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그늘 아래.’



그날도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딸랑ㅡ 딸랑ㅡ.

 “아가씨, 아가씨!”

 “으응, 좀만 더 잘게.”

 산들바람이 불었다. 잠도 이제야 솔솔 왔다. 나무 그늘 아래 꽃바람이 불고 있었다. 좀만 더 누워있고 싶었다. 주위에서는 계속 어떻게든 깨워야 한다며 애걸복걸하는 듯했지만 이데인한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살갗 위로 벌레 한 마리가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지만 뭐 어때.

 “소피아님이 잡아 오래요!”

 내내 자는 줄만 알았던 이데인의 눈이 드디어 번쩍 뜨였다.

 “히익!”

 내내 한가로이 이곳에 있으려고 했던 이데인은 주위에 몰려든 하인들과 하녀를 보았다.

 "으응, 왜 이렇게 모여있는거지이?"

 "아가씨!!"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그림자를 만들며 이데인을 계속 내몰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를 듣다가 이데인은 귀를 파고는 후 하고 불었다.

 "아가씨, 더럽습니다."

 차마 주위에서는 더럽다는 얘기를 못 하고 있을 때, 뛰어온 하인에게서 이데인이 어디에 있는지 전해 들은 소피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하였다. 이데인은 들려온 소리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그림자가 얼굴을 타고 요동쳤다. 잠시 느긋하게 그것을 보던 이데인은 일어서서 소피아를 내려다보았다.

 "으응, 소피아 여기까지 왔어어? 고개 떨어뜨리지 말고 앞을 봐."

 이데인은 숙인 소피아의 동그란 이마를 보면서 말하였다.

 "명령입니까?"

 "아니. 부탁."

 이데인은 고양이 같은 눈꼬리를 위로 올렸다. 소피아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말하였다.

 "아가씨."

 최대한 정중하고도 사무적인 태도로.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아가씨의 행동 하나하나를 기억할 수 있는 이들이며."

 "그래."

 "당신은 이곳의 상징이자 축복으로써 아무렇게나 입어서도 안 되고, 말해서도 안 되며 그렇게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서도 안 됩니다."

 "그래, 그렇군."

 이데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곳에서 있으면서 해야 할 일들을 들었고 그것이 몇 번째 들은 말인지 상기하며 검지 손가락으로,

 "소피아, 눈을 맞춰야지?"

 소피아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소피아는 확 달아올라서 "뭐 하는 짓이에요!" 소리를 쳤고 결국은 그 행동까지 보고만 이데인이 말했다.

 "우리 소피아는 역시 그런 게 어울린다니까!"

 한동안 얼굴이 벌겋게 익던 소피아는 손을 쳤다.

 내내 장난조로 말했던 아가씨는 손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털었다. “어머, 우리 소피아 그렇게 손을 치면 어떡해애?”

 그리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나 아프다고?”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소피아는 손바닥을 보이지 않게 말아 쥔 것을 한동안 계속 보다가 눈을 더 깊이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데인은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고 소피아 앞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했다.

“으응, 알겠어. 소피아가 그렇다면야. 그런데 소피아 우리 따로 시간 좀 가질까?”

 “아침은 하셔야죠.”

 “그래. 소피아가 그렇게 말한다면 당연히 그래야지?”

 소피아에게 팔을 두르며 하녀와 하인을 제치자마자 귀에 속삭였다.

 “뭐 하는 짓이야, 소피아.”


***


주위로 길게 사람들이 섰다. 이데인은 가장 끝, 가운데에서 요리가 줄지어 나타났다. 요리사들은 설명해주며 어떻게 먹어야하는지 말하였고 이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사들이 나가자 식탁에 놓인 고기를 썰었다. 고기에서는 피가 살짝 배어 나오며 먹음직스럽게 김이 올라갔다. 반 정도 여유롭게 식사하던 이데인은 사람들에게 시선 한 점 주지 않고 말하였다.

 “모두 물러가. 소피아와 단둘이서 말하겠다.”

거대한 식탁 주위로 있던 하인과 하녀들이 열 맞춰 금색으로 치장된 문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한쪽 손을 괴고 가운데에서 타오르는 촛불을 심드렁하게 바라보고 있던 이데인이 말했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홀을 울렸다. 여전히 이데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불꽃을 응시하고 있었고 소피아는 여전히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불편해.”

