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날씨는 이 축제를 끝으로 완전히 

저물어버릴 생각인 것인지.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고 공기는 적당히 따듯했다.


한강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푸드 트럭 골목에는, 2년 전과 차이점을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한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트럭 상단에 붙여져 있는 상표만 바뀌었을 뿐,

비슷한 메뉴들을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이 줄지어서 나눠먹고 있었고,


아직 행사까지는 한시간 정도 남아있었기에,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어져

비슷한 메뉴를 판매하는 트럭의 줄에서 서서

20분 정도 기다린 후,


그때 먹었던 감바스 알 아히요를 다시 먹었다.


평범하게 맛있다고 느껴졌지만

도저히 그때 지예와 나눠먹던

그 맛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행복감은 미각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던가.


그렇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아직은 봄이 지나가지 않았음을

만끽하게 해주는 따듯한 날씨와,


그 풍경 속에서 다채로운 옷을 입고 행복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공허해진 마음속에 무언가가

채워진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요리를 전부 먹고 쓰레기통에 가지런히 버려둔 후,

행사장 근처로 돌아가니 단 한 시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이미 해가 지기 시작했음에도 행사장에서 비치는

밝은 조명들은 낮과 밤을 구분하기가

힘들어질 정도로 긍정적인 빛들을 연출해 냈다.


우연인지 무언의 신이 나를 위해 준비해준

그나마 있던 자비로움 인 것인지, 2년 전

그녀와 함께 불꽃을 바라보았던 그 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앉아있을 자리가 남아있었다.


지예의 눈동자가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반짝이며,

글썽거리는 눈물로 일렁이던 그 자리였다.


재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 가방을 내려놓고

주저앉아 자리를 잡았다. 계속해서 생생하게

떠오르던 그날의 추억도 지금은 멍들은 마음을

치료해 주는 것처럼 따듯하게 다가왔다.


그녀와 함께 불꽃을 바라보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불꽃축제를 시작한다는 안내 음성이 울려 퍼지고,

대교에 차량 출입이 전면 통제되기 시작하며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가벼운 불꽃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주 앉은 연인들과 수많은 가족들은

잊지 못할 순간을 마음속에 영원히 담아두려 했는지,

행사가 시작되고 아주 잠시 동안

행사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곧바로 내 눈에 보인 풍경에,

정확하게는 내 눈에 비친 한 인물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사고가 정지되었다.


열 걸음이면 부딪힐 법한 거리에 그녀가 있었다,

2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여전히

사랑스러웠던 그때의 그 모습이, 

바로 내 눈앞에 비치고 있었다.


날개뼈까지 내려온 진한 검정색의 머리카락에,

수척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무척이나 갸날파

보이는 마른 체형,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


예전에는 부끄럽다는 이유로 입어주지 않던

밝은 베이지색과 옅은 하얀색이 조화롭게

걸쳐진 원피스와 터져나오는 불꽃으로 인해

원피스에 비쳐 보이는 미려한 곡선의 몸매는,

하나의 정제된 작품을 보는 것 같았고


한쪽 귀에 꿰며 진 초승달 모양의 귀걸이가

달빛보다도 밝게 피어오르는 불꽃에 비춰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조금은 진해진 화장을 한 눈앞에 여성은

그 어떤 보석을 가져와도 이 아름다움에

비할 바가 없을 것 같았다.


오랜 기간 자라 나온 과실이

가장 푸르게 피어나는 시절이 있듯이.

얼굴도 체형도 옷차림도 조금씩 어른스러워졌지만

분명하게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은

내가 2년 전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한지예 본인이였다.


귀가 아플 만큼 강렬하게 터지는 불꽃들을

신경 쓸 틈도 느끼지 못한 채,

나는 사고가 멈춘 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녀가 오늘 이 행사에 혹시라도

나타날 가능성을 나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못했던 것이다.


텅 빈 마음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라고는

선명하게 새겨진 그녀와의 추억들밖에 없는데도,

이제 와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구차한 기억들을

나는 현실이라고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메마른 감정에 괴로워하는

자신을 달래기 위한 인위적인 기억이라고

생각해왔던 모양이다.


달려가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싶었다,

다시 만나달라고 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와 헤어진 그 뒤로 어떻게 지내왔는지,

세상이 무너진 듯한 괴로움을 겪었던

나만큼 괴로웠는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했는지,

이제는 병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을

먹어도 배가 아프지는 않는지,


맞잡을 손을 놓지 않은 채 주말마다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을 찾아가던

그 시절을 너는 기억하는지,


어째서 그때 이런 나를 버려고 떠나갔던 거야 라고,


단 한 번만 물어보고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같이 노래방에 갈 때면 남에게 노래를

불러준 적이 없는 창피함에

손만 맞잡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노래를 불러주지 못했던 나 자신이

너무 미웠던 기억들, 


안경을 쓴 내 모습이 너무 못나 보여서

너를 만날 때면  눈이 건조해지다 못해 빨갛게

충혈 되더라도 렌즈를 끼고

사랑스러운 너를 바라보았던 기억들,


너와 자주 가던 쌀 국숫집을 헤어진 뒤로는

두 번 다시 가지 못하고 그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가슴 한편이 쓰라렸던 기억들,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버스 뒤편 구석에 앉을 때마다

손을 맞잡고 어깨를 기대며

서로의 따스함을 공유했던 기억들,


'나 있잖아, 그 뒤로 죽어라 노래방에

가서 목이 쉬도록 슬픈 노래들만 계속해서 불렀어.

