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Knechtschaft dauert nur mehr kurze Zeit

예속은 오래 못간다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귀축미영에 맞선 대동아 전쟁 개전 이래 아름다운 조선의 많은 지역이 파괴되었고조선반도의 많은 지역에도 전쟁의 상흔이 남았다하지만 모든 신민이 알다시피 그 이후 몇 년에 걸쳐 기적과도 같은 일이 조선반도에서 일어났다한 가구씩 그리고 한 도시씩천황 폐하의 신민들은 이 나라를 오늘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조선은 이제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지역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이 모든 것이 너희 조선인을 위해 내지와 같은 생활을 보장하고자 하신 천황 폐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계속 올바르게 처신해서 감사를 표하도록 해라."


-1962년 3월 10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의 육군기념일 담화


"젊은 사람이 일도 엄청 잘하네. 늦으면 좀 쉬었다 하면 좋을텐데 일 무서운 줄 모르는 걸 보니 앞으로는 잘살 거요. 그렇게 일하고는 안 마실 수 없겠구만. 나는 들어가 볼 테니 좀 쉬었다 가시오." 일본인 부장의 덕담을 이 군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짚은 채 들었다. 


이 군은 전쟁 후에 상경해서 가정이 어려운 가운데에도 학업에 매진해 고등보통학교까지 졸업한 성실한 근로자지만 일하는 곳마다 쫓겨나며 먹고 살기 위해 막일을 하던 사람이다. 그러던 중 《동아일보》의 수습 조판원으로 계약하여 일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이 군이 그의 가정이 총력연맹 애국반에 들지도 않았고 창씨를 하지도 않아 일자리를 잃었던 것을 알고 혹 불령선인을 썼다고 상부에 문제가 될까 안절부절 못했지만 그가 꼼꼼하고 정직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는 불신과 불안에 떨었던 스스로에게 자괴감을 느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할 제 스스로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며, 조선 쿨리들을 부리며 행복스럽게 사는 아버지와 식구들을 혐오스런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언젠가부터 자기의 값싼 민족의식이 도리어 부끄러웠다.


이 군은 내가 잘못 쓴("'작곡'했다"를 "'작고'했다"고 잘못 적었다)기사를 정정해 주느라 늦게까지 눈을 비비며 활자를 들여다보았다. 오후 여덟시, 네 시간 더 근무한 그에게 나는 술이라도 따라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고 살면서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것부텀도 손해본다는 생각을 하고 이해관계를 따져 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부장이 들어가자 이 군은 내가 부어주는 술을 두 손으로 황감히 받쳐 들고 조심스레 넘겼다. 그러나 일단 술기운이 돌자 이 군과 나는 편히 붓고 마시며 본인의 내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 군이 따라주는 잔을 받으면서 나도 온 몸을 휘감는 술기운에 문득 머리를 내둘렀다. "테레비에서는 황군이 연전연승한다지만 다 거짓말이라우. 그렇지 않구서니 스물 다섯 해도 전에 터진 전쟁을 아직꺼지 할수 있습니까? 대본영발표도 작작 받아써야지, 형씨는 그걸 그대로 받아쓰고 앉아있는 꼴이 우습지도 않소?"


"이 군! 나도 선동적인 기사글을 짓는 것 때려 치고 밭을 갈라고 하네. 밭을 가는 그것이 벌써 시가 아니냐. 사람은 흙에서 나와 흙에 돌아가지 않나. 흙의 향기로운 냄새에 취할 수 있는 자의 행복이여!"


이 군이 별안간 배를 잡고 웃어댔다. 나는 말을 꺼낸 것을 후회했다. 내가 이따위 산문이나 쓰던 공상가였단 말인가?


