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가락지네?」

그녀가 손에 끼어진 반지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동안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보았다.

처음에 그녀를 만났을 때, 그 특이하게 생긴 목걸이 비슷한 것이 눈에 띄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제 3의 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알 수없는 공포를 느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자기가 직접 그 눈을 바늘로 아예 꼬매 버렸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말은, 
아마 내가 그녀에게서 느낀 어떤 거대한 불확실성만큼이나 어떤 의미로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가끔 투정부리거나 그런 어린아이같은 면이 많지만… 그래도 그런 아이같은 모습을 좋아했던 것같다.
반지를 살 때에는 그런 각오였었다.
그녀와 함께 같은 시간 위를 걷고 싶다는 이런 소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래?」
「…」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빙그레 웃으면서 자신을 바라본다.
초록색 머릿결이 흔들릴 때마다 좋은 향기가 난다. 또, 그녀가 나를 바라볼때만큼은 달라지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래,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나를 두근거리게했다.
자신이 건네준 반지의 상징성을 아는 수준을 넘어 이해하는 그녀는 자신이 재밌다는듯이 계속 반지와 자신을 번갈아서 본다.
「이런 저런 행위를 했지만- 결국은 사랑?」
 「…」

-묘하게 날카로운 그녀의 말이 신경쓰인다.

가끔 그녀의 정신 연령이 몇 살일까하고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다. 
말을 잘 안하는 편인 그녀가 내뱉는 말은 어떨 때는 3살짜리 어린애가 하는 것 같은 경우도 있었고, 
70살 먹은 노인이 하는 느낌도 있었는데…
-아예 나이의 범주를 넘어선 말을 하게되는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경우도 있었다.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결국 그녀도 요괴인걸까.
인간과는 다른 사고관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그저 넘겼다.

그런 일말의 어떤 불안감을 지우고 싶어서 조용히 손을 뻗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씨익 웃으면서 내 무릎에 앉아서 그런 쓰다듬을 받았다. 
쓰다듬을 받는 동안 노곤해진 그녀의 눈이 점점 감기더니 꾸벅꾸벅하고 졸기 시작한다.
답변을 받지 못해서 묘하게 발끈한 나는 그녀의 이마에 딱콩을 먹였다.
눈을 번쩍 뜬 그녀가 아픈듯이 이마를 감싼다.
「우우…아파. 답은 이미 했잖아」
「언니하곤 다르게 난 더 이상 마음을 못 읽어…」

「그러니까 당신의 진짜 마음을 모르겠어…」
 그녀는 얼굴을 들어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믿어도 좋은 거지?」
「왜냐면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남자인걸, 난 믿어♪」


이미 코이시는 평소의 웃는 얼굴로 돌아와있었다
「근데 말야, 결혼하는 건 그렇다 치고 어디에 살 거야?」
「내 집으로 올래? 아니면 익숙해진 여기가 좋아?」


「뭐, 나는 익숙해진 집이 제일인 거야. 그렇지만 당신하고 함께라면 난 어디라든 좋아♪」

「……부족한 몸이지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영원히 잘 부탁합니다!」

 


 

―――단독 엔딩 조건 달성―――
…………
………
……

-행복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처음 제야의 종소리를 듣던 그 울림을 기억한다.
섣달 그믐날 밤이 오기 전날- 
평소의 그 옷차림과는 다른 모습을 보고싶어서 큰 마음먹고 옷가게에 데려가서 비싼 돈 주고 전통 의상을 구입했다.
옷에 장미꽃과 나비가 아름답게 수놓아진 그 옷을 입고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예쁜 옷이네?」
「…응」
「고마워!」
자신을 끌어안아주는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포옹같은 정말 일상적인 순간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길가마다 다채로운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환상 시골의 인구가 늘어 신도 수가 더 늘어나 새로 신축한 묘렌사(命蓮寺)에서 같이 맞이하던 
한 해의 마지막날 밤은 정말 아름다웠다.

