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화려한 침대 위에 한 소녀가 앉아 있다.

 인간과는 약간 이질적이면서도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외모.

 머리칼에도 가려지지 않는 저 귀를 보면 엘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잔뜩 야윈 몸과 벗은 건지 입은 건지 모를 옷에 비쳐 보이는 상처 자국들.

 어딜 보고 있는 건지 눈에는 초점이 없고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비네, 일어나서 인사해라. 이 분이 앞으로 네가 2주간 모시게 될 대상인 벨보르 님의 삼남 브리안 님이시다."


 이 창관의 주인인 자가 하는 말도 듣는 둥 마는 둥.

 그저 한 번 흘겨보기만 하고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대상인의 삼남이고 뭐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므로.


"건방진 씨발년이."


 허리춤에서 채찍을 꺼내들고 다가가려는 창관 주인을 대상인의 아들이라던 브리안이 멈춰세웠다.


"너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브리안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만…… 혹여나 건방지게 군다면 언제든 이 채찍을 써서 벌하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브리안에게 채찍을 건넨 창관 주인이 방을 나갔다.

 엘프 노예인 비네가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걸 확인한 브리안은 쥐고 있던 채찍을 구석으로 던져 버리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흠칫하는 비네.

 브리안이 걸어오자 근심이 담긴 눈동자가 또르륵 굴러간다.

 그러나 브리안은 옆쪽에 있던 쇼파에 앉을 뿐이었다.


"편하게 있어, 편하게. 너한테 딱히 뭘 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그 말을 하고선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듯 책을 펴고 들여다보는 브리안.

 그런 브리안을 보며 비네는 약간의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식사 때가 되자 브리안은 간단한 식사를 가지고 들어와 책을 보면서 먹었다.


"맞다, 너도 식사는 해야지. 네 것도 가져다 줄까?"


 브리안이 권유했지만 비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음…… 먹기 싫으면 말고."









 그렇게 3일.

 여전히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생리현상을 해결할 때만 움직이던 비네에게 브리안은 따지듯이 말을 걸었다.


"왜 아무것도 안 먹는 거야? 엘프라고 안 먹어도 사는 건 아니잖아."


 그러면서 스프를 한 숫갈 떠서 가져다댄다.


"자, 먹어."


 그러나 비네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저기…… 이유라도 알 수 있을까? 이렇게 아무것도 안 먹으면 정말 죽어버릴 거야."


 조심스러운 브리안의 걱정이 마음에 닿았는지 비네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어……."

"……그래."


 브리안은 짧게 대답하고 돌아서서 다시 쇼파에 앉아 책을 폈다.











 그리고 다음 날.

 브리안은 보라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비네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뭔 줄 알겠어?"


 뭐냐고 묻듯이 올려다보는 비네.

 브리안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독약이야. 먹으면 1분 안에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어."


 비네가 눈을 크게 떴다.


"왜 이런 걸……."

"살아있는 게 괴로워 보였으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서."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팔을 덜덜 떨면서 약병을 향해 양손을 뻗는 비네.

 정말로 간절히 원했다는 듯 갈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브리안은 약병을 건네주지 않는다.


"어째서……?"

"나랑 같이 있는 동안에 네가 죽으면 곤란하거든…… 이 약병은 내가 떠날 때 몰래 줄 거야. 그러니……."


 브리안이 비네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 함께 있는 동안만 살아있어 주면 안 될까? 당장이라도 죽고 싶은 건 알지만 부탁이야. 괴로운 일은 없을 테니까. 응?"

"……."


 비네는 약간의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조만간 교육 담당이 와서 강제로 음식을 먹일 예정이었으므로 브리안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편하게 죽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것 좀 먹어 봐."


 스프를 다시 떠서 주려는 브리안에게 비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떠먹을 테니까……."


 비네는 편히 죽기 위해 당장을 살기로 했다.







"너는, 아무것도 안 할 거면서 왜 2주 동안이나 날 산 거야? 엘프는 비싸잖아……."


 5일 째.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말한 것이 마음의 벽을 약간이라도 허문 것일까.

