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왁자지껄하던 소리가 일순간 사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고, 이데인의 눈은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순식간에 본인 쪽으로 시선이 쏠린 걸 당황하는 듯한 어린 숙녀는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같이 있었다. 처음 보는 아이였다. 이데인은 소피아가 다가와 손을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걸 들었다.
 “이번에 새로 무역으로 부를 쌓은 집안의 딸입니다. 처음 ‘궁전’에 들어와 이쪽 세계의 사정을 전혀 모를 겁니다.”
이데인은 그때까지도 천연덕스럽게 손에 들고 천천히 돌리던 와인잔을 입가에 댔다.
 ‘한 번도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한 부잣집 딸이라…?’
 한 번에 와인을 쭉 마시고는,
“내 말 맞지 않아?”
 잔을 쾅 놓았다.
 순식간에 유리잔이 박살 나 버리는 것에 놀라 새된 비명이 울리고, 이어 웅성웅성 시끄럽게 변해갔다. 주변에서 “아가씨 괜찮으세요? 손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하는 얘기가 오갔다. 이데인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응, 괜찮아.”하고 피를 뚝뚝 흘리며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일어났다.
이데인이 한 걸음 떼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차린 사람들은 조금씩 비켜섰고 그것은 점점 멍청한 말을 뱉은 숙녀와의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데인은 늘 똑같이 웃던 그 미소로 말했다.
 “어쩜 ㅡ.”
 걸어가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느리지도 않았다. 긴 다리는 금세 그 숙녀에게 향했고, 아마 처음 들어와 이곳 상황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철부지 어린아이.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리 멍청할까.”
 고개를 숙이자 그림자에 갇혀 살짝 무서워하는 얼굴이 스치는 것 같았다. 아주 가끔 이런 일이 있긴 했다. ‘기적’이라는 건 직접 보지 못하면 잘 와닿지 않고,
 “내, 내가 틀린 말 하는 건 아니잖아!”
 말 그대로 상징에 불과할지도 모르니까.
 이데인은 숙였던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느긋하게 손에서 피가 떨어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며 끼고 있던 반지의 보석이 손바닥 쪽으로 향하게 했다. 아이는 이제 자신의 그림자 안에 있었고, 한 번도 이런 상황에 부닥친 적 없는 이 부잣집 아가씨는 왜 누구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래, 넌 틀린 말을 하지 않은 걸지도 몰라.”
 웃음은 늘 미소로, 잔잔하게 흘렀으며
 그대로 얼굴을 날려버렸다.
 비명이 터졌고, 바둥바둥했다.
 이데인은 본인이 친히 엎드려 본인의 다리와 한쪽 손으로 결박하고 눈물 터지는 숙녀 하나를 향해 속삭였다.
 “그런데 우리 숙녀님, 내가 하나만 알려줘도 될까?”
 그대로 주저앉은 채 있는 얼굴을 친히 숙여 똑바로 잡았다. 그리고 혹시라도 보석이 흐트러졌을까 손바닥 쪽으로 향해 있는지 보는데 그 표정이 기묘해 소름이 끼쳤다. 이데인은 그림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들은 목줄 묶인 이 짐승을 제일 무서워해.”
 비명이 터지고, 또 터지고 이 화려한 ‘궁전’을 한동안 가로지르고
 마침내 잦아들었다.
 이데인은 아무도 말리지 않는 걸 느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병사들이 다가오자 손가락으로 얼굴이 부풀어 오르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옆에는 이가 몇 개 빠져 있었고, 이데인은 본인의 손바닥에 잔뜩 묻은 피를 흘리며 유리 조각을 천연덕스럽게 빼냈다.
 “치워.”
 이데인은 흐트러진 왕관을 재정비하며 휙 돌아섰다. 그러자 목에서 방울 소리가 났고, 걸을 때마다 울렸다. 금빛 왕관은 샹들리예의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왕관의 박힌 갖가지 보석이 빛나며 움직였고, 액세서리들이 움직임에 맞춰 찰랑였다.
왕관을 쓴 채로 자리에 앉았다. 다리를 꼬자 다시 이데인에게 몰려들었다. 선물을 받으면서 소피아가 옆에 서서 하는 말을 들었다.
 “나중에 원한을 살지도 모릅니다.”
 이데인은 웃어주던 그 얼굴로 말했다.
 “……원한을 다 셀 수는 없어.”
 소피아는 이데인을 바라보았다. 이데인은 말한 것조차 모를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소피아는 힐끔 손바닥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치료는 받으세요.”

