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 결과를 보고 보수든 진보든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놀라 자빠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보수는 그렇게 처참한 패배를 당할지 몰랐었기 때문에 경악했을 것이고, 진보는 진보대로 예상을 뛰어넘는 대약진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을 테니까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나 역시 그런 결과가 나올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어떤 권위 있는 해석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느끼는데, 수많은 전문가들이 이미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의 해석을 종합해 보면 우리 사회의 이념 지형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어떤 진보신문의 탑 기사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진보가 새로운 주류로 떠오른다는 제목을 달고 있더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정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보수적인 게 사실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들 보면 일반적으로 고학력자나 저소득층은 진보적 성향이 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공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예컨대 MB정부의 (얼치기)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한 여론조사를 보면 저소득층이 압도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경향을 만들어낸 결정적인 이유가 보수언론의 프로파간다라고 보고 있습니다.
어떤 경제정책이 무슨 결과를 빚을지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맹신하는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보수언론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보수적 메시지에 그대로 포획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니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써도 저소득층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지지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보수언론의 프로파간다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는 않을 고학력층의 보수적 성향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
미국이 그 전형적인 예지만, 다른 나라들의 경우 진보적 세력의 주축은 바로 고학력자들입니다.
특히 대학 교수들 중에는 진보적 인사들의 비중이 현저하게 큽니다.
오죽하면 “Why are professors liberal?”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나 논문이 나와 있겠습니까?

내가 몸 담고 있는 경제학계의 경우에도 유명 경제학자들 중 대표적인 진보 인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P. Krugman, J. Stiglitz, T. Piketty 교수 등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내 지도교수이며 연방준비은행 부의장을 역임한 A. Blinder 교수도 그 중 하나이구요.

그런데 우리나라를 보면 대학교수들 중 보수적 성향을 갖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고 느낍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어떤 이슈가 있을 때마다 6천 여 명에 이르는 보수적 대학교수들이 집단적으로 성명을 내는 걸 보지 않습니까?
6천 명이라는 게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닌데, 그런 다수가 결집하는 걸 보면 교수 사회의 보수적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지만, 특히 경제학계의 보수성향은 정말로 숨 막힐 지경입니다.
솔직히 말씀 드려 나는 경제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정치나 사회에 대해 별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말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이게 바로 우리 경제학계의 현주소입니다.

미국에서 “Why are professors liberal?”이란 제목의 분석이 나온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왜 한국의 경제학자들은 보수적인가?”라는 분석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자들이 그런 연구를 하는 것 같은데, 정말로 나는 우리 경제학계에 40년 동안 몸 담아 오면서 늘 그와 같은 의문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으니까요.
미국 유학을 했을 때 진보적인 경제학자의 지도를 받았으면서도 우리나라에 돌아오면 마치 보수의 아이콘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내 개인적 경험을 말씀 드리자면, 그 동안 나는 경제학자라는 점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점에서 늘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 내 연령대가 바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처지지요.
이번 선거에서도 유일하게 2번을 압도적으로 지지한 바로 그 연령대에 속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동년배의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언제나 외톨이라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거기다가 내 거주지는 서울 강남입니다.
개표 결과 서울은 온통 푸른 물결인데, 오직 섬처럼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는 바로 그 지역이랍니다.
이웃들과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는 하지만, 가끔 세상 얘기 나오면 “아, 그러세요?”라고 얼버무려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난 투표장에 갈 때마다 내 표는 어차피 ‘사표’(死票)가 될 걸 뻔히 알면서 표를 던집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건 고등학교나 대학 동창들도 거의 모두 나와는 정치적 성향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동창들의 단톡방에 내 심기를 거스르는 글들을 퍼나르는 걸 보면서 탈퇴의 유혹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모나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간신히 참긴 하지만, 기분이 좋을 리는 전혀 없지요.

당연한 말이지만, 내 가까운 지인 중에는 앞에서 말한 보수의 네 가지 조건(경제학 전공, 연령, 강남 거주, 동창관계)의 셋 혹은 넷을 가진 사람이 거의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 외톨이라는 느낌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죠.
내가 저녁이나 술자리 약속을 거의 하지 않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날이 많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또한 동년배 지인보다 학생들과 어울리기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교수라는 직업 때문만도 아니구요.

이렇게 보수에 철저하게 둘러싸여 살아온 나에게 진보가 우리 사회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다는 말이 조금 생소하게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번 총선 결과가 우리 사회에 무언가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면, 한번 기대를 걸어봄직도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런데 이 기대가 정말 현실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정부와 여당이 어떻게 하느냐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겸손한 자세로 이번 총선에서 국민이 보내준 열렬한 지지에 충실하게 보답한다면 이 땅에 진보가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진보가 새로운 주류가 되기는커녕 영원한 변방으로 내몰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정부와 여당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국민이 보내준 지지를 무거운 책임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정치가들이 일단 권력을 잡은 다음에는 그런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제발 이번만은 약속을 제대로 지켜 나라도 살리고 진보도 살리는 성과를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에라이 야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