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의 동료들에게도 이름이 없다. 군대라는 조직 안에서 이름은 없다. 그저 숫자일 뿐이다. 몇 사단 몇 여단 몇 연대 무슨 계급 몇 번. 그가 부상을 당하든, 전과를 세우든, 전사하든 결국은 높으신 분들이 읽는 종이에 쓰인 숫자일 뿐이다.

 전선은 오랫동안 교착 상태를 유지했다. 참호를 파고 들어선 지 몇 주, 아니 몇 달이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 대충 2주가 넘어가자 모두 날 세는.것을 그만뒀으니. 눈에 덮인 우거진 숲 속에는 킬로미터 단위의 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었고 그 기다란 구덩이를 따라 곳곳에 움푹 파인 자국이 수도없이 많았다. 평행선을 그리는 두 기다란 구덩이 사이의 지대에는 수많은 시체와 장비와 피가 낭자했고, 새하얀 눈은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정찰 보고! 전방 적 전차부대 발견!"

 거대한 무전기를 등에 지고 있는 통신병이 외쳤다. 제기랄, 또 전차인가. 이 망할 놈의 전차는 몇 대를 부숴도 몰려오는구만. 우리 지원은 없나? 속으로 투덜거리며 그는 대전차 기관포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이상하게 조용한 적진 쪽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무한궤도의 소리가 들려왔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하나둘씩 천천히 국방색 전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1목표 궤도, 제2목표 포탑, 제3목표 승무원. 훈련병 시절 수없이 들었던 대전차전 행동 요령을 머릿속으로 되뇌이며 그는 천천히 가장 앞의 전차를 조준했다. 지금이다, 그는 조용히 외치며 방아쇠를 담겼다. 40 mm 기관포는 총구에서 불을 뿜어냈다. 

 제1목표 궤도. 정확히 조준된 기관포의 40 mm 포탄은 금방 궤도를 망가뜨리고 적 전차를 이동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제2목표 포탑, 을 외치며 포탑을 조준하는 순간, 그는 전차의 포신이 정확히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포신이 불을 뿜었다.

 포탄은 그가 쥐고 있던 기관포에 명중해 큰 폭발을 일으켰고, 수많은 파편들이 날아와 그의 몸에.차례차례 박혔다. 폭발로 인해 날아간 그의 몸이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주마등이 스쳐지나가며 후회와 원망과 슬픔이 그를 덮쳤다. 국가의 미래와 영광을 위해 싸우라는 프로파간다에 넘어가 자원입대한 그를 눈물로 배웅하시던 부모님과 여동생의 모습이, 꼭 살아돌아와 나중에 함께 술 한 잔 하자던 고향 친구의 모습이, 훈련소에서 처음 만나 친해졌고 나중에 자신의 바로 옆에서 죽어간 동기의 모습이, 그리고 전선에 도착했을 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들을 맞이하던 분대장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처음 전선에 배속됐을 때 자신이 조국의 영광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고 매 전투가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전투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쟁은 명예롭지도 영광스럽지도 않았다. 서로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서로를 열렬히 증오했다. 전우의 복수를 한다면서 항복한 적군을 단체로 때려 죽였다. 화학무기를 살포해 아군과 적군에서 모두 사상자를 냈다. 그리고 살육, 무차별적인 살육과 광기만이 전장을 지배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스쳐간 마지막 생각은 이랬다. 조국의 영광이고 나발이고 이딴 건 필요 없다. 그저 다시, 다시 그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


















XXXX 정부에서 XXXX XXXXXXX 상병의 가족에게 전달함.

XXX 부대의 XXXX XXXXXXX 상병이 19XX년 X월 XX일 전투에서 명예롭게 전사하였음을 이와 같이 통보하는 바입니다.

XXXX 정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