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서양을 홀리다: 유럽 문화에 스며든 동양 예술~
-시누아즈리-

안녕하세요, NoMatterWhat입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시누아즈리에 대해서 논해볼까 합니다. 전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드렸지만, 유럽에 아시아의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경부터였습니다. 그리하여 중국풍 문화를 통칭하는 '시누아즈리'가 확산되고 유행한 것이 17세기 말 부터 18세기였죠. 아무튼 시누아즈리가 무엇인지 간단하게 논하고 난 후, 당대 시누아즈리를 대표하는 예술품들을 작센의 '강건왕'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중국의 예술이 유럽을 매혹하다

시누아즈리는 17~18세기 경 유럽 상류층에서 유행한 중국풍 예술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에서 직수입된 도자기, 비단, 장식장이나 불상과 같은 물품 뿐 아니라 그에 영향을 받아 유럽 내에서 만들어진 가구나 도자기를 모두 일컫는 말입니다. 즉,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 같이 만든 자기 역시 시누아즈리의 일종으로 본다는 것이죠. 사실 이게 당연한게, 중국에서 직접 수입해서 가지고 오는 도자기의 절대적인 양이 너무나 부족했거든요. 뒤에서도 자세히 다루겠지만, 도자기를 모아 궁전을 장식하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도자기가 필요할 텐데, 현실적으로 수입된 도자기의 양도 적은데다가 가격도 만만치 않았으니 그럴 수 밖에요. 아무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명나라와의 교역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초기, 상인들의 주교역 품목은 도자기였습니다. 중국 징더전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와 일본 아리타(임란 당시 조선 도공 이삼평이 잡혀간 그곳 맞아요!) 도자기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크게 앞서있었습니다. 유럽의 지배계층이 동양의 도자기에 홀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죠. 아리타 도자기는 수출항인 이마리의 이름을 따 주로 이마리 도자기라 부르는데, 이건 중요한게 아니니 그냥 흘려들으시면 될 듯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끈 도자기는 주변에 청동 장식을 부착하여 재판매됩니다. 


이런 식으로요. 17세기 까지 계속해서 수입만 하던 양상에 변화가 생긴건 18세기에 들어섰을 때였습니다. 여기서 오늘의 주인공,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가 등장합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작센의 선제후이자 폴란드의 왕. 그리고 역사상 최고의 난봉꾼

바로 이 사람입니다. 원래는 이번에 소개할 마이센 자기의 후원자..라는 이미지 보다는 난봉꾼으로서의 이미지가 훨 강한 사람입니다. 사생아가 350명에 달했고, 그의 밀회 상대 중에는 자신의 딸도:: 있었다고 하죠. 취향이 이상한 미친놈이라기 보다는, 그냥 애가 하도 많으니 그 사실을 몰랐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아무튼 오늘의 주제와는 다르니 넘어가도록 합시다. 

그림 아래에 짤막하게 표시되어 있지만, 그는 작센의 선제후이자 폴란드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 하나. 작센은 프로테스탄트 지역이었고, 폴란드는 로마 가톨릭 지역이었죠. 본래 작센의 선제후이던, 그래서 신교이던 그는 어떻게 구교 지역을 통치할 수 있었을까요? 간단합니다. 개종을 하면 되죠. 사실 이게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개종하면 되지!'라고 간단하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신교 군주가 구교로 바꾸면, 원래 작센에 살던 사람들은? 당연히 반발이 생길 수 밖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했고, 그의 롤모델을 '태양왕' 루이 14세로 정합니다. 18세기에 절대 왕권을 추구한거죠. 당시 작센이 굉장히 화려한 궁중 문화를 꽃피운 것도 그래서입니다. 본인이 권위가 없으니 돈을 발라서라도 권위를 만들어야죠. 그런 그가 일생동안 지속한 사업이 바로 보물을 바른 거대하고 화려한 궁전입니다. 