***

 “얼음은 없니?”
 한참 유리 조각을 빼고 소독하고 치료받은 이데인은 소피아와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침대 한쪽에 왕관을 벗었다. 그리고 곧바로 피곤한 듯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푸른 나무의 땅’ 사람들이 이제 귀찮기도 했고 그들이 좋아하는 의자가 불편하기도 했다. 피를 흘린 덕분에 그들에게서 빨리 벗어날 수 있어 기뻤고,
 ‘선물도 빠짐없이 챙겼지.’
 탁자에 쌓인 선물 때문에 기뻤다. 분명 그들이 준 것이니 귀중한 것들일 테고, 늘 달고 다니는 주머니도 두둑이 채웠으니 오늘은 이만하면 만족할 수 있었다.
 “흐흥~”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옆에 서 있던 소피아가 “얼음 가져오겠습니다.”하고 문을 열었을 때.
“언니. 오빠가 안 오는데……”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연 소피아를 올려다보고, 문 너머 이데인을 찾는 듯 고개를 빼 들더니 이제 침대에 앉은 이데인을 찾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들어가도 돼요?”
 소피아는 아이가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좀 더 열어주었다.
 “응, 들어와.”
이데인은 소피아가 사라지는 거 확인하며 “문 좀 닫아줄래?”라고 말했다. 아이는 들어와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멀뚱멀뚱 서 있는 걸 손으로 툭툭 침대 옆자리를 치자 아이가 걸어왔다. 빙그레 웃는 것을 한참 보던 에디스는 “언니 되게 이쁘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데인은 웃음이 터졌다.
 “너 벌써 사회생활 배웠구나?”
 ‘기분은 좋네.’
 “하지만 나한테는 그런 말 필요 없어.”
 에디스는 그 말을 아는 건지 “진심인데.”하고 싱긋 웃었다. 그다음에는 이데인을 위해 마련된 방 곳곳을 둘러보는 듯했다. 힘준 듯, 화려하게 물결치고 올라가는 옷장과 폭신한 침대, 금으로 칠해놓은 모든 가구와 마지막으로 탁자 위 수북한 선물들까지.
 아니, 반짝반짝 빛나는 눈까지…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니?”
 사실 알고 있다. 아이 같기도 했고.
‘아니면 아이라는 걸 무기로 쓰는 건가?’
 “뜯어보고 싶어요.”
 그 말에 대충 뭘 원하는지 감 잡았다. 예의 바르고 조금은 소심한 소녀라고 생각했는데,
 “하나 줄까?”
 생각한 거랑 약간은 다른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밝은 눈으로 “네!” 하는 걸 보며 뭐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 하나쯤 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 같이 하나하나 까 볼까?”
 이데인은 재밌는 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사실 그렇게 재밌는 일은 아닐 텐데도.
 이데인은 선물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얘네들 생각이야 뻔하지.’
 ‘푸른 나무의 땅’ 사람들 사이에서는 집안과 부와 그리고 원하는 것을 따져가며 선물을 주고 밭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친분이 있지 않으면 부담스러운 선물이 올 때 거절해야 하는 게 맞고 그들이 그만큼 바란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이데인이 자유의 몸도 아니고 지금 누구의 집에서 사는지도 뻔히 아는 상태에서 저런다는 건.
 ‘나보다는 ‘아버지’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지.’
또는 이데인을 끌어들여 ‘아버지’의 권력을 조금이라도 없애고 싶어 하거나.
 후자의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지금 그에게 반기를 드는 건 굉장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사업 전반을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 게다가 그의 손아귀에 사람들이 말하는 ‘기적’이 목줄을 맨 채로 있는데.
 이데인은 선물을 보며 단순히 가지기만 원하는 에디스에게 이런 속사정을 설명해줄 수는 없고, 웬만하면 본인이 원하는 걸 주자고 결심하며 아이가 손 다친 본인 대신 차례차례 뜯는 것을 보았다.
 ‘뭐 선물 뜯는 기분을 느낄 수는 있지.’
 처음에는 옷을 거의 입지 않는 이데인에게 필요 없는 거대한 보석 달린 브로치가 나왔고ㅡ이데인은센스없는 자식이라며 속으로 욕했다ㅡ, 향이 진한 향수, 굉장히 큰돈을 치렀을 보석, 기타 등등. 에디스는 그런 거에도 감탄했지만, “브로치는 언니한테 필요도 없는데 센스 없다.”라며 배시시 웃었다. 이데인은 “너 참 마음에 든다”라며 깔깔 같이 웃어대고 있을 때 에디스는 마지막으로 작은 선물을 풀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문서가 나왔다.
 이데인은 다소 이상하게 생각하며 문서를 들여다보았고 에디스는 먼저 그 문서를 훑었는지 놀라는 표정과 함께 설레는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저 이거 주면 안 돼요?”
 그 말을 듣고 사실 제일 놀란 건 이데인이었다.
‘아니 애가 이 문서가 뭘 말하는 건지는 알고 달라 건가?’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깨고 에디스가 말했다.
 “이거 땅문서예요!”