「있잖아, 당신은 불꽃놀이 좋아해? 난 정말 좋다고 생각하는데♪」


나비의 날개짓같은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을 때, 그녀가 입을 벌리고 감탄하면서 같이 손을 잡고 하늘을 보던 추억은,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순간이었다.
불꽃놀이가 끝나고 이어진 마녀가 하늘에 뿌리는 별탄막을 보면서 그녀가 자신에게 팔짱을 끼었을 때,
세상이 정지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세상-
다만 그녀의 체온과 감촉, 향기만이 느껴지는 그 순간의 행복은-
어두웠던 자신의 과거를 그녀가 그녀의 옷처럼 밝은 색으로 채색해주는 것 같았다.


그녀가 그 작은 몸을 이끌고 설거지를 하면서 자신을 보고 싱긋 웃으면서 가사일을 돕던 순간
 
같이 비내린 숲길을 같이 손잡고 걸으면서 산책을 나가던 순간

더운 어느 여름날 마루에 뻗어서 같이 낮잠을 자던 순간

시장을 보러나갈 때 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어가던 순간

아침마다 자신을 꽉 끌어안아주던 순간

무릎위에 앉아 자신을 안아주던 그녀와 입맞춤을 하던 순간-


삶의 행복은 그런 작은 기적들의 연속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것은 그런 나날들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언젠가 동료들과 술을 한 잔하려고 잠시 그녀를 홀로 두고 나갔을 때, 
집 안에 들어 온 순간 집안 상황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빨간색 펜으로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를 크게 적어, 벽 전체를 빨갛게 물들인 모습과  
식칼로 그 벽을 파내면서 히죽히죽 웃던 그 모습은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 사랑하던 이의 원래의 모습이 아니었다.
문에 서서 굳은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던 자신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씨익하고 웃던 그 모습은
예전의 그 눈동자가 아니였다.
한 걸음씩 자신과 가까워지는 그녀의 모습에, 분명 예전같았다면 공포에 질려 도망쳤겠지만,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마침내 칼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그녀가 걸어왔을 때, 그녀는 웃음기가 사라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칼을 쥐지않은 손으로 자신을 벽으로 밀쳐냈다.
-그리고

푹

벽에 칼이 박힌다.

고개를 숙인 채로 벽에 칼을 박아 넣은 채로 정지한 그녀는,
땅에는 입에서 떨어지는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전신에서 나오는 땀을 비오듯이 흘리면서, 
고통스럽다는듯이 숨을 헐떡이면서말했다.

「…도망쳐-」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의 손에서 칼을 조용히 뺏어서 그녀를 끌어안아주었다.
그리운 체온을 기억하는 그녀의 몸은 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단지, 그 때까지도 자신은 그것이 그녀가 요괴이기에 자신의 힘이 폭주하는, 그런 종류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시작에 불과했다.

어느날 집에 늦게 돌아왔을 때에는 
의자의 다리를 모조리 부숴 놓고는 『앉은 뱅이들이 편해지고 싶데-』하는 말을 하면서 킬킬 웃어댔고,
어느날 집에 늦게 돌아왔을 때에는 
온 집안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고는 『익사』라는 글씨를 바닥에 크게 써놓고는 앉아서 천장을 보며 웃어댔고,

…그 날 하늘로 솟는 연기를 보고 불안감을 느껴 뛰어갔을 때에는 집은 이미 불바다였다. 

지붕과 2층이 완전 전소되어있는 그 모습에 얼어붙어있을 때 그 불타는 집 안에서 코이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보다, 그녀가 집 안에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향해 달려가는 내 발걸음이 더 빨랐다.
집 안으로 뛰쳐들어가니, 타고 있는 것이 타지 않는 것보다 많았다. 
매쾌한 연기는 집 안을 가득 채웠고, 나는 죽어라고 코이시의 이름을 외쳐댔다.
그리고 불타는 그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방들을 확인했을 때-

그녀가 집 밖으로 나가는 문쪽의 복도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어서 집밖으로 나가라고 외쳤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보면서 킬킬킬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의 이면에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비어있었다.