"흙의 냄새요? 향기롭지요. 조반 후의 낮잠은 위약이라는 고등유민들이 소일거리로 농사일을 한다는 것이 행복스럽지 않고 시적이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요. 생존을 위해 농사를 짓는 일 년 열두 달 소나 말보다도 죽을 고역을 다하고도, 시래기죽에 얼굴이 붓는 것도 시입니까? 삼복의 끓는 햇볕에 손등을 내면서 호미 자루를 놀릴 때, 행복을 느끼겠습니까? 조선 소작인들은 흙의 노예요, 자기 자신의 생명의 노예요. 병정들에게 놋그릇이니 곡식을 다 빼앗기고 남은것 피와 땀, 그리고 주림뿐이우! 식민지 농촌이 형씨 생각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1955년 9월 1일, 6년에 걸친 파괴적인 전쟁 끝에 자유민주주의 미국이 패망한다. 자유의 땅 미합중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을 장악한 파시스트 정부는 전쟁 이전의 미국을 '구미국'이라고 폄훼하며 군국주의, 전체주의적 사회를 구축했다. 미국민에게는 비밀경찰을 위시하여 사악하고 가혹한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공황 이후 멈춰섰던 거대한 미국 경제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새로운 '추축'으로 떠올랐다.


미국이 스스로 전쟁의 지옥에 뛰어들자 일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태평양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바다를 제멋대로 유린했고,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거쳐 섬들을 차례로 침공하며 방어군을 몰아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추축국의 승리로 끝난 뒤에도 아시아에 남아있던 영국과 네덜란드는 파국적인 패배에 이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렸고, 결국 항복했다.


인도의 영국군도 47년에서 49년에 이르는 2년간 침략군의 공세에 목숨걸고 맞섰지만 버마에서 대공세를 펼쳐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군에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길 수 없는 전쟁과 가혹한 탄압이 이어지자 인도인들은 일본 편에 서서 인도 해방의 대의 아래 영국군과 싸우게 된다.


1951년 12월 7일, 이 날은 7년 전 블라디보스토크 공습을 기리는 의미에서 제정된 해군기념일이었다. 그러나 미국민에게는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라고 불리는 진주만 패배의 날로 기억되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이끄는 일본 타격부대가 진주만과 미 태평양 함대를 파괴했다. '치욕의 날' 이후 일본의 노도와 같은 정복이 이어졌지만 미국은 역공을 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잃었고, 위험천만한 공격에 저항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태평양에서 미군을 압도한 일본은 점령지 출신 병사를 앞세워 알래스카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미국 방어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침공군에 엄청난 피해를 강요하지만, 미국 본토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미드웨이에서 미국 항공모함들을 불태우며 미군을 압도한 일본은 점령지 출신 병사를 앞세워 알래스카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미국 방어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침공군에 엄청난 피해를 강요하지만, 미국 본토의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독일은 감히 뭐라 할수 없을만큼 장엄하고 결정적으로 전쟁을 끝내겠다는 유혹에 빠져들었다. A-10 탄도미사일의 폭격과 핵공격에 미군이 장악한 지역이 초토화되고, 군인들은 방사성 물질에 오염된 전장에서 싸웠다.


1955년 8월, 샌프란시스코의 이름난 거리들은 동물원을 탈출해 날개를 퍼덕이고 끽끽 울어대는 새들과 우리에서 나와 상처입은 동물들로 난장판이었다. 도시의 삶을 지배하는 '지하실 부족'들이 기어 나와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이들은 목숨에 연연해하며 약간의 온기와 필사적인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음식을 나누었다.


독일군의 포격이 멈추고 강습부대가 집 사이를 지나 광장을 가로질러 전진한 다음에, 휴전과 미합중국의 전면항복이 선언되었다. 독일이 승리한 아메리카에서는 패자와 그 희생자들이 전쟁이 불러온 폐허 속에서 먹을 것과 비바람 피할 곳을 구하려고 발버둥쳤다. 이것이 '구미국'의 최후였다.


일본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달성했다. 일본 병사들의 개선 행진과 축제는 광대한 중국과 시베리아를 점령하고,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며, 태평양을 휩쓰는 제국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러나 아시아의 현실은 야만 상태로 전락하고 있었다.


