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 시대사: 일본~


안녕하세요, NoMatterWhat입니다. 이번에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의 1920년대에 대해 다룰 예정입니다. 1, 2편은 모두 서양, 특히 유럽 중심으로 서술한 경향이 있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아시아, 특히 일본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1920년대의 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해서, 1840년의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겠습니다. 

이빨빠진 사자, 쓰러지다

'강건성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청나라 제 4대 황제였던 강희제를 시작으로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의 치세를 이르는 말입니다. 청나라가 가장 강대했을 시기를 뜻하죠. 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그러했듯, 건륭제 말기에 이르자 청나라 역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던 붕괴가 표면 위로 떠오르게 된 사건이 바로 1840년의 아편전쟁이었습니다. 제가 이 글이 글에서 다루었지만, 17세기부터 시작된 동양 문화 열풍은 전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그런 시누아즈리가 한물 간 뒤에도 교역량은 여전히 유지되었는데, 유럽 사람들은 중국의 차와 비단, 그리고 도자기에 여전히 열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18세기부터 대중국 교역을 장악한 대영제국을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는데, 중국이 수출하는 양은 어마어마한데 자신들이 수출하는 것은 별볼일 없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그 교역량조차 제한이 되어있었는데, 항구는 광저우 하나에 한정되어있었고 거래는 반드시 '공행'이라고 하는 지정된 상인과만 이루어져야 했죠. 여러모로 영국은 거래하는 내내 적자만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국의 상인들이 떠올린 묘수가 바로 아편이었습니다. 인도 식민지에서 싸게 들여온 아편을 팔아넘기고 이윤을 남겨 무역 비대칭을 해소해보자! 라는 개같은 심보였죠. 그 유명한 삼각무역의 탄생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추악한 무역, 삼각무역

 이렇게 풀린 아편은 당시 3억에 달하던 중국 인구 중 천만 명을 중독자로 만들게 됩니다. 어마어마한 수치이지만. 이렇게 해서도 균형을 맞추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더욱 절망적인 소식은, 당시의 황제 도광제가 마약 단속에 칼을 뽑았고, 그를 위해 청 말기의 명신 임칙서에게 아편 단속의 전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관리들과는 다르게 뇌물이나 접대가 전혀 통하지 않던 그는 말 그대로 아편을 뿌리뽑는데 거의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의 조치는 전쟁의 원인이 되죠. 사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는 일이죠. 외국 상인이 한 나라 안에 들어와 그 나라 법을 어기고 거래를 해서 그 물품을 압수했는데, 그게 전쟁의 원인이 되다니요. 심지어 유상으로 압수한건데.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중국이 이빨 빠진 사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여기서 재미를 본 영국은 16년 후에는 프랑스를 끌어들여 2차 전쟁을 일으키죠. 그렇게 10개 항구 완전 개항, 공행 폐지, 주룽반도(홍콩 포함) 할양, 외국 공사 베이징 주재, 치외법권, 전쟁 배상금과 크리스트교 허용, 협정 관세, 연해주 할양(러시아)... 두 번의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은 영국과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극동에 영향력을 투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을 보고 가장 위기감을 느낀 것은 청나라의 지배세력도 아닌, 일본의 에도 막부였습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은 굉장히 독특한 국가입니다. 그 특징을 일일히 다 쓰려면 또 다른 글 한 편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에도 막부 시기만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1603년 문을 연 에도 막부는 외국 세력에 꽤나 호의적은 모습을 보입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조총을 전래한 적도 있었고, 예수회의 창시자 중 한명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일본 내에서 선교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양 세력이란 이들에게 그다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는 거죠. 그러나 에도 막부가 결정적으로 나라의 문을 걸어잠그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바로 1637년에 일어난 기독교도들의 반란, 시마바라의 난입니다. 이를 계기로 통상과 함께 선교를 진행해나가던 포르투갈 인들은 추방되었고, 그 자리에 네덜란드 인들이 오직 통상만을 하는 조건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물론 이렇게 들어온 이들도 일본인들과는 접촉하지 못하게 철저하게 분리되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나가사키에 조성된 인공섬 데지마. 네덜란드 깃발이 휘날리는 것이 눈에 띈다.

아무튼 이렇게 기독교의 확산은 철저하게 막은 에도 막부지만 서역의 실용적인 학문은 받아들였는데, 그걸 화란의 학문이라 하여 난학이라고 합니다. 이는 특히 의학 분야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스기타 겐파쿠가 번역한 의서 <해체신서>등이 그 결과물이죠. 또한 막부는 네덜란드 상인으로부터 세계가 돌아가는 양상에 대해 대강이나마 보고를 받기도 합니다. 아무튼 이걸 보면 막부가 꽤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막부에게 있어 청나라가 영국에게 패배한 것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저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있는가?'라는 합리적인 고민이 생긴거죠. 그리고 그 우려는 곧 현실이 됩니다. 1853년 함대를 이끌고 나타난 페리 제독은 막부에 통상을 요청하고, 1년이 지난 1854년에 미일화친조약이 맺어지고, 1858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지게 됩니다. 러시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과도 비슷한 조약을 채결하죠. 열강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손을 뻗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무사의 나라, 신의 나라

