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하게, 또는 절망적으로 살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들을 보면 가끔씩 자신이 

먹는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묘사가 있다. 


음식의 맛을 느끼는 즐거움을 잊어버린 채 

그저 살기 위해 배를 채운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별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퇴근 후 간단하게 즐기는 식사나 디저트가 

가장 커다란 지금의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닌가 싶었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높은 당도를 뽐내는 과실이나, 그 과실로 만들어낸 

에이드와 젤리, 정성으로 만들어낸 크레이프 케이크는 

언제 먹어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들이다. 

한 달에 4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 지출의 

9할은 모두 먹는 것들에 소비하는 돈이었다. 


내가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중증 비만으로 시달리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은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생크림과 

휘핑크림을 처리하기 위해, 간단하게 

크림스튜를 만들어 저녁을 먹을 예정이었지만,

버스 안에서 마주친 여성 때문에 식욕이 가라앉았는지, 

그날만큼은 입안에 무언가를 넣고 싶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 한구석에 놓여있던 샐러드용 야채를 

한주먹 정도 꺼내 적당한 과실 드레싱을 두르고,

컴퓨터 책상 앞에서 우물우물 씹었다.


씻고 나서 책상에 앉으니 시계가 

9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부터 12시 30분 까지는 

여유롭게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보통은 이때 즈음 보던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를 틀거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내 가슴속에는 정말로 딱히 들어있는 게 

없는 것인지, 3류 로맨스 소설이나 추리 소설을 

읽더라도 화자가 연출하려는 풍경이 쉽게 머릿속에 

연출되는 것이 좋았고, 


연애 소설을 읽으며 그것이 내 상황인 마냥

작위적으로 그려진 이야기 속에 빠져드는 것이 좋았다.

혹자는 달리는 것으로 잡다한 생각을 잊는다고 하는데,

내 경우도 그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었다. 


오늘은 다른 화자가 그려놓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이야기 속에서 나 자신을 잊고 싶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다, 대신에 자기 전까지 도시 건설을 

장르로 삼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켜서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지형부터 기후, 날씨 도로 설계부터 각종 

정책 및 거주 중인 사람들의 성격까지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이 도시 건설 게임은, 


사용자가 여러 모드를 섞으면 실제 현실에 있는 

건축물, 차량, 기차, 교량 등을 이용해 현실과 

꼭 빼닮은 도시를 만들거나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간략하게나마 구축하는 것도 가능하다. 

마치 백지에서부터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5달 전 즈음부터 시작한 이 게임에서 나는

62km의 작은 육각형 섬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도시를 

간략하게나마 만들어 놓았다.


섬의 외각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을 만큼

장엄한 산림지대를 조성해놓고, 

도시는 사무 단지와 주거 구역을 숲과 여가 공간을

벽 삼아 구분 지어 미려한 경관을 연출할 수 있게 했다.


매연과 오염물질이 다량으로 방출되는

산업단지는 도시 외곽에 장엄하게 구축된

산림지대 속에 최대한 작은 규모로 숨겨놓고,

산업 단지에서 생산되는 물품들은 최대한

외부 세계에서 수입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두었다,


나는 나 자신처럼 불필요하고 더러운 물질들을

배출해내는 그 공장들이 싫었다,


또한 어디까지나 게임인 만큼 청년 구직난이나

비싼 집값은 이 세계에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산을 깎고 도로를 깔아 주거시설을 건축해놓으면,

마련된 주거시설의 수용 량만큼의 사람들이

저렴한 값에 집을 사고 들어와 생활했으며,


필요한 만큼의 여가 시설과

미용, 교육, 관광, 소비시설을 구축해놓고

인구수만큼 사무시설을 늘려놓으면

섬 안에서 태어나 섬 안에서 교육받고

자란 인재들이 그대로 섬 안에 있는 기업에

한 명도 남김없이 취직해 그들끼리 가정을 꾸리고,

또다시 태어난 2세들이 정형화된 삶을 영위하며

단순하고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태어나고 죽어간다,


도시 내 시민들의 행복도는 

무척이나 높았다. 시스템만 적당히 갖춰 놓으면

그들은 스스로 집을 개조했고, 사업을 확장시켜

도시의 가치를 높이고 자신들의 삶의 질을 높여나갔다.

다섯 달이나 게임을 플레이한 시점에서,

나는 더 이상 이 도시를 건들만한 요소가 없었다.


그저 주민들의 불만사항을 확인하고,

도로나 교통수단의 노선을 간단하게 수정하거나

도시 차원 해서 불꽃축제나 월드컵 같은 대형 행사를

가끔씩 진행하며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말고는 특별히 즐길만한

콘텐츠가 남아있지 않았다.


외부 세계와의 연결점이라고는

이틀에 한번 들어오는 화물선과 여객 크루즈선,

도시 한복판에 작게 위치한 공항에서 탈 수 있는

항공기들뿐인 유토피아와도 같은 이 도시를

몇 시간이고 멍하니 바라보면서,


내가 이 도시에 들어가서 평범하게 살아가며

틀에 짜인 행복감을 느끼다가 평범하게 늙어

숨을 거둘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싶었다.


사랑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리고서라도,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잊어야 한다 할지라도,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에 세계에 들어가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상관없을 것 같았다.