아시아 전역에서 700만 명이 넘는 노동 인구가 일본 공장의 생산에 투입됐다. 어떤 이는 일본 관리의 권유로, 어떤 이는 징집당해서, 어떤 이는 노예가 되어 일했다. 전쟁의 결과로 숙련 기계공 노동 인구가 크게 늘었지만, 인구가 국내 농업으로 지탱하기에는 너무 많아졌고 일부 국민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전후 쌀 가격이 폭등하고 파업과 폭동이 이어지자 내각은 조선과 중국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석유, 금속, 고무, 석탄, 그리고 무엇보다도 쌀이 일본 본토로 향한다.


이런 정책으로 일본 경제에는 숨통이 트였지만, 수확물을 그대로 뺏긴 농민들과 가혹한 노동에 질려버린 노동자들이 산과 들로 숨어들었다. 중국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의 잔당들, 조국의 해방을 꿈꾸는 게릴라 단체들의 세력이 빠르게 불어났다. 게릴라 공격이 이어지자 일본군은 통제와 감시를 유지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투입하게 되었고, 이것이 점령지에 대한 수탈 강화로 이어지면서 사태는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한편 일본인 지주들이 세운 식민 농업회사들이 중국 동부로 농장을 확장했다. 지주들의 힘은 여전했고, 고율 소작료는 강화되었다. 각종 비용이 소작민에게 전가되었고 자작농은 갈수록 줄었다. 죽어라 일해도 삶은 나아질 줄 모르고, 언제 땅을 빼앗겨 고향을 등지게 될지 모르는 농민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구호에 공감했다.


땅을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총독부의 주도로 조선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면서 조선에도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된다. 그러나 너무 적은 임금에 가혹한 현실을 벗어날 수도 없었고, 일본인 노동자와의 임금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노동자들의 상당수는 함바나 움막, 그도 아니면 토굴이나 다리 밑에서 거처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철저히 친자본적 입장에서 노동운동 탄압에 나서고, 노숙하는 노동자들을 불량배로 몰아 징집했다. 


혼마치의 대형 전광판에 천황을 찬양하는 영상이 비춰지고, 극장에서는 국방헌금 납부를 장려하며 날마다 일본군을 선전하는 영화를 상영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전시 체제는 끝나지 않았다.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가 유지되었고, 대학가에서는 군인들이 교련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들을 끌어내 구타했다. 전시에 물자 배급을 맡았던 총력연맹 애국반은 민간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다. 게슈타포를 모방한 비밀경찰은 애국반을 통해 창씨개명, 신사참배 등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사람을 색출해 감옥소로 보냈다. 이런 공포스러운 현실을 안다면 그 누구든 아주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물대여섯쯤 된 책상 도련님인 나로서는 조선인의 현실을 듣고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인생이 어떠하니, 인간성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여야 다만 탁상의 공론,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적 인식에 불과한 것은 물론이다.


나는 총독부 국장에게 잘 보여 떼부자가 된 할아버지나 대동아 전쟁 때 누구보다도 '애국한' 아버지의 덕택으로 내지에서 여유있고 행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글자나 얻어 배웠거나 소설 권이나 들춰 보았다고,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니 소설이니 한대야 결국은 배가 불러서 투정질하는 수작이요, 인생과 사회의 이면의 이면, 진상의 진상과는 얼마만 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이러고 보면 내가 하는 일, 하려는 일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 소작인들은 그들대로 일년 열두 달 죽어라 농사를 지어야 쌀이니 그릇이니 병정들이나 가혹한 지주에게 내놓지 않으면 안되겠으니까... 반 년은 시래기에 보리로 목숨을 이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궁핍한 현실에 있다. 