 책을 보는 데 집중하던 브리안에게 비네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브리안은 책을 보면서 대답했다.


"내가 산 게 아냐. 여자 경험이 없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강제로 맡긴 거지. 비싼 엘프를 2주일이나 산 건 그 사람 식 돈자랑일 뿐이고."

"그럼 왜 나한테 손을 안 대는 건데?"

"나름대로 자제하는 거야. 난 형들이 여자에 빠져서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걸 봤거든. 그렇게는 안 되려고. 아예 경험을 안 해보면 그럴 일이 없을 거 아냐?"

"그렇구나…… 매일 보던 책은 어떤 거야?"

"이거? 공부하는 거야. 훌륭한 상인이 될 수 있도록."

"너는 성실하네."

"그래?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적어도 내가 봤던 인간들 중에서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브리안이 웃자 비네의 표정도 살짝 밝아졌다.

 금세 다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 이틀 뒤.

 브리안은 매일 하던 공부를 멈추고 체스판 하나를 들고와 혼자 체스를 두었다.

 브리안에 대한 어색함이 많이 사라진 비네는 혼자서 체스말을 여기저기 옮기는 걸 보고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체스라고, 인간들의 유희야. 귀족들은 이 놀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점수를 따려면 연습해 둬야 해."

"그렇구나."


 비네가 가까이 와서 살펴본다.


"그러고 보니 엘프는 인간보다 머리가 훨씬 좋다고 들었는데."


 비네는 자조하듯 읊조렸다.


"머리가 좋았다면 잡히지 않았겠지."

"아, 그, 그건 사냥꾼들이 비열한 수를 쓰니까 그런 거고. 나랑 이것 좀 해볼래?"

"할 줄 모르는데……."

"규칙은 내가 가르쳐 줄게."


 브리안은 비네에게 체스의 규칙을 가르쳐 주었고 한동안 둘이서 체스를 두었다.


"체크메이트. 또 졌네. 엘프라고 인간보다 머리가 좋은 건 아닌가 봐."

"……다시 해 봐."

"몇 번 해도 똑같을 텐데?"


 몇 시간 뒤.


"체크메이트."


 이번에는 비네 쪽에 승전보가 울렸다.


"뭐, 뭐야? 어떻게!?"

"내가 이긴 거 맞지?"

"어떻게 이런 식으로…… 다, 다시 해!"


 탁!


"체크메이트!"


 그 이후부터는 비네의 연전연승이었다.


"으악, 또 졌다!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졌어!"

"잘하는 거야?"

"몇 시간 했다고 이렇게 배우는 건 말도 안 되는 거야. 대단하다. 진짜 엘프가 인간보다 머리가 좋긴 한가 보네."

"그런가?"


 브리안의 말을 듣고 비네가 미소지었다.

 비네의 미소를 바라보던 브리안이 작게 중얼거린다.


"아쉽네…… 저렇게 똑똑한데…… 창관에 팔리지 않았다면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거야……."


 그 중얼거림에 반응하는 비네.


"정말로 그랬을까……."

"아, 미안.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어서. 방금 말은 잊어줘."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브리안은 책을 펼쳤고 비네는 다시 침대 위로 가서 앉았다.










 다음 날, 브리안은 새로운 게임을 가져왔다.


"어디 이것도 잘하나 볼까? 이건 쉽지 않을 걸."

"뭔데?"


 새로운 게임도 체스와 마찬가지였다.

 처음 몇 판은 브리안이 이기다가 비네가 완전히 규칙을 파악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비네의 연전연승.

 브리안은 질 때마다 분통을 터트리며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인지 게임을 할 때만큼은 비네도 정말로 즐거운 듯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뒤에는 브리안이 새로운 게임과 함께 옷 한 벌을 사왔다.


"비네, 이거 입어."

"웬 옷이야?"

"그게, 나도 남자긴 하니까…… 그런 옷을 계속 보고 있으면 참기가 힘들어서. 비네는 예쁘잖아."