많은 음식들을 제외하고 소피아와 이데인 둘만 남았다.

 “제가 앉는 게 마음 편하십니까?”

 이데인은 그때서야 일렁이는 불꽃에서 눈을 돌려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느긋한 고양이 같던 얼굴이 풀렸지만, 여전히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소피아, 적당히 하지? 너에 대한 내 배려라는 거 잘 알잖아.”

소피아의 의도를 모른 척 고기를 썰며 권유했다.

“한 입 먹어볼래?”

소피아는 여전히 이데인을 향해 눈을 올리지 않았고 김이 피어오르는 고기를 바라보다가 눈을 숨기며 말하였다.

 “아가씨.”

 “응, 소피아. 한번 말해봐.”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내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던 소피아의 말에 기쁘다는 듯이 이데인이 입을 열었지만, 그 입가는

“아가씨의 배려는 일방적이신 거, 아십니까?”

 “…뭐?”

 금세 굳고 말았다. 소피아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이데인은 아무 말 없이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소피아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눈을 들어 올렸고 초록색 눈은 이데인을 향해 빛났다. 어렸을 때부터 키우면서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

“전 그런 거 한 번도 좋아한 적 없어요. 당신의 권유와 호의는 감사하지만, 정말로 당신은 그것이 당신의 호의에서 나온 배려가 아니라 권력에서 나올 수 있는 베풂이라는 생각 안 드시나요.”

“너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야.”

한 번도 어긋남 없었던 이데인의 미소가 사라졌다.

“아니요. 저는 그때 했던 당신의 배려에 손잡을 생각도 없고 앞으로도 없습니다.”

“소피아!!!”

 이데인은 소리를 지르며 식탁을 쿵 내려쳤다. 힘에 식탁은 요동쳤고 손은 뻘겋게 물들었다. 소피아는 그 손을 바라보았다.

 “넌 정말 이 세계를 원해서 좋아한다고 생각해? 내가 원해서 이 지위와 환경을 가졌다고 생각하냐고. 너희들이 억지로 끌어올린 이 자리가!”

“얼마나 지옥일지 약간은 예상갑니다.”

무덤덤하게 말하는 소피아의 얼굴을 보며 이데인의 안색이 질렸다. 오직 소피아만이 볼 수 있는 저 표정, 소피아는 다시 눈을 깔며 자신의 위치를 상기했고 그만큼 잔혹하게 내뱉었다.

“울고 싶으시죠. 하지만 당신도 당신이 원하지 않는 현실에 물들지 않았습니까? 당신도 이 현실에 살아가는 인물이지 않습니까.”

“그만해!!”

 “아니요, 그만하지 않겠습니다.”

 비명을 지르듯이 이데인이 울부짖었고 소피아는 내리깔던 눈을 드러내어 초록빛 눈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말끔한 초록 원피스, 늘 차고 다니는 단정한 흰색 앞치마, 장식용 머리띠.

아가씨의 애정과 하녀장이라는 위치, 가정교사까지 도맡아서 이곳에서 돈을 가장 풍족히 받을 텐데도 꾸미지 않았고 꾸미지 못했다. 저녁에 타들어가야 할 촛불이 밤을 지세울 테니까.

 ‘그것만은 나의 자유.’

촛불에 일렁이는 창문 너머를 보며 늘 비참함에 몸을 떤다.

앞에는 진득하니 상처를 받은 이데인의 눈이 눈물을 떨굴 듯했다. 구릿빛 살결을 거의 드러내다시피 한 보석이 팔과 가슴골을 타고 흐르고.

 ‘아가씨는 늘 저런 옷차림이셨지.’

“당신은 여전히 강한 척 여리고, 사람들을 믿지 않는 척 믿는군요. 저한테 어릴 때부터 애정을 갈구하셨죠. 그래요,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의심하고 그 자리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에도 흔들리는 사람. 그런 당신께 이곳에서 가장 원했던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붉게 물들어 파르르 떨리며 액세서리 가득한 손.

“이곳에서 가장 쉽게 죽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

‘아가씨, 당신은 나를 내쫓지 못합니다.’

이윽고 멈추는 손.

“그건 바로 ‘찬란한 나무’에서 가장 가까운 이곳. 이곳에서 붉은 열매를 먹고 불타 죽는 것입니다.”

