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유리벽은 우리에게 나름대로의 휴가를 준다. 이런 직접적인 방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으나 유리라는 소재는 한마디로 특이하다. 이른바 결정화되지 않은 고체라는 것으로 오래된 창을 보면 마치 흘러내린 것 처럼 아래부분의 두께가 뭉뚝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오래된 건물을 보면 우리가 나이테처럼 겹겹히 쌓여온 세대 위에 올라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현택의 서재의 책들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서재를 통유리방에 놓아두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판단인 듯 싶다. 햇빛을 보면 표지가 바래버리니까.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이 곳의 가구와 물건들이 정돈되어 있는 반면 나의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하다. 물론 실제로 나는 정리정돈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서 더 끌린다고 할까. 지금 날씨보다는 조금 더 햇빛이 얕은 안개에 덮혀져서 약했고 약간 습하기도 했다. 나는 구도서관 앞 벤치에서 체육복을 입고 앉아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나는 그게 병수가 운동하기 싫어서 그렇게 짜져있는 줄 알았다. 매미소리가 징 징 울렸고 학생들 떠드는 소리로 야외는 어수선했다.


 "야 누가 또 그렇게 찐처럼 앉아있으래?"


 그렇게 어깨를 툭 쳤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때 든 생각은 지금이 분명 체육시간인데 야외에 이렇게 덥고 습하면 분명 더울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그의 뒤쪽 목덜미에 땀방울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습하거나 무더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깔끔하고 산뜻한 인상을 나에게 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그렇게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았다. 갑자기 얼굴 평가를 해버린 나 자신이 오만하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하면서 나는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고 현택이라는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는 학교가 감옥이오 우리들은 개미같은 존재이며 그저 관리당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의 몸이 강금당하고 정신 또한 제어받을 지언정 우리의 상상력과 행동은 우리의 지적 사고가 일구어낸 일종의 승리이기 때문이야!"


 "그래. 그건 정신승리이지."


 "그렇지 않아. 너와는 다르게 나는 이제 풋살을 할거야. 현택아. 너는 거기 계속 앉아있어도 돼."


 "아니. 나는 이제 일어나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감옥의 벽을 따라 만져보면서 움직여볼 생각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운동장의 가장자리로 가서 철제 울타리를 끼고 천천히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는 아마도 학교를 한바퀴 빙 돌아갈 것임으로 일종의 회전초밥과도 같았으며 누군가가 그를 집어서 먹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청난 변수가 생기기 않는 이상 그 회전초밥은 무사히 여정을 마칠 것이다.

 이건 다른 날인데, 비가 내렸다. 우산이 없던 나는 정문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뿐이었는데, 마침 현택이 우산을 막 피려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같이 가자고 그를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학교 앞으로 나왔을 때 나는 그를 태우러온 그의 아버지를 만나뵐 수 있었다.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내 욕망을 채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간접적으로 말한다면 내 마음이 시키는대로 말했다. 


"저희집 말고 현택이 집으로 갈래요." 

 

"그래? 우리 아들이 좀 친구들이 많구나. 별로 볼 건 없는데 말이지. 아들 의견이 중요하겠지?"


 그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는데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비가 와서 약간 울쩍해서인건지는 알 길이 없다.

 

 "저도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내 쪽을 바라봤다. 그냥 바라본게 아니라 한 수 초 정도 노려본 것 같다. 거기에 대해서 나는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알게된건 고작 일주일도 안되었고 만나서 이야기한 것도 몇 마디가 전부인데 그런 놈이 우리집에 감히 들어온다는거야? 거절하기도 뭐해서 나는 그냥 알겠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한 것이 맞는 선택이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라고 나는 그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어쩌면 다른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나한테 말하지 않은 고민이 있다던가. 아니면 그가 나를 꽤 괜찮은 잠재적 친구로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를 깊은 마음에 두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그건 가능성이 낮겠지. 이런 것에 가능성을 두는 나 자신의 분별에 대해 반성하고 있을 때 차는 이미 출발했고 주유소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공업사들을 좀 지나서 삼각김밥 컬러로 층층히 쌓아올려진 그의 집을 볼 수 있었다. 셋은(우리라고 부를 수 있을지 애매한 상황인데) 현택의 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사는 자취방과 비교하면 매우 넓었다. 집의 한쪽 벽면은 놀랍게도 통유리로, 그냥 통유리가 아니라 해당 면이 돌출되어있고 윗부분이 반 아치처럼 천장으로까지 이어지는 구조였다.

 차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와닫지가 않았다. 마치 내가 비싼 외제차를 샀지만 마음은 몽롱한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그 차를 타고 병수를 포함한 사람들 앞에서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실감이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기에 옆자리에 현태가 타고 있었을면 어떨까? 그런데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자 나는 약간의 소강상태가 밀려왔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했다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좋아함이 너무 강하게 지속되면 오히려 '그렇게 좋아할 필요가 뭔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감정의 돌진에 제동이 걸리는 느낌이었다. 뭐 갑작스런 것은 아니고 자연 냉각마냥 완만한 하강 곡선을 그리는 것 같다고 할까? 그런데 옆자리의 그는 비가 오고있는 이 날씨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구도서관 앞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업적이라거나 위대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나의 취향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하긴 했다. 그래서 하강 곡선이었던 것은 점차 포물선으로 수정되어 다시금 마음이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흘끗 보면 그의 손은 꽤 이뻤다. 얘도 이쁜 구석이 있구나. 그가 입고있는 교복은 꽤 어울렸다. 조금은 무서운 인상의 눈과 냉소를 머금은 표정의 조합으로 그런 깔끔함 산뜻함이 자아내질 수 있는건지 그 매커니즘인지 상호작용인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목소리도 좋았다. 말을 할때의 이따금 들리는 숨소리가 들렸다고 하면 조금 이상한걸까? 그런데 차 안에 있으면서 내가 집중을 기울일만한 데가 창 밖의 풍경들이랑 운전하고 계시는 아버님의 존재감이 고작 아닌가. 나는 그에게 굳이 말을 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할 시간은 왜인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현태는 휴대폰을 보고서 말했었다.


 "비는 곧 그친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