이게 제가 다녀온 전시였어요! 서울에서만 하는 줄 알고 서울까지 올라갔다가 광주에서 열리는 거 보고 딥빡...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작센의 선제후들이 대대로 자신의 보물을 보관하던 궁전, 그란볼트를 컨셉을 잡아 장식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이 보물 중에 도자기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상하겠죠?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죠. 돈 많던 그도 방 하나를 전부 도자기로 바르기에는 동양에서 온 도자기들은 너무 비쌌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마이센 자기이죠. 시누아즈리(도자기 한정)의 끝판왕이라고 할 만 합니다. 굿즈를 사다 못해 자기가 만들고 있으니... 암튼. 그럼 마이센 자기에 대해 대강의 설명이 필요하겠죠?

1708년 강건왕은 연금술사 (이지은 저 <부르주아의 시대 근대의 발명>에는 도공이라 나오네요)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는 유럽 최초로 동양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도자기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합니다. 현재도 유명한 마이센 도자기의 탄생이었죠. 어떻게 보면 시누아즈리의 끝판왕(도자기 한정)이라 할 만한데.. 굿즈 사기 싫어서 자기가 직접 만든거잖아요? 아무튼. 

오른쪽에 위치한 게 마이센 도자기. 거의 구분이 안간다. 

물론 품질이 완전히 같은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가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이센 자기는 중국의 그것이 갖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철저한 현지화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18세기 중반 정도부터는 중국 징더전에서 생산된 도자기도 찻잔, 주전자와 같이 유럽 현지에서 사용되는 물품을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비쌌죠. 그런 이들에게 있어, 마이센 자기는 꽤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선택지였을 겁니다. 

'붉은 용' 식기 세트. 마이센, 1730년 경 제작. 적색 안료와 금으로 장식. 동양 문화권에서 황제를 의미하는 용과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식기와의 만남이 독특하다.

그런데 이런 중국풍 문화는 단순히 자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구, 건축 등 일상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죠. 대표적인 예시 몇가지만 더 소개하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제오늘 너무 달린 듯...

유럽인들의 이목을 끈 또 다른 물품은 바로 '칠기'였습니다. 동양풍의 그림이 그려진데다가 쉽게 썩지도 않고 습기에도 강하며 칠고 벗겨지지 않으니 최고의 물품이었겠죠. 문제는 이걸 어떻게 장식을 해야하는지 였습니다. 그런 고민의 과정 끝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칠기 가구였습니다. 말 그대로 동양의 칠기를 자신들 스타일에 맞게 제작한 가구에 부착하는 형태였죠. 



베르나르트 판 리센부르흐가 제작한 가구. 가운데 산수화를 박아넣은 칠기가 눈에 띈다. 

게다가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옻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복제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옻나무가 원래 히말라야 부근의 식물이기 때문에 그렇다네요. 아무튼 그나마 복제에 성공한 도자기와는 다르게 이 칠기는 복제도 안되서 여전히 인기를 누렸으며,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습니다. 

다음은 건축입니다. 돈 있고 권력있는 부르주아나 귀족이라면 누구나 방 하나쯤은 중국풍으로 장식했을 테지만, 우리가 볼 것은 궁전입니다. 유행이 유행이다보니 건축도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 굉장히 많지만, 그 중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상수시 궁전의 차이나 하우스를 보도록 하죠.




겉모습만 보면 뭔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는 합니다. 유럽의 궁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양의 궁전도 아닌 중간 정도에 위치한 그런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죠. 하지만 저기 있는 황금 장식과 내부 천장 장식을 보면 이 건물이 확실히 시누아즈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거나


이런거. 

그 외에도 옷 스타일 등 시누아즈리의 영향을 받은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만, 그걸 일일히 다 쓰고 사진을 넣기에는 조금 넘치는 감이 있어 여기까지만 쓰려고 합니다. 다음 글은 자포니즘에 대해 다루어볼텐데, 또 배경설명이 필요한지라 2편 정도를 써야 끝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하튼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