"응, 그렇구나…… 그렇지만 여기 창관이고, 브리안이 날 돈 주고 산 거니까 힘들게 참지 않아도 될 텐데."

"말했잖아. 참는 건 날 위해서라고. 그것보단 고민해서 골랐으니까 한 번 입어나 봐봐."


 비네는 정말 오랜만에 노예와 창녀의 복장 말고 제대로 된 옷을 몸에 걸쳤다.

 고민해서 골랐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비네 스스로 보기에도 자신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진짜 잘 어울린다."

"그래?"

"응. 저런 이상한 옷보다 이런 옷이 훨씬 예뻐 보여."

"맞아. 저런 이상한 옷…… 도대체 어떤 인간이 만든 건지 모르겠어. 분명 끔찍한 녀석일 거야."


 브리안은 피식 웃고는 비네에게 제안했다.


"비네, 우리 나가서 쇼핑 하지 않을래?"

"쇼핑……."

"예쁜 옷 입은 거 보니까 이것저것 더 사주고 싶어졌어. 악세서리도 사고 바깥에서 노는 거야. 그렇게 비싼 건 못 사주지만…… 어때?"

"하지만 난 이 창관에서 나갈 수 없는걸."

"내가 널 샀는데 뭐 어때? 적어도 앞으로 5일 동안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 자, 나가자."

"으, 으응."


 비네는 마지못해 끌려나가는 척 브리안의 뒤를 따랐다.


"아, 잠깐만. 뭐 놓고 온 게 있어.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봐."


 창관을 나가던 도중, 브리안은 놓고온 게 있다며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별다른 생각 없이 기다리던 비네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인간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를 인간에게 완전히 굴복하게 만들었던, 창관의 교육 담당.


"그 옷은 뭐냐? 걸레 년이. 노예 표식이 드러나는 옷 말고는 입지 말라고 교육하지 않았던가?"


 엘프 노예의 표식은 음부 바로 옆의 넓적다리에 새겨진다.

 하늘하늘하게 비쳐서 음부가 다 드러나는 음란한 옷만 입으라는 규칙.

 그런 걸 배우기는 했었지만 지금까지는 갈아입을 옷이 죄다 그런 옷들 뿐이었기에 비네의 머릿속에서 잊혀져 버렸다.

 교육 담당의 철판 같은 손이 비네의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따라와. 교육을 새로 해야겠어."

"으윽!"


 그렇게 질질 끌려가려던 찰나.


"그만!"


 브리안이 나타나 교육 담당을 제지했다.

 황급히 손을 놓는 교육 담당.

 풀려난 비네를 품에 안은 브리안은 교육 담당에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왜 그러는 겁니까?"

"그, 노예의 복장이 창관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라……."

"제 취향일 뿐입니다. 아직 5일 동안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브리안 님. 미처 몰랐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앞으로는 조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브리안은 교육 담당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노려보다가 비네의 상태를 살폈다.


"비네, 괜찮아?"

"응. 별 일 없었어."


 머리채를 잡혀 끌려갈 뻔했는데도 오히려 비네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비네는 이 상황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 끔찍한 교육 담당도, 창관 주인도 브리안에겐 꼼짝도 못 한다.

 그런 브리안이 자신을 아껴주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

 비록 그것이 얼마 안 가 끝난다고 할지라도 이 순간만큼은 즐거웠다.

 그래, 이 순간을 만끽하자.

 비네는 그렇게 생각했다.

 브리안이 떠난 뒤로는 어차피 약을 먹고 죽을 테니까.









 비네는 지금까지 인간들의 세상은 싫은 것들밖에 없다고 믿어 왔었다.

 그러나 이 시장이라는 장소는 아주 즐거웠다.

 예쁜 옷들, 귀여운 악세서리, 색다른 맛이 나는 음식들과 친절하게 웃는 사람들…….

 자신이 귀엽다며 꿀과자를 하나 더 넣어주던 상인을 보며 비네는 브리안 뿐만 아니라 좋은 인간들도 많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즐거웠어?"

"응."