…영원정(永遠亭)을 찾아가기 위해서 그녀를 업고 미혹의 죽림을 뚫고 가던 것은 그 날 밤이었다.

 
알 수 없는 요괴의 울음소리
대나무가 부딪힐 때마다 들려오는, 바람마저 길을 잃는 미로같은 죽림의 속삭임
마을의 밤 순찰을 도는 사람들이 그녀를 업고 죽림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을 뜯어 말리려고 했지만, 개의치않고 달려갔다.
방향마저 잃은채로 무작정달렸다.
그녀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몇 시간을 달려 탈진해버린 나는 그녀를 업은 채로 쓰러졌다.
그녀의 체온이 빠르게 식고있었다.
주변의 요괴들이 내는 듯한 속삭임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무기력함에 치를 떨며 쓰러진 채로 그녀를 끌어안고 울었다.


「-이런시간에 인간이라니 겁이 없구만…」
 

고개를 들었더니 멜빵바지를 입은 하얀 장발의 소녀가 어느새 자신들의 옆에 서있었다.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감은 들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나는 어떻게 되도 좋으니 제발 이 아이만큼은 영원정에 보내줘..」

 그 절절함은 답을 얻었다.


인상을 잔뜩찌푸리는 그녀는 나와 코이시를 붙들고 날아올라서 영원정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축시(丑時)의 가장 어두운 밤에 찾아온 손님을 보는, 토끼들이 시중을 드는 흑색 장발의 소녀가 그런 은발 소녀를 보고 욕을 해댔다.
그러나 그녀가 들고 온 한 불쌍한 남자와 죽어가는 한 여자를 보고는 혀를 차면서 들여보내주었다.


진료시간은 한참 전에 끝났으나, 
저택 안쪽에서 토끼들과 노닥거리던 한 토끼귀를 한 소녀가 사정을 듣더니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무한한 크기같이 느껴지는 그 저택에서 우리의 사정을 들은 그 소녀는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잠시 뒤 의사 가운을 입은 한 여성이 나왔다.

「흠- 우선은 진료시간은 끝났지만…」
눈물로 범벅이된 자신과 뒤에 업혀서 점점 눈동자의 빛을 잃어가면서 숨을 헐떡이던 코이시를 본 그녀가 말했다.
「…원칙보다는 목숨이 중하니 우선 그녀를 진료실로 데려오세요.」
진료실에서 그녀는 여러가지를 테스트했다.

피를 뽑고, 동공을 확인하고, 심박수를 재고- 
그런 각종 이름 모를 검사 끝에 마침내 그녀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일단 과도한 성행위는 둘째로 치더라도, 문제는 그녀의 제 3의 눈인 것 같군요.」
「…」
「…사토리 요괴인 그녀가 제 3의 눈을 닫고 무의식의 세계에서 살다보니, 일종의 항상성이 틀어진겁니다.
요괴의 본질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요괴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존의 정신과 이후의 정신이 충돌한 것 같군요.
원래라면 무의식의 세계에 사는 그녀가 당신이나 일반 사람들한테도, 심지어는 테위에게도 보인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능력이 제어범주를 벗어난 것 같습니다. 
또, 이런 경우에는 과거의 몇몇 트라우마적인 기억들이 그녀의 정신을 괴롭히는 것같군요.
…예를 들어 성폭행같은 그런 아주 오래전의 충격적인 경험들이 주는 상흔이 남긴 감정의 찌끄러기가 
무의식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겁니다. 또 그렇다면 이런 경우에는 생각해 볼 수 있는게…」
그녀가 의심쩍다는 듯이 묻는다.
「…혹시 정신 이상의 증후를 보이지 않았습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여의사가 입술을 지긋이 깨문다.
「-우동게 수술실을 잡아주세요. 수술 장비는 모두 챙겨오시고요.」
「…사부. 이거는 그 경우 아니야…?」
「…해 볼 수 있는데까지는 해 봐야지.」
「무슨 말이야 당신들…?」
「…일단 그녀의 제 3의 눈을 강제로 열고 무의식과 의식을 싹 지우고 새롭게 쓸겁니다. 
문제는 무의식이나 의식이라는 것이 부수고 다시 만드는 장난감같은게 아니라는 점이지요.
…아무리 저라도 의학적 지식이 허락하는 범주에서 그녀의 기억 상당 부분을 희생하고 수술을 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기억을 잃는다고…?」
「…목숨과 기억 둘 중 어느 쪽입니까 남편분」
그녀의 왼손에 끼어진 약혼반지와 같은 반지를 끼고 있던 자신을 주의깊게 보았던 그녀가 말했다.
 「…」
모든 것을 다 잃어도 그녀를 살리고 싶었다.


