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한 여행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설정입니다.

 

독일이 청와대를 점거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후,

이진혁 전 대통령이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은 소년이었던 내게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10년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마침 해외 여행을 갈까 생각중이었던 나는 만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에서 내려 만주로 도착한 나는 광장에서 이진석이라는 사람의 동상을 보았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약간 할 줄 알았던 중국어로 말을 걸자, 

'만주 민주화의 거두' '만주의 영웅' '국부'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민주화 운동을 이곳에서 열었다고 한다.

혹시나 해서 필름 사진기에 사진을 몇 장 담아두고, 나는 먼저 가려고 한 목적지인 만주 이씨 기념관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도착한 만주 이씨 기념관은 생각보다 넓었다.

이진석 동상은 이곳에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동상이 입구 쪽의 광장에서 나를 맞아주고 있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 전시관에 들어갔다.

짐작했었지만, 역시 이진석이라는 사람은 만주 이씨의 시초였다.

그는 다른 아이들이 놀 때, 혼자 독서에 몰두했으며 철학에 깊이 빠져 지냈다고 한다.

떡잎부터 남달랐던 그는 민주주의라는 사상에 심취하여 반 제국주의 운동에 일생을 바쳤고,

만주 공화국 건국준비위원장이라는 직책에 선출되기까지 한다.

그 뒤 만주의 총리로 당선되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해 힘썼으나, 갈리아의 침공을 당했고,

그는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는 국제 사회에 갈리아가 저지른 전쟁 범죄들을 고발했으나, 그에게 돌아왔던 것은 한반도의 가택연금이었다.

그 뒤, 한반도가 무정부화되자, 그는 슬라브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대한연방과 슬라브의 유서깊은 동맹 관계는 여기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후, 바타비아의 총독직을 맡으나, 갈리아의 이진석 송환 요구에 응한 바타비아에 의해

갈리아로 오게 되고, 다시 가택연금을 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91세였다.

전시관에는 그의 젊은 시절 초상화와, 극초창기의 사진기로 찍힌 말년의 모습이 있었고,

그가 생전에 쓰던 붓, 만년필과 그가 쓴 필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후회와 후회'라는 책의 초판이 멀쩡한 상태로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지금도 팔리는 이 스테디셀러가, 사실 이 분에 의해 쓰였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

몇 번이나 읽었으면서도 작가에 대한 탐구도 하지 않았던 나를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