"그럼 내일도 나와서 놀까?"

"응, 좋아."


 브리안과 함께 보낸 시간은 비네에게 빛과도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빛이 밝을수록 그녀의 내면에 있는 그림자는 점점 짙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브리안이 떠나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또다시 비참한 생활 뿐.

 계속해서 비참한 생활 뿐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기억해 버린 것이다.

 행복, 즐거움, 안심…….

 사냥꾼에게 잡혀 버리기 전 자신에게 있었던 긍정적인 감정들을.

 그것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했다.

 과연 자신이 브리안에게 약을 받는다고 해서 쉽사리 마시고 죽을 수 있을까?

 즐거웠던 만큼 고민도 깊어진다.













"서커스, 재밌었지?"

"응. 정말 신기했어. 그런 건 동물들과 교감을 하더라도 쉽지 않을 텐데."

"그럼 시간도 늦었으니 돌아가자."

"응……."


 비네는 괜스레 브리안의 손을 꽉 잡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써 걷는 데 집중한다.

 그도 그럴 게 오늘은 브리안과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브리안은 떠나가고 자신은 혼자 남게 될 것이었다.


"이제 그만 자자. 시간이 늦었어."

"게임 몇 판만 더 하고 자면 안 돼?"

"미안해. 내일 일찍 가야 돼서."

"으응, 그러면 어쩔 수 없네."


 비네는 망설였다.

 지금 머릿속에 있는 말을 브리안에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리는 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데 자꾸만 가슴이 부추긴다.

 비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브리안."

"왜?"

"다, 다음에도…… 놀러와 줄 수 있어? 그럼 나…… 약 안 먹고 기다릴 테니까."


 힘든 얘기인 건 안다.

 엘프는 비싸니까.

 단 하룻밤을 사는 데도 평범한 가정이 꽤나 오래 먹고 살 만한 금액이라고 들었다.

 물론 대상인의 아들이니까 그정도는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브리안은 여색을 즐기지도 않는다.

 그 성실한 브리안이 그저 자신과 놀기 위해 무리해서 그런 돈을 내지는 않겠지.

 그걸 알면서도 말을 꺼냈다.

 브리안에게선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비네는 기다렸다.


"미안, 힘들 것 같아……."


 역시.

 그렇겠지.


"그, 그냥 해본 말이야. 신경 쓰지 마."


 비네는 이불을 덮어쓰고 애써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비네는 잠에서 깼다.

 떠나는 걸 볼 바에 차라리 일어나면 없었으면 했지만 깨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비네, 할 말이 있어."


 할 말?

 무슨 말일까.

 브리안이 비네를 침대 위에 앉히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 얼마 뒤에 이 나라를 떠나서 먼 곳으로 가게 될 거야. 공부를 위해서. 널 보러 올 수는…… 없겠지."


 그러면서 브리안은 손바닥을 펼쳐 독이 든 병을 보여준다.


"하지만 난 이걸 너한테 주고 싶지 않아.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브리안……."

"당장이라도 널 여기서 꺼내 주고 싶지만 슬프게도 나한텐 그럴 능력이 없어. 공부하는 입장이라 가진 돈이라고 해봐야 용돈이 고작이야. 엘프인 널 빌리는 게 아니라 직접 살 만한 돈을 아버지가 흔쾌히 내주실 리도 없고. 경영권을 얻어오면 괜찮겠지만 난 셋째라 형들 몇 배는 노력해야 조금이라도 경영권을 얻어올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선 공부가 꼭 필요하고."


 비네의 가슴에 기대라는 것이 몽글몽글 솟는다.

 설마 해 주는 것일까.

 가장 바라고 있던 말을.


"비네. 날, 기다려줄 수 있겠어? 언젠가 반드시 널 데리러 올게.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반드시 훌륭한 상인이 되어서 너를 살게. 그때부터는 넌 노예가 아니고 내 비서가 되는 거야. 그 똑똑한 머리로 내 일을 도와줬으면 해. 그리고…… 그때부터는 쭉 내 곁에 있어 줘. 너와 함께 지내면서 널 좋아하게 된 것 같아."

