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티브이를 켠다. 짝수 채널은 늬우스, 홀수 채널은 홈쇼핑이다.

 

 낯선 쇼호스트의 목소리, 이전에 있던 호스트는 화장품 회사로 스카웃됐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들었다. 노인정에서 오가는 말들이 대게 그런 싱거운 것들이다.

 

 리모컨을 내려놓고 허리를 오른쪽으로 틀어 전기장판을 끈다. 요사이에는 누렇게 변한 전기장판의 다이얼을 돌리는 것에도 힘이 부친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어딘가가 조금씩 고장 나는 중임을 체감한다. 벽을 짚고 서서 식탁 의자로 향한다. 관절이 비명을 지른다. 누르스름하게 물때가 득실 한 정수기의 단추를 눌러본다. 어제부터 물이 나오지 않는다. 암만 생각을 해봐도 단수기간이라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수돗물을 마시는 게 마음이 편할 듯하다.

 

 눈을 돌려 정수기 우에 사진을 본다. 곱상한 할매 한 명이 이쪽 편을 보고 있다. 고생만 시켰거늘 사진 찍으러 가자는 말에 뭐가 그리 기쁜지 듬성듬성한 이를 들어내 놓고 환히 웃고 있다. 꺼슬꺼슬해진 손으로 액자를 쓰다듬는다. 거참 곱게도 늙었구만

 

 눈을 감고 잠시 잠시 떠올려 본다. 미아리 시내에서 머리를 곱게 따고 목이 새하얀 아가씨가 타자기를 두드리고 창너머에는 촌티를 못 벗은 사내 하나가 아가씨를 닮은 허연 안개꽃을 한가득 들고 쭈뼛쭈뼛 서있다. 이내 사내는...

 

삐리리리—

 

 현관에 누가 온 모양이다. 문을 열어보니 우편봉투만 딸랑 있다. 요즈음은 다들 이런 식이다. 정성스레 딱풀로 눌러 붙인 봉투를 뜯고 종이를 빼서 읽어 내려간다.

 

 어느덧 강렬한 햇빛이 내려째던 여름이 지나고 곡식이 영글어 가는 가을이 우리 곁에 왔읍니다. 모든 일이 대통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사납금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이렇게 편지를 작성합니다......총 50만 원을 입금해주시기 바랍니다. 집주인 백

 

 이런 호랑말코 같은 놈. 어제 피곤해서 일찍 자느라 깜빡하고 월세일을 하루 밀린 것 가지고 집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독촉장을 보내왔다.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다. 이번 달 월세를 어쩌지. 아들한테는 말할 수 없다. 자식 놈은 늦은 나이에 얻은 막둥이가 적잖게 사랑스러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한 서너 시간 뒤에 자전거 가게에서 폐지가 나온다. 마실 나간 김에 들려서 좀 줏어와야겄다.

 

 낯선 천장이 보인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에는 익숙한 얼굴들과 처음보는 얼굴들이 날 내려다 보고 있다

내가 왜 여에 있는거지?

 

 아들내미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아버지께서는...생전에...원하셨습니다...더이상...무의미한...

 

 기억의 파편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달려오는 8톤 덤프트럭, 순간 세상이 멈추고 모든 게 한없이 느려진다. 날아가는 박스 쪼가리, 쪼가리를 잡으려 뻗은 손, 미쳐 보지 못한 신호등의 빨간 불, 빨간 피, 빨간 세상

어린 시절 겪은 폭격이래 이렇게 붉은 것은 본 적이 없다.

 

 양손에 안개꽃을 들고 있는 아가씨 수줍은 듯 하얀 볼을 발갛게 붉히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나는 그런 아가씨의 볼에 꺼슬꺼슬한 손등을 가져다 대어 쓰다듬는다.

삐이이— 소리가 듣린다. 

이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썩 좋은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