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보답하고 싶은 자'
[제목 인용출처: 현각, 『만행·하버드에서 회계사까지 2』 , 열림원, 2002, p.192.]


여지껏 소리소문 없이 내 영혼 위를 짓누르던 겹겹의 지방 덩어리를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고집으로 벗겨내고자 안달나 있는 그 모진 비수들이

때마침 어느 한 순간에 광활한 창공 안을 가로지르며

별자리 짜이듯 무한한 속도로 주파하기 시작한다.


내게 길들여진 비수들은 더 이상의 정체를 견디지 못해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사방의 구덩이 속으로 부리나케 파고 들어가더니

돌연 균열의 점증하는 메아리가 내 주위로 울려퍼지면서

여태 묵상하던 질서의 나약함이 비로소 지층 사이를 뚫고 스며나온다.  


그러자 휘몰아치는 파열에 젖어들던 이 둥지의 밑동으로부터

무엇인가 뿌리채로 감겨든다.

그리고 앞으로 곧 벌어질 이 장엄한 광경을

넋놓고 바라보는 운명에 나는 그만

충동적으로 손을 담구어 버린다.



이제까지 망막 안에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그분의 고결한 육신이 불현듯

모든 사물을 간단히 뒤덮을 수준의

한없이 홀가분한 광채를 뒤덮은 채로,

자잘하게 휘몰아치는 통증의 응어리를

안으로부터 단숨에 집어삼킨 채로,

그저 한없이 펑퍼짐한 대양의 자태로 솟아오르며

나를 도탑게 맞이하고 계셨다.


그러고선 그는 어떤 중얼거림의 틈새도 없이 곧이곧대로 말하기를

"이것이 너가 그토록 그리던 나의 진정한 본모습이었음을 너는 어찌 알고 있었느냐, 참으로 대견하도다."

라며, 내가 무심코 그에게서 듣고 싶었던,

아니 차라리 이런 기대마저 할 겨를도 속히 물러낼 만큼이나

그리 발빠른 화답을 고히 내 가슴 속에 얹어주시곤 했었다.


그간 훌륭한 석공 수십명이 애써 달라붙어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 듯 했던 암석이었건만,

누구나 익히 바라보았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즐겁게 베껴 그려놓은 이 종이 비행기 하나로

생각없이 톡 던져 날려보냈던게

이리도 허망하게 무너져내릴 줄은 나는 꿈에도 몰랐다.


정녕 이것이 나의 능력이었다고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 내 가슴팍에 공들여진 표창 하나를 달아주었던 것이다.    

그러고선 '이것이 왜 제 것입니까' 싶은 의구심마저 그는 간단히 물리치려는 듯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그 찰나에 또 한 번 무한한 잠결 속으로 파고 들어가신다.


이후 그가 떠나버린 자리에는, 그 자리 자체마저 사라졌음에도,

오로지 '머무름'만은 홀로 뭉툭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새겨진 허공 안을 조심스레 고갤 숙여 들여다보면

그 끝에는 단지 내가 하사받았던 깨끗한 표창 한 조각의 광택이

어둠의 공세를 무릎쓰고 올곧게 한 점으로 반짝이며

내가 앞으로 가야할 길의 풍경을 정겹도록 비추어내고 있다.


이윽고 나는 이 소중한 풍경을 안주머니 속에 고스란히 쟁여 놓아

몽롱함을 한껏 풍겨내는 차림새로 숨가쁘게 바깥을 나선다.

언젠가 보게 될 오염된 길가 위로 가엾게 피어오른 꽃들에게

빛 한 모금 마시는 기쁨이 진실로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또한 누군가를 되살펴준다는 일의 행복을 친히 베풀어줄

선량하기 그지없는 형제자매들과의 고요한 교감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서,

지금도 나는 굶주린 침묵을 벗삼고자 이 자욱한 표류 속에 삶을 내맡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