 계획을 세웠는데 나한텐 힘이 부족해서 실행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거든."


"세상을 바꾼다라, 어떤 계획인지 들어나 줄게."


지루한 생활 중의 약간의 자극에 드래곤은 흥미를 보였다. 남자는 관심에 신이 나 자랑하듯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아직은 안돼. 일단 서로의 의견과 생각을 나누고 네가 확실히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되면 그 때 말해줄게."


드래곤의 눈이 찌푸려진다.


"뭐야? 김빠지게."


남자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처했다.


"하하, 어쩔 수 없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상태에서 계획을 말해봐야 네가 동의할 것 같진 않거든. 대신 우리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댈 곳 없는 우리에겐 큰 즐거움이 될 거야!"


계속해서 말을 돌리는 것에 싫증이 난 것일까? 드래곤이 비아냥 거렸다.


"나 참, 무슨 대단한 구세주라도 되는 듯 떠벌리시더니. 역시 헛간에서 구세주 따위를 볼 수 있을리가 없지."



#3 삶


그날부터 남자는 며칠에 한 번씩은 꼭 드래곤 우리에 몰래 숨어들어 그 드래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드래곤들의 암묵적인 지지 아래에서, 남자와 드래곤은 우정과 마음의 기반을 단단히 쌓아나갔다.


모임은 항상 남자의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드래곤은 영생을 산다는데, 혹시 삶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어?"


"없어. 지루하고 짜증만 나네."


드래곤은 투정에 가까운 대답을 했지만 남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이는 것이었다.


마치 그 말을 기억하듯이.


이런 식으로 남자의 질문이 끝나면 이번엔 드래곤의 차례였다.


"그러는 너는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러자 남자는 싱글벙글하며,


"모든 고통의 근원이지."


하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가 깔리면 잠시의 침묵 후 남자가


"드래곤이나 인간이나 이런 건 비슷하네."


하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녹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로는 점점 가까워져갔다.


드래곤의 태도는 날이 갈수록 조금씩 살가워졌고, 남자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드래곤을 대했다.


그래. 부조리와 구타로 인해 일주일을 드러누운 후 드래곤을 다시 만났을 때도 말이다.


드래곤은 일주일 간 남자가 오지 않았을 때 거슬림을 느꼈다.


영원을 사는 드래곤이 고작 몇 달 동안 남자를 만나다 일주일 간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거슬림을 느낀 것이다.


이 생소한 감각을 처음엔 드래곤은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무리 몸을 살펴도 특별히 이상한 곳은 없었다.


그저 남자가 긁어주던 부분이 좀 더 가려웠을 뿐이다.


일주일 후 남자와 재회했을 때, 드래곤은 남자에게 화를 냈다.


왜 화를 내는지는 모르는 채 말이다.


남자는 그저 웃으며 드래곤에게 말했다.


"그냥, 사는 게 좀 힘들어서 늦었어."


그래. 모든 문제는 사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4 벽


어느덧 드래곤과 남자의 만남도 1년이 다 되어갔다.


밀회는 이제 그들의 삶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달콤한 포상이었다.


남자는 드래곤과 만난 지 딱 1년이 되던 그 날,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제 내가 구상한 계획을 말해줄게."


드래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심 그의 동료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우리들이 지난 1년 간 나눈 이야기 기억해?"


"응. 주로 사는 문제에 관한 거였지."


"그래. 사는 문제."


이어질 말을 생각하듯 남자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어서, 그 언제보다도 긴 남자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살아있는 상태라는 것은 큰 메리트 없이 고통이라는 페널티만을 부여받는 상태야. 모든 고통은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모든 생명이 사라진다면, 아무도 고통받지 않는 이상향이 완성될 거야."


세상을 부정하고 고통에 굴복한 이의 광기에 찬 연설.


그러나 그 연설은 남자가 했던 그 어떤 말보다도 청자를 끌어들이는 능력이 있었다.


"애초에 생명체가 살아가는 이유가 뭘까? 신들의 노리개가 되기 위해? 자손을 잇기 위해? 결국 아무 의미가 없잖아! 어차피 언젠간 다 죽을 거고, 신들의 노리개가 되는 건 차라리 죽는 게 더 속편할 마당에!"


남자의 말에 점점 절규와 울음이 섞여간다.


"이 세상은 존재부터가 부조리해. 고통으로 가득찬 방이나 다를 바 없다고. 그러니 우리, 그 방의 벽을 부수자. 이 벽을 부숴버리는 거야!"


그래. 이게 서론의 사건의 전말이다.



#5 파괴


서론에서 보았던 대화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유지되었다. 그 침묵은 이번엔 드래곤이 깨게 되었다.


"그럼 끝없는 파괴가 네가 바라는 거야?"


"응."


제발 부정해달라는 뜻으로 한 말에 남자가 긍정을 해버렸다.


남자에게 이 세상에 소중한 것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도 그저 세상을 파괴할 도구로 본 것인가?


드래곤은 남자와 대화를 나눈 뒤 오랜만에 현기증과 피로감을 느꼈다.


"그럼 이 세상엔 네가 바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는 거야?"


그러자 광대처럼, 남자가 익살스럽게 말한다.


"아니지, 아니야. 사랑하기에 부수려고 하는 거야. 생각해봐. 나는 살아있는 것이야말로 고통이라고 생각한다니까?"


또 잠시의 침묵. 또 벌어지는 드래곤의 입.


"그럼, 나 이 계획에 동참 못해."


남자가 처음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지? 난 너를... 동료라 생각했는데!"


"왜냐면..."


잠시 뜸을 들인 후 드래곤은 말했다.


"파괴야말로 네 사랑의 증거라면, 난..."


...


"네 손에 부숴지는 첫 번째 생명이 되고 싶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