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공상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흐린 생각이 골방 벽에 도배지로 쓰였다. 아직 잠들지 않은 아이들의 한숨이 빈 새벽을 채운다. 사라진 새벽잠의 자리는 늙은 이들에게만 허전하지는 않은가 보다. 자그맣게 삼킨 공기가 큰 숨으로 비강을 타내리면, 답지 않게 차가운 물이 정수리를 부빈다. 미처 씻겨내리지 못한 고민들은 삶 속에 시적인 의미를 갖는가? 그렇다는 생각이 들 듯도, 말 듯도. 조용하던 벽시계가 목소리를 점점 키우고, 굽은 허리가 조금씩 아파올 만큼 골똘히 쪼그려 있을 때면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가.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의 세계는 기실 작품 바깥 우리의 세상과 이렇다할 거리를 두고 있지 않다. 두 연의 간단한 구성. ‘나’로 명명된 화자의 입술 밖으로 윤동주적인 내재가 새어나온다. ‘쉬운 일’이라는 잠자는 것마저 못 하고 있는 화자의 비가역적 무능이 첫 행에서부터 독자를 옭는다. 속박 속에서 그저 눈뜬 채로 누워 있는 ‘나’의 시적 자아 속으로 활공처럼 던져진 2행의 관조가 시 전체를 담담한 어조로 연마해 간다. 눈을 뜨고 있다는 반수의적 행위가 고전 형이상학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할 때, ‘나’와 ‘나’의 감각, 그리고 세계의 실존성이 시에는 오히려 부정적인 시상으로 스며들어 있다. 시의 제목처럼 ‘잘못 사는’ 이들에게는 외재적 물성의 인식, 또 그 실존마저 부정적 대상인 것일까. 


 무난한 어조와 같이 눈에 띄는 특수한 언술이 없는 담백한 시임에도 3행, 그리고 4행에는 서로 다른 두 속성이 한 행에서 엮여 있다. 오래간 트인 두 눈으로 인식된 공간성이 시침의 긴 새벽 사이로 ‘틈’을 만든다. 3행-4행의 변주는 공간화된 시간이 다시 환상성을 취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으나, 분명 짧지 않은 행임에도 전체적인 시행의 틀을 전혀 깨지 않는 범주 안에서 나타난 반복이 다소 이질적으로, 또 과도히 소심한 시도로 느껴지는 데가 있다. 텍스트성에서 묻어나는 망설임이 독자의 귓바퀴에 오를 때 시는 혼잣말의 장벽에 그치게 된다. 다만, 3행에 비해 미약하게나마 구체화된 4행의 문장이 ‘공상’이라는 보편적 소재를 통해 생경치 않은 경험으로부터의 공감을 얻어내고 있어 무의미한 시행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시에서,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나’는 밤 같은 생각에 갇힌다. 5행의 시어들이 쉼표로 짜이면서 급격히 드러난 우울의 정서가 화자인 ‘나’와 외재적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후회나 비애 따위가 이끄는 공상이 몸을 무겁게 꿇어앉히고 마냥 흘러가는 경험, 그 경험들이 5행의 단적인 인식 앞에서 감읍한다. 그러나 늘, 그 효용과 무관히도 울적한 생각은 차갑게 깨져 왔지 않은가. 찬물이 닿는 ‘나’의 정수리 살갗에서 멈춘 번뇌가 내밀한 속살에 도포된 죄책감을 조금씩 긁어내고 있다. 찬물이라는 장치가 문학에서, 관용구에서 갖는 도구적 특징은 으레 ‘깨달음’ 내지는 ‘전환’이다. 하나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가 찬물을 들이붓는 방식은 이와는 많이 다른데, 1연과 2연 사이에 붙어 있는 소재임에도 태도나 정서 등의 극적 전환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느낌’으로서 비물리적이었던 시적 대상을 동적 묘사로 서술함으로써 구체화하는 모습이 짙게 나타난다. 시에서나, 우리에게나, 부정에 가까울수록 빠르게 깊어 가는 정서가 야속할 따름이다. 