"……."


 비네는 눈물이 북받쳐 오르려는 것을 참았다.

 죽지 않아도 돼.

 약 따위 이제 필요 없어.

 약속했으니까.

 브리안이 돌아와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기다려 줄 거야?"

"인간한테 몇 년 따위 엘프한테는 별 거 아냐. 나 기다릴게, 브리안. 몇 년이고."

"내가 돌아왔을 때 처음 봤을 때처럼 괴로운 눈을 하고 있으면 슬플 것 같아."

"걱정 마. 나도 브리안처럼 공부할 거야. 브리안의 비서가 될 거잖아?"

"고마워 비네. 그럼 나 다녀 올게."

"잘 다녀와."


 쪽.


 마지막으로 비네는 브리안의 볼에 키스했다.

 그것이 둘의 작별인사였다.


















"이야,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하군. 확실히 활기를 되찾았어. 밥도 억지로 쑤셔넣어야 먹던 년이 맞나 싶을 정도야."

"뭐, 운이 좋았죠. 생각했던 대로 잘 됐을 뿐입니다."

"어떻게 했길래 저게 저렇게 되는지 궁금하구만. 얘기나 좀 해줄 수 있겠나? 영업 비밀이라면 어쩔 수 없고."


 창관 주인의 물음에 해결사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별 거 없습니다. 일단 처음엔 경계를 풀고……."


 경계심이 많은 동물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신뢰를 쌓는 방법 중 하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신뢰를 쌓는다.

 안전하다고 인식되면, 조금씩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다.


"말문이 트일 때부터 이것저것 자극하는 거죠."


 가장 좋은 건 아쉬움을 자극하는 것.

 엘프가 인간보다 머리가 훨씬 좋다는 속설 따위 없다.

 머리가 좋은 것처럼 꾸미는 건 간단하다.

 이기다가 져 주는 것.

 계속해서 지다가 화난 것처럼 머리털을 쥐어뜯은 다음 칭찬해주면 진짜로 자기가 머리가 좋은 줄 안다.

 자신이 뛰어나 상대를 이긴다는 즐거움.

 그건 상당히 큰 쾌락에 속했다.


"그리고 정말 즐거워 보일 때 아쉽다는 듯 혼잣말을 해 주면…… 뭐 거의 다 된거나 마찬가지에요."


 머리가 좋은, 인간보다 뛰어난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냐는 억울함을 품게 하면 좋다.

 이건 당장은 우울하게 만들 지 몰라도 삶에 대한 의욕을 더 크게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즐겁게 해 주면서 적당히 사건 하나만 꾸며주면 됩니다. 진부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어찌됐든 저한테 의지하게 될 테니까요."


 거기까지 했으면 이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줄 차례다.


"시장에 있는 상인들한테 푼돈을 던져주면서 섭외했죠. 엘프 꼬마한테 친절하게 대해 달라고. 전부 자기한테 친절하니까 꽤나 좋아하더군요."


 그 과정들이 합쳐지면 무조건 넘어오게 되어 있다.

 약간 애태운 다음 돌아올테니 기다려달라고 한다면 철썩같이 믿고 기다릴 것이다.

 어떤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오…… 자네 정말 악랄하군. 괜히 해결사 간판 달고 일하는 게 아니구만. 여기 보수일세."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곤란한 일이 있으면 의뢰해 주시죠."


 해결사가 창관을 나가는 걸 확인한 교육 담당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해결사랍시고 기생오라비 같은 놈 올때는 의심스러웠는데 생각보다 일을 잘 하는군요. 이제 그 녀석 밥도 잘 먹고 말하는 것도 잘 듣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다 주면 책을 몇 권 살 수 있냐고 묻는 걸 보니 진짜 푹 빠진 모양입니다."

"그래,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또 불러야겠어. 그것보단 새로 예약이나 받자고."


 창관 주인이 정말 우습다는 듯 미소지었다.


"실컷 희망 속에서 발버둥 칠 수 있도록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