***

‘이 자식 도박했네?’
완전 또라이 같은 도박이었지만, 이 사람 현실적으로 계산해본 것이 분명했다.
본인의 안전을 위해서 이름은 지워져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선물을 놓고 갔고 선물을 준 사람들 얼굴을 일일이 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얼굴도 몰랐다. 일단 이런 걸 주었다는 시점에서 도박은 맞았지만, 철저한 사람임이 분명했다.
 ‘어떻게든 내가 그곳으로 가면 손을 잡은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다 이건가?’
 지역이 어딘지도 쓰여 있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그 위치는 ‘궁전’에 들어올 만한 신분을 가졌거나, 부를 취한 이들이라면 살지지 않을만한 위치였다. 수소문해보면 알 수도 있을 터였지만, 이데인이 그런 것을 믿고 시킬만한 인물은 지금 없었다.
조금 씁쓸하게 생각하던 이데인은 다시 땅문서를 꼼꼼히 살폈지만, 아무런 단서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리만 복잡해졌다.
 ‘지금껏 이런 시도는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우와 우와.”하는에디스에게 차마 복잡한 사정은 설명해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걸 주기에는 에디스나에드가한테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제일 커다란 것을 본능적으로 움켜쥐고 가지려는에디스한테서 결국 하지 않으려고 했던 말을 했다.
 “미안, 그건 언니가 못 줘.”
 “아…….”
 그냥 실망한 것도 아니고 엄청 실망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거에 실망한다는 것도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 나이에 반짝이는 보석보다 저 문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달라는 게 보통인가?
 ‘아니면 에디스한테 뭔가 다른 게 있는 걸까?’
 “저는……”
 “응, 너도 욕심이 꽤 있는 것 같더라.”
 이데인은 깔깔 웃었고 에디스는 이렇게 말해버리는 사람이 처음이라는 듯이 동그랗게 떴다. 놀랐다는 듯이 보는 게 조금은 귀여워서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차분히 말했다.
 “’받은 건 늘 보답하는 마음으로, 감사히 여겨야 하지만 주는 걸 함부로 받는 것도 매번 좋은 것은 아니란다.’"
 딸랑 ㅡ.
 창으로 걸어갔다. 방울 소리는 청명하게 발끝을 좇는다. 이데인은 창문을 열지 않았다. 검은 쇠시리 장식이 고풍스럽게 무늬를 그렸다.
 “내 엄마가 했던 말이었어.”
늘 창밖의 하늘은 푸르렀다.





요약본 링크는 수정 후에 올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