소피아는 액세서리들이 부딪치며 소리가 나는 것과 방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데인은 그 이상 화를 내지도 않았고 소피아를 부르지도 않았다.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뒤돌았고 커다란 문을 열어젖혔다. 시선이 한꺼번에 이쪽으로 못 박혔다. 소피아는 문을 뒤로 닫으며 말하였다.

“오늘은 아가씨께서 입맛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피아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평소에 잘만 먹던 아가씨가 갑자기 먹지 않는다니 의아했지만, 들어오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활짝 웃는 아가씨를 보며 생각했다.

 “너희들에게 주는 선물이야. 마음껏 먹어?”

 ‘소피아에게 조금 혼나고 말았구나.’

대부분의 사람은 아가씨가 별다른 화를 내지 않고 먹다 남은 것을 주자 아가씨는 시종일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순식간에 홀은 환호성으로 가득 찼으며 사용인들의 잔치가 벌어졌다.


***


 이데인은 평소처럼 하얀 꽃이 날리는 곳에 앉았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앉아서 ‘찬란한 나무’만 지켜볼 뿐.
  하얀 꽃잎은 이 그늘 아래에 흩날린다ㅡ.

 한동안 그곳에 주저앉아 있을 때, 오후에 하인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에드가가 오랜만에 이데인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이었다. 평소에 자주 가던 하얀 꽃밭에 앉아서 꽃잎이 어두운 밤 하늘하늘 춤추는 것을 보던 이데인은 "그래?"라며 싱긋 웃기만 했다.

 ‘아마 내일 궁전에 갈 때쯤 오겠지.’

 주기적으로 ‘궁전’에 가던 날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안 이데인은 슬슬 땅거미가 내려앉는 걸 바라보았다. 하인과 하녀들이 무언가를 저 멀리서도 가져오고 있었고, 그걸 본 순간 인상은 단번에 구겨졌다가 오기도 전에 미소로 바뀌었다.

 그것은 ‘찬란한 나무’를 형상화하여 왕관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가운데에는 본인을 상징하는 호박을 박아넣고 왕관의 줄기는 빛나는 ‘찬란한 나무’를 나타내는 것처럼 나무의 커다랗고 수많은 가지를 넣었다. 그리고 작은 보석 알알이 넣어 나무의 풍만함을 보여주었고 곧이어 조심스럽게 이데인의 머리에 올라갔다.

 이데인은 그 즉시 고개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데인은 ‘아버지’가 올 시간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일어났다. 발끝까지 긴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렸다. 그 먼 거리에서도 ‘아버지’의 실루엣이 철창 너머로 보였다. 여전히 뒤에 선 병사들도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온다는 소식에 그 모습에 인상을 찌푸리다가 ‘아버지’가 조금 더 다가오자 인상을 폈다.

 “’아버지’, 안녕?”

 순진하게 묻는 아가씨의 주위로 고개를 숙인 하인, 하녀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속으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아가씨는 두 눈을 깜빡깜빡하며 물었고 ‘아버지’는 그런 이데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가시죠.”

이곳, 대륙의 하늘을 뒤덮은 나무가 바람으로 흔들렸다.

 사용인들은 그 자리에 서고 이데인과 ‘아버지’, 병사들은 잔디를 밟아 늘어서 있는 숲을 등지고 있는 ‘찬란한 나무’로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갔다. 거대한 기둥이 굽이쳐 하늘로 웅장하게 솟아있었다.

이데인은 잠시 ‘찬란한 나무’에 손을 대기 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얀 매가 하늘을 가득 메운 가지 너머 날았고, 밤하늘은 까마득했다. 별은 헤아릴 수 없었다.

 늘 그랬듯.

 밤바람은 불어 무거운 왕관에 눌린 머리를 흩뜨렸다. ‘찬란한 나무’에 손을 대었다.

 ‘찬란한 나무’의 황금빛은 온 대륙의 하늘을 뒤덮은 나뭇가지로 뻗어갔다.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황금빛이 시작되는 가장 따스한 중심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닿지 못하는 곳.’

 나무는 바람처럼 흔들리고, 파동이 번지기 전 모두가 기적과도 같은 중심을 바라본다.

 이데인은 이제 ‘아버지’가 손을 떼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거두어 고향으로 가지 않았다.

 파동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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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로는 굉장히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