추억까지도


자신의 삶까지도


「…부탁입니다. 제 아내를 살려주세요…」
---―――――――――――――――――――――

「…수술 준비 끝났어. 사부.」
「…몇몇 수술을 보조하는 토끼들과 먼저 들어가있을게. 남편한테 수술 내용 설명해주고 바로 들어와.」
「…알았어 사부.」
수술실에 그녀가 들어가자 -수술중-이란 글씨가 문 앞에 마법처럼 밝게 빛난다.
수술실 앞에 마련된 의자들
앉아 있던 자신과 자신의 앞에서 있는 토끼 귀를 한 키 큰 소녀가 유일하게 그 복도에 있었다.
이미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운 자신에게 수술 내용을 설명해 주려고 서있는 그녀는 말없이 자신의 말을 기다렸다.
「…말해줘 그녀는 살 수 있는거야…? 행여 잘못되거나-」
「『달의 두뇌』인 사부를 얕보지 마세요.」
「…」
「…사부는 모든 병과 약- 의학에 통달하신 분입니다. 반드시 해낼겁니다. 반드시…」
「…」
그녀의 확신있는 말에도 여전히 두려웠다. 
…혹시 수술이 잘못되어 그녀가 죽는, 자신의 마음과 정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런 무서운 생각들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의 전부였다.
그녀가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 한다.
그녀는 살아야한다.


왜냐면-

 

왜냐하면…

다시 터져나온 울음에 의자에서 얼굴을 감싸고 우는 나를 그녀가 어깨에 손을 얹히면서 안심시킨다.
그리나 시간이 촉박하기에, 나에게 잔인한 현실을 설명해야하는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심호흡을 한다.
「…전두엽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뇌의 부분들을 들어내듯이 수술할겁니다. 또 그녀의 제 3의 눈도 마찬가지고. 
…의식과 무의식의 거의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수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특히 대뇌와 해마부근의 기억들을 상당부분 건드리는 아주 위험한 수술이기에,
수술이 끝나고 나서도 그녀가 식물인간처럼 오래지내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망가지기 시작한 그녀의 정신을 고치고, 그녀를 살릴 수 있습니다.」
「…」
「…깨어나면 그녀가 당신을 기억해낼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이건 확실하게 말하라고 사부가 나한테 당부하고 또 당부했습니다.
…수술은 게임같은게 아니라 생사(生死)가 걸린거니까.」
 「…부탁할게 …아내를 살려줘…」
「…사부를 믿어주세요.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해내시는 분이니까…」
 무거운 발을 떼고 그녀가 수술실 안으로 들어간다.

적막

사랑하는 이를 수술실에 홀로 들여보내본 사람만이 이 기분을 알 수 있다. 

마음속의 심연에서 기어올라와 부정적인 생각을 속살거리는 악마의 웃음과
좀 더 잘해주지 못한 죄책감을 거울처럼 비추는 후회와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반성하고 가장 진실된 눈물을 쏟는 그 순간은
 -사랑하는 이가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큰 무게감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한다.