도회지의 삶은 어떤 것인가? 경성 거리의 조선인들은 냄새나고 좁아서 살수 있겠나 싶은 집조차도 잃고, 그 흔한 지나산 수수, 조 한 되마저 해먹을 장작이 없어 굶주리고 살아간다. 강남에 신 도시를 짓는 공사판에서 허리가 끊어지게 일하고서 노임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날 만큼 나의 귀가 번쩍하리만큼 조선의 현실을 몰랐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층민들과 소작인의 생활이 참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나는 이 씨의 기세에 눌려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는 조선인들 역시 전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일본인들의 학대에서 해방되어 현대 사회의 화려함을 누리게 될 것인가? 이 씨 역시 '참고 살다 보면 강남 신도시의 아파트에 살게 되고, 십전 이십전 하는 설렁탕쯤은 물배만 채우니 싫어서 갖은 음식 타박에 부당하게 초과 근무하는 날에는 상사에게도 대들고 따질수 있는 인생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할수는 없었다. 천번 만번 참는다고 해서 이 두터운 벽이, 오를 수 없는 저 꼭대기가 발 밑으로 걸어와 주는게 아님을 모르는 사람이 그 누구인가.


이제 육군기념일 공휴일도 마감이었다. 남은 일이라고는 오늘따라 혐오스럽게 느껴지던 집에 돌아가 꿈 없는 잠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나는 밀려드는 자괴감과 착잡함에 '으악!' 하고 외쳤다.


일 년쯤 지났다. 다시 전쟁의 안개가 세계를 뒤덮었다. 며칠 째 회사에 나오지 않는 이 군의 짐을 정리하는 도중 책장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국혼은 살아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은 국백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그 순간, 남자 두 명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츠키야마 쇼케이 씨? 츠키야마 씨 맞습니까?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1972년 8월 서울


'국혼은 살아있다.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국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 등은 국백에 속하는 것으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금서... 사무실 책상 위에 있던 어느 책을 집어든 이후로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의 그 구절이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열두 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침울한 표정의 일본인 간수가 다가와 문을 열었다. 먼저 풀려나 죄수들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는 이 선생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고, 더러 눈물을 흘리는 자들도 있었다. 소년동에서 풀려난 열댓살쯤 된 어린 죄수들도 그 진의는 모르지만 행렬의 뒤를 이리저리 따라다니고 있었다.


형무소의 높은 깃대에서 일장기가 내려졌고, 어디선가 잉크를 가져온 사람이 푸른색 태극과 사괘를 그렸다. 천황의 사진은 죄수들의 옷을 소각하던 소각로에 버려졌다.


그렇게 감옥 여기저기를 구석구석 누비고 다닌 죄수들은 이윽고 철문을 열고 나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죄수 무리를 바라보던 아낙들도 있었으나 급조된 유인물을 나누어 주며 대중집회에 가자고 부추기는 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감격한 사람들을 구경하며 총독부 앞에 이르렀다. 코우카몬 앞 거리는 TV를 보고 뛰쳐나온 사람들로 이미 붐볐다. 코우카몬 광장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이 끌어내려졌고 야마모토를 모신 신사는 불에 타고 있었다. 한편에선 일본인을 두드려 패려는 청년과 그를 뜯어 말리는 시민들도 보였다.


총독부 앞, 커다랗게 대일본제국이라고 새겨진 글씨도 삼십여 년의 풍파에 희미해졌다. 총독부 건물의 금가고 때묻은 모습이 오늘따라 눈에 밟혔다. 케이죠우 역에 들어서는 기차를 들여다 보는 사람들, 공장 꼭대기에서 휘날리는 적기, 총독부 앞에서 난다이몬까지 시내 구석구석 울려퍼지는 만세 소리...


이렇게 일본의 압정은 끝났고, 조선은 광복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 덕을 보아 이룬 일은 아니라 할 것이다. 나같은 겁쟁이 지식인도, 하루 먹고 살기 바쁜 농사꾼들도, 숨쉴 틈도 없이 일하는 노동자들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해온 이름난 선비들도, 총을 잡은 독립군도 모두 자유로운 세상을 바랐던 것 아니었던가.


그렇게 어지러운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던 것이다. 마치 내가 이런 세상에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전해주려는 것처럼. 자유에 대한 갈망은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국백'이었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누구 말처럼 그 시작의 시작이다. □


Comment : 어쩌다 보니 계획하는 본편과는 동떨어진 곁다리 스토리가 됐네요. 한-일간의 내용이 민감한 시기입니다만 구절 하나하나에 크게 신경쓰지 마시고 가볍게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