너를 조금도 잊지 못해서, 반쯤 울면서 너와의 추억을

노래에 빗대어서 하염없이 부르고 하염없이 울었어.


지금은 네가 불러달라고 조르던 음 높은 노래들도

손쉽게 부를 수 있어,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안경 쓴 창피한 모습도 이제는

몇 번이고 보여줄 수 있어.


가진 돈이 없어서 낡은 지갑 하나를 바꿔주지 못하고

주말에 아르바이트만 뛰어서 만날 수 없던 너를,

이제는 얼마든지 비싼 지갑도 반지도 선물해줄 수 있고

주말에든 어디든지 함께 놀러나갈 수 있어.


그러니 뒤돌아봐서 단 한 번만

나를 마주 봐주면 안 되겠니, 모두 잊은 것

마냥 밝게 인사하고 마주해도 좋으니까

한 번만 뒤돌아봐서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해주면 안 되겠니'


마음속에서 못다 한 말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참지 못하고 일어나 앞으로 달려 나가려 할 때

불꽃놀이는 클라이맥스를 맞이했고


그녀는 옆에 있던 남자와 사랑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최근 1년간, 나를 질적으로 구성하는 요소들이

시간에 흩어져 하나둘씩 빠져나가며 나라는 존재는,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희미하게

뼈대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남아 서로를 조금씩 간신히 지탱하던

뼈대들은 오늘로 인해 완전히 무너졌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자리에서 뛰쳐나와 그 자리를 도망치듯이 벗어나왔다.

그리고는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한강대교의

기둥 밑 구석진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채를 휘어잡고

한참을 울었다,


나는 지금껏 무엇을 위해 얼마나

의미 없이 살아왔던 것인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들을

스스로 되새기며 얼마나 구차하고 추하게

살아왔다는 말인가,


바로 전 눈앞에 비친 그녀의 모습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정도로 가슴은 철렁거렸고,

완전히 벌어진 가슴속 상처 틈에선 밀려나오는

슬픔들과 함께 커다란 회색 상자가 보였다.


그 회색 상자에는 열정적이고 순진무구한

2017년의 한서원이 있었다.


당장 어제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주제에

그걸 망각하고 눈앞에 주어진 행복감을

소중히 간직하지 못한 멍청했던 나 자신이 있었다,


그는 슬픔으로만 가득 찬 회색 상자 한구석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슬픔과 좌절들을 온몸으로 전율하며

짐승에 가까운 소리를 내고는 나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그렇게 네 시간을 내리 울었다.

정신을 차리니 머리카락을 강하게 쥐어잡은 탓에

머리는 뻗혀있고, 눈은 붓고 따가워서 앞을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벽을 잡고 최대한 천천히 일어나려 했음에도

눈앞에 현기증이 몰려왔고,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휘청거렸다. 그렇게나 많이 모여 있던 사람들은


새벽이 되니 모두 사라지고 공원 곳곳에 쌓인

대량의 쓰레기봉투 속 쓰레기들만이

이곳에서무언가 벌어졌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잠실대교 위로 향했다.


스무 살 동안 천만 원을 모으고

군대를 다녀오면 자립해,

메마른 내 가슴을 채워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자고 다짐하며

지금껏 살아가자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들이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졌다.

몇 년 동안 한 사람을 잊지도 못한 채

멍청하게 살아온 주제에 돈이 모인들

나이를 먹는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랑했던 그녀를 잊지 못한 채

오늘의 기억도 결국 나중엔 차가운 비수처럼

되돌아와 가슴 한편에 꽂히고는,


결국 평생 나를 좀먹고는 매일 밤

나를 괴롭게 할 미래가 눈앞에 선명했다.


이대로 차가운 한강물에 뛰어들어

모든 것을 잃고 조용히 죽고 싶었다.

고통스럽지 않기를 바라지만, 고통스럽다

한들 제발 모든 걸 잊고 깨끗이 사라지고 싶었다.


대교 위에 올라섰지만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감정이 복받쳐 오를 때마다 부어오른 눈이 따끔거렸다.


더이상 1초도 살아있고 싶지 않았다.


아래를 보고 마음을 다잡으려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동시에

대교 위에 있던 모든 차량들이,

멀리 아래 한강을 아직 거닐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그러고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머리를 길게 땋은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의 소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다리 위에는 추억들이 있어"


"남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너를 보고

내가 특별히 기억을 열어줄게,


되돌아보지 못함을 알면서도

간절히 소망해온 순간들을 돌려줄게."


나는 이날, 너무 늦은 첫사랑을 다시 경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