정말 얼마나 바보 같은 이야기인가

싶어 스스로 코웃음이 나왔다.


시계의 시침은 자야 할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평소처럼 이름도 모르는 피아노곡을 적당히 재생한 채,

저녁에 버스에서 옆에 앉아있던 여성이 사실은

헤어진 그녀였다는 내용의 꿈을 꿀 수 있으면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존재하지도 않는 무언의 신님에게

그런 꿈을꾸게 해달라는 작은 바람을올리고

침대에 올라가 조용히 잠에 들었다.


너무나도 짧게 느껴진 일주일을 보내고 또다시

주말이 찾아왔다. 전날 밤에 알람을 맞춰놓지 않았기에,

한참 늦잠을 자고 2시가 되어서야 눈이 떠졌다.


짙은 회색의 암막 커튼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을 바라보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정황상 12시간은 넘게 잔 듯했지만

꿈을 꾼 것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특별히 잡아놓은 일정도,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도 없는

나는 기지개를 곧게 펴고는 집 근처 지역 도서관에서

평소처럼 시간을 때울까 하다가 문득 회사 누나들이

일주일 내내 주말에 열린다는 불꽃축제

얘기를 하던 것을 떠올렸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소유한 대기업이

사회 공헌활동의 일환으로 수십억에 가까운 돈을 들여

매년 이맘때 대형 불꽃축제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마천루 주위에서 흩뿌려지는 수많은 불꽃들이 

만들어내는 장관은,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공원에 앉아 가슴속에 감동적인 기억을

새겨 넣기에 더할 나위 없는 충분한 행사였다.


그러나 장엄하게 펼쳐지는 불꽃들을 상상하기도 전에,

두통이 몰려오는 기억들이 먼저 머릿속을 휘감았다,


2년 전 그녀와 똑같은 불꽃축제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녀와 헤어지기 일주일 전 일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서로의 집 근처에서

바로 어제 만났음에도 서로 반 년은

보지 못한 것 같은 모양새로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서로 강하게 껴안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고는 격주로 타던 버스에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올라탔다.


버스 뒤편에 구석 자리에서 서로의 어깨를 기대며

여명이 드리운 듯한 평온함을 공유하며,

한쪽 귀에 꽃은 이어폰으로 같은 음악을 듣고는,

자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매만지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른다.


5미터만 떨어져도 서로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강렬한 인파와 소음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대화하고,

줄지어진 푸드 트럭 앞에서 감바스 알 라히요를

나눠먹으며 웃고 떠들던 그 나날들이 좋든 싫든

강제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때로는 검은 하늘에 순백색 글자를 새기는 것처럼,

때로는 순수하게 짙은 검은 도화지에 노란색을

아주 약간 섞은 하얀 물감을 흩뿌려놓는 것처럼,


불꽃들은 아름답게 터지기 시작했을 때

그 아이는 해맑게 웃으면서 저 멀리 펼쳐지는

불꽃들의 장관을 바라보았고,


나는 불꽃을 잊은 채 그 아이의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크고 아름다운 눈망울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들을 온데 담아 강렬하게 폭발시키는 불꽃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그 아름다움에 견디다 못해

그녀를 껴안고 키스할 때, 그녀의 입가에서

오전에 먹은 마늘과 허브 냄새가 겉돌던 것조차

지금까지 너무나도 선명하다.


"세상이 우리의 미래를 축복하는 것만 같아,

너무 행복해서 이 마음을 힘들어하는 누구에게

나누어주고 싶을 만큼,  오늘 터진 불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억할 수 있을 만큼만

시간을 멈춰놓고 싶어, 서원이 너랑

이런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나 지금

너무 행복해, 너무 행복해서

울고 싶어져 버릴 만큼"


눈 앞에 지예의 눈동자가 눈물에 글썽이며 반짝였다.


"입 벌리고 불꽃들을 바라보는 네 모습이

너무 예뻐서 불꽃놀이를 별로 못 봤어.

눈앞에 보이는 건물은 작년에 완공되어서

올해 처음 불꽃을 휘날리며 반짝이는 거잖아,

오늘을 열심히 기억하지 않아도 우린 내년에도,

또 다음 해에도 이 불꽃을 바라보며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자, 사랑해 너무나도."


마지막 피날레를 장식하듯 순백색 불꽃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큰 크기로 피어올라

시간이 멈춘 듯 끝없이 폭발하기 시작했고,

주위에 앉아있던 연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껴안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녀와 입을 맞추며 서로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소리쳤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주변의 소음이 너무나도 커서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도 들리지 않았지만,

서로를 사랑한다고 세상의 맹세하는 외침이었음을,

들리지 않아도 나와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문득 그 불꽃축제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돌아갈 수 없음에도, 혼자서 쓸쓸히

터져 나오는 불꽃을 바라보며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빛바랜 추억을 혼자서 곱씹어나갈 뿐임에도,

그날과 똑같이 밤하늘에 수놓은 불꽃들을 바라보며

사랑했던 그녀를 떠올리고, 가슴속에서 맴도는 추억을

두 번 다신 잊지 못하도록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겨놓고 싶었다.


행사 시간은 해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7시이기에,

아직까지는 시간이 여유롭게 남아 있었다.

느긋하게 씻고, 4시쯤에 집을 나와 버스에

올라탔고, 차는 잠실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