 2연에서의 ‘나’는 여전히 무력하다. 이렇다할 의사 표현 없이 누워만 있는 상황이 가감 없이 제시되나, 시적 물음의 그늘은 ‘나’가 ‘잘못 살고 있다’라는 명제의 자기증명만이 드리우고 있다. 자아에 대한 의문이면서도, 동시에 시적 상황에의 정의내림. 1연 6행에서 쏟은 물 한 바가지가 ‘나’의 가죽에 감겨 한 행만에 정서를 다시 지피고 있다. 그러나 아직 캄캄한 자유시의 목소리에 몸을 내맡긴 화자, 그 ‘나’를 관음하는 우리는 어느 순간 그의 우울에 함께 젖어 있지 않은지. 우울은 흐르고, 스미고 적신다. 몸 깊이 슬픔을 적시고 돌아누운 ‘나’의 ‘젖은 몸’을 안는다-고 하려면 뒤에서 안아야 하겠다. 뒤로 안길 때 안기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등으로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촉감과 몸뚱이를 끌어잡는 두 팔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화자 ‘나’에게 ‘악마 같은 밤’이, ‘밤 1시’의 어둠이, 몸을 적신 우울이 그렇다. 행위 불능의 시상 속에서 ‘나’는 합리성을 찾는다. 합리화를 찾아 간다.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가 내재적으로 외치는, 아니, 속삭이는 이야기는 소리가 없다. 정적인 정적 위에서 정서의 지속이 시를 이끌어 나간다. 서정문학이 언제나 야누스적인 그것을 취해야 할 이유는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 되겠다. 일견 짧은 글줄이 흰 모조지를 헤치고 우리에게 다시, 또 다시 묻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잘못 살고’ 있는가? 어떤 밤에 ‘속고’ 있는가. 


——


 상술한 것처럼, 추상이 아닌 객체로서의 우울은 유체와 같은 물성을 지닌다. 공간에 있어 유체는 충족의 질료이다. 플로티노스적 언어에서 시적 일자이며 화자인 ‘나’로부터의 정서적 유출이 글줄을 채우는 세계의 서경이 이렇게나 벅차오를 수 있을까. 시작법의 교과서격 서적인 「현대시작법」의 저자이자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는 오규원 시인이 1978년 발표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시는 오늘날의 우울과도 놀라우리만치 깊게 감응한다. 45년 전의 정서가 이제의 그것과 마냥 같지 않음을, 한 번이라도 세대 갈등을 겪어 본 모두는 알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반세기가 지난 불우한 서정의 표현이 엷은 서사 아래서 고개를 치켜들 때 우리는, 어쩐지 익숙한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형식적 시각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공감의 실존을 단지 공간적인 시어의 덕으로 돌릴 것이냐-하는 문제는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닌 것이, 서정 갈래의 근원적 특질인 공간의 함축, 즉 세계의 자아화는 이제 비단 시문단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코로나바이러스-19의 유행을 전후하여 국내 소설 문단에는 ‘공간’에 침습된 서정 서사들이 전염병처럼 나타났다. 2010년대 초에 큰 인기를 얻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같이 일상적 공간이 서정성을 함의하며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서사 갈래 작품들은 불과 2~3년간 숱하게 출판되면서 많은 독자를 끌어모았다. 대표적으로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김지윤, 2023), 「불편한 편의점」(김호연, 2021),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유영광, 2023),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윤정은, 2023),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황보름, 2022), 「제인의 마법 살롱」(박승희, 2023), 「공방의 계절」(연소민, 2023), 「위저드 베이커리」(구병모, 2022),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미예, 2020), 「환상서점」(소서림, 2023), 「지구 끝의 온실」(김초엽, 2021) 등, 2020~2023년에 출판된 베스트셀러들의 거의가 이들과 같이 공간에 의존한 서정이다. 빨래방, 편의점, 상점, 세탁소, 서점, 살롱, 공방, 베이커리, 백화점, 책방, 온실. 다분히 일상적이며 ‘쉼’만이 아닌 다른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시설으로서의 공간들의 나열이다. 이 밖에도 「달팽이 식당」(오가와 이토, 2022),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마치다 소노코, 2023), 「치유를 파는 찻집」(모리사와 아키오, 2023), 「템스강의 작은 서점」(프리다 쉬베크, 2023)처럼 해외 소설 또한 국내 출판 시장에서 인기를 끈 바 있다. 