일본은 그 시작부터 한 번도 계보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신의 후손, 천황이 지배하는 나라였습니다(만세일계). 하지만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던 것은 무사(사무라이)의 정점이었던 쇼군(장군)과 막부였죠.그러니까 막부의 쇼군은 나라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나, 그 권위의 정당성을 내려준 것은 형식적이긴 하지만 천황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막부의 권한이 매우 강력하다면 천황이 뭐라하든 막부는 자기 마음대로 통치를 했을 테지만, 이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습니다. 외국과의 불평등한 통상은 곧 막부의 재정에 부담을 주었고, 이는 세금 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에 전국에서 잇키(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에도 막부의 권위는 추락하게 됩니다. 더구나 천황이 미국과의 통상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퍼지게 되죠. 그러니까 '아무리 쇼군이라고 해도 그는 천황의 신하일진데, 감히 천황의 명을 어겨도 되는 것인가?'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던 이들이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기 시작하는데, 바로 사쓰마 번과 초슈 번이 그러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쓰마 번과 초슈 번은 중심인 에도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평정했을 당시 그의 반대편에 섰던 이들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벽촌에 박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에도 막부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칼을 빼어들 이들이 바로 초슈와 사쓰마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존황양이(천황을 높이고 양이를 배척한다)를 표어로 내걸고 막부와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곧 서양의 군사력을 체험한 이들은 '양이'는 포기하고 그들의 기술을 받아들입니다. 대단한 유연성이죠. 아무튼 사쓰마, 초슈와 막부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어있었죠. 그 자세한 내용은 조금 복잡하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막부는 그 세력을 잃고 몰락했으며, 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국가(겉모습만이지만)가 탄생하게 됩니다. 무사의 나라가 680년 만에 천황의 나라가 된 것이죠. 물론 그렇다고 천황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았느냐..는 이견이 있지만요. 

전쟁, 전쟁, 다시 전쟁

그렇게 세워진 일본은, 여느 제국주의 국가와 다르지 않은 수순을 밟아가기 시작합니다. 류큐, 타이완, 조선... 차근차근 세력을 투사해 나가던 일본의 다음 목표물은 이미 상처입고 쓰러져있는 청나라였습니다. 조선과 타이완에서의 지배적인 이권을 인정받기 위해 시작한 이 전쟁은 일본의 완벽한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 전쟁을 끝으로 일본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면서 청나라의 세력을 일소시켰고, 랴오둥, 타이완을 집어삼키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는 이내 제동에 걸리게 되는데, 일본(과 그 뒤에 있던 영국)의 확장을 경계하던 러시아 때문이었죠.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베이징 코 앞이었던 랴오둥을 뱉어내게 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대가를 톡톡히 챙겨가죠. 러시아는 뤼순과 다롄을, 독일은 칭다오를 각각 조차합니다(칭다오 맥주의 시작이네요). 

청일전쟁 당시 대립 구조도

이에 이를 갈던 일본은, 그들이 바라던 대로 러시아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바로 1902년의 영일동맹이었죠. 당시 러시아와 영국은 전세계를 무대로 세력경쟁을 진행합니다. 이것을 바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합니다. 영국은 러시아가 바다로 나오지 못하게, 러시아는 어떻게든 바다를 넘보기 위한 싸움이었습니다. 특히 극동은 그 대립이 꽤 심했는데, 세력을 구축하기만 한다면 대양으로 뻗을 수 있는 가장 쉬운 곳이 아시아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전개되던 와중에 영국이 장기말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일본이었죠. 아무리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열강이라고 해도 본국의 인구 차이로 인해 모든 전선을 홀로 담당할 수 없었던 영국이, 일본을 자신의 감독 하에 두고 러시아를 상대할 대리자로 내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아무튼 일본은 착실하게 세력을 키웠고, 러시아 제국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계기는 또 다시 한반도와 만주 지방이였죠. 지긋지긋 하네요 정말.  아무튼 일본이든, 러시아든 한반도와 만주는 분리하여 얻을 수 있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다 먹거나, 다 잃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입니다. 한반도와 만주를 사이에 두고 여러차례 협상안이 오갔지만, 결국 양국은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일본이 "(러시아가 제안한 것 같이) 중립 지대를 설정하려면 조선의 국경을 기준으로 50km이어야 한다"라고 통첩을 보내면서 두 나라는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러일전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넘어가도록 합시다. 지도 한 장으로 만족해 주세요.


역사 칼럼리스트 이성주 님의 말을 빌리자면, 러일전쟁은 '누가 더 실수를 하지 않았는가'로 결정될 정도로 어설픈 전쟁이었습니다. 그 만큼 할 이야기도 많고요. 나중에 뤼순 공방전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함께 지형의 중요성을 말씀드릴 때 다룰 예정이긴 합니다. 여하튼 이 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미국과 영국, 러시아에게 한반도에서의 독점적인 이권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1920년대- 기적과 절망 사이에서

그리고, 이렇게 1920년대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조선, 곧 대한제국이 된 이 나라는 전국적인 민중항쟁을 벌였으나 총칼 앞에 실패했습니다. 곧 임시정부를 상하이에 세웁니다. 길고 길었던 고난의 임시정부 생활이 시작됩니다. 아시아 최초의 혁명을 통해 공화국을 세운 중국 역시 고난의 세월을 겪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기껏 세운 공화국은 위안스카이라는 개스키가 꿀꺽했다가 죽어버리는 바람에 여러 군벌이 난립하는 형태로 쪼개지게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중국과 한국 모두 고난은 이제 시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반면 일본은 건국 이래 가장 빛나는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다이쇼 로망이라고 부르던 이 시절은, 말 그대로 '욱일승천'하던 시대였습니다. 경제, 문화, 정치, 군사 모든 면에서요. 물론 1929년의 위기를 피해가지는 못하고 무너지긴 하지만요. 

글을 쓰다보니 또 길어졌네요. 프롤로그 비스무리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것도 나쁜 습관인데 참... 암튼 1일 1글을 쓰고 싶었는데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건 힘들군요. 그래도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글 말미에 언제나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다음 글이 무엇이 될지는 저도 모릅니다. 자포니즘을 다룰지, 아니면 이거 다음 편을 쓸지, 혹은 아예 다른 시리즈를 시작할지는요. 아무튼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