「…죽지마.」


자신이 저지른 과거의 악행때문에 죽는다면 가슴이 찢어져서 미쳐 죽어버릴 것 같다.
그녀는 살아야한다.
더러운 오물로 점철된 시궁창같은 인생을 살던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려준,
어두운 심연 가장 깊은 곳에서도 가장 밝은 빛을 들고 다가와준 천진난만한 그녀는,

자신의 목숨보다 무거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사랑하는 그녀는-

――――――――――――――――――――――――---

오늘은 그녀와 처음으로 영원정의 재활치료코스로 마련된 산책로를 걷는 날이었다.
초점을 잃은 눈을 가진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환자와 그들의 보호자들이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산책 코스로 천천히 데려갔다.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녀는 여의사의 말대로 아무 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말도, 간단한 동작도 도움없이는 아무 것도 못 하는 상태였기에 항상 자신이 옆에서 보조해주었다. 
아예 영원정의 말단으로 들어와 온갖 병원 일이나 영원정 청소등을 도우면서 항상 그녀 곁에 있었다.

 전보다 훨씬 규모를 확장한 영원정의 의료시설은 약사였던 그녀의 생각이었다.
이전보다 환자들이 늘었기에, 캇파로부터 사온 각종 의료 기기등을 들여오고 입원실등도 마련하면서, 
예전에 소일거리정도로 생각한 일이 상당한 규모가 되었다.
'단순한 소일거리가 아니라 아예 일을 벌이는구만 이 녀석…' 이라며 혀를 끌끌차던 공주도 지루하기만한 
영원정 생활보다야 그런 편이 재미있어보였는지 흔쾌히 그런식의 확장
을 허락했다. 「천천히 걸어 코이시. 자. 한 발씩- 그래. 한 발씩…」 그녀의 수발을 든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단 하루도 지루하거나 싫증나는 적은 없었다.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웠기에, 그녀의 가장 곁에서 항상 그녀를 돌보고, 먹여주고,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었다.
하루 하루가 기적 같았다.
수술이 끝난 이후 한참이 지난 어느날, 처음으로 손가락이 움직이던 순간 처음으로 턱 관절을 움직여 음식을 씹던 순간 처음으로 눈꺼플을 닫고 눈을 깜빡이던 순간 -모든 순간이 감동이었고 기적이었다.
「힘들어? 조금 쉴까?」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고 툇마루가 있는 위치까지 천천히 이끌어 튓마루에 앉혔다.
오늘은 날이 맑다. 산책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같이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녀가 희생이란 단어의 뜻을 깨닫게해주었다. 희생은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행위인 그것은, 단순히 목숨을 무엇인가를 위해 버리는 데서 오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정의 내릴 수 없는 슬픔과 기쁨을 주는 사랑이 있어야 그 단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 난다.
그녀를 위해 속죄한다는 생각이 아닌,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 위한 의도가 아닌,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그녀를 돕고싶어하는, 
-모든 것을 이겨내게하는 그것이 주는 빛은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기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당신도 보았으면 좋겠네- 저 하늘의 색이 장난 아니거든… 구름은 또 어찌나 예쁜지.」
「언젠가 좀 더 나아져서 제대로 걸을 수 있을 때가 되면, 다시 제야의 종소리를 같이 들으러가자… 이건 내가 약속할께.」
「당신 몸은 하나도 안 바뀌었으니 예전의 그 예쁜 옷이 여전히 어울릴거야… 분명히 말이지…」

하늘이 맑다.

죽림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은 어느 과거의 여름날의 어떤 추억들을 생각나게한다.
행복했던 그 기억들이 생각나는 그 순간- 옆에 앉아있던 그녀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의 손을 잡아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에는 너무 놀라운 일이어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

오래된 침묵을 깨고 처음 나온 그녀의 목소리에 주변의 모든 사람과 토끼들, 심지어는 그 의사마저도 하던 일을 멈추고 얼어붙은 채로 우리를 지켜본다. 

「…당…신」

그립고 잊혀져가던 그 목소리는 자신의 전신에 퍼진다.

마음과 가장 어두운 심연 속까지 깊고 아름답게 울려퍼진다.

「…불꽃놀이…좋아…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Ending No.1064 A (코이시 엔딩- 무의식에 새겨진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