 소위 ‘힐링 공간’물. 이러한 갈래의 소설들이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쉬이 올라있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두드러지는 요인은 무엇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유행이다. ‘일상으로의 회복’을 표어로 내걸던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 조치만 보더라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4년에 가까운 우리의 일상을 앗아간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한 일상의 박탈과 ‘코로나 블루’의 사회적 영향 속에서 심적 안정과 평범한 생활에의 향수를 충족시켜 주는 이들 소설의 등장은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커다란 유행의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언제나 그 내면에는 무언가의 결핍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새로운 제도를 마주하고 방 안에, 집 안에 틀어박혀 시 속의 ‘나’처럼 스스로에게 회의를 갖고 살던 이들에게 이전에는 지겹게 드나들던 일상적 공간에서의 온난한 서사는 다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다른 배경은 서정 갈래의 실질적 몰락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아니더라도 현대 사회는 충분히 삭막하게, 적어도 압축적인 정서 표현을 끈기 있게 읽어낼 여유, 혹은 의지를 갖기 어려울 만큼은 경직되어 있다. 그러니 보편된 서사의 변화는, 순수문학으로서의 운문이 2010년대 후반까지도 서사 갈래만큼의 대중화에 실패한 상황에서 으레 시 속에서 찾을 수 있던 공간적 서정성이 소설에까지 전이된 탓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잠시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를 다시 보자. 시의 공간은 ‘잠자리’이다. 정서는 ‘우울’ 내지는 ‘회의감’일 것이다. 하나의 시적 대상, 이 시에서는 ‘공간’이 되겠다. 대상 속에 정서가 충분히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함수적 서정이 소설성에 배어들 때, 작가는 어떤 구성요소와 서사적 정서를 조응시켜야 할지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익히 알다시피 소설의 구성 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그러나 가장 먼저 작가는 작품 속에 중점적으로 둘 요소로서 ‘시간적 배경’을 강탈당한다. 특정한 시간대가 정서를 이루고 있다면, 그에 공감할 수 있는 세대층이 한정되므로 대중성을 잃기 쉽기 때문이다. ‘인물’과 ‘사건’은 조금 다른 이유이다. 현대에 이르러 문학적 갈래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당초에 엄격히 구분되던 갈래마다의 요소가 점차 옅어지며 ‘인물’과 ‘사건’을 3요소 가운데 중점으로 두는 형식들은 모두 극 갈래가 독점하고 있다. 매체의 성장으로 극 갈래의 저변이 확장됨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진 데도 있지만, ‘배우’라는 외재적 요소가 ‘인물’에, 영상 매체의 급속한 발전과 쾌락주의적 풍조가 ‘사건’의 발달에 끼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바탕에서, 대중성을 위한 소설은 결국 작가의 의지와는 큰 관계 없이 ‘공간적 배경’에 감정을 담게 된다. 이들이 바로 현대 소설 문단에 있어 공간성의 유행을 쌓아올린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강제로 빼앗긴 일상에 대한 절대적인 결핍이, 강제로 빼앗긴 여유로 인한 단편적 선택이 한국의 서정을 공간성의 그것으로 내몰고 있다. 얇은 시집의 표지를 비껴나오던 목소리가 이제는 두꺼운 소설책을 뚫고 울리듯이 부르짖고 있다. 잘못 살고 있지 않으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러한 물음에 쉬이 답할 수는 없다. 또 침묵할 수조차 없다. 우리는 대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고, 부러 당당히 이야기해야만 한다. 결핍과 우울이 얽어 놓은 공간 속에 언제까지고 머물러서는 안 될 일이다. 시의, 소설의, ‘나’의 물음에 직접 답해야 한다. 어느 밤이든, 어느 방이든, 또 어떤 마음에서든 우리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강건히 외쳐라. 찬물을 조금 적시고, 또 그들이 물어올 때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