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고향에서 살던 때의 일입니다.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이었지요. 다행히도 이전 가을은 제법 풍년이라서, 우리는 겨우내 죽을 끓여먹을 밀을 잔뜩 쟁여놓았고, 빵과 햄, 소시지와 치즈도 잔뜩 준비해놓은 참이었습니다. 우리는 밀죽에 소시지를 몇 조각씩 뭉텅뭉텅 썰어넣어, 초겨울에 수확했던 사탕무를 곁들여 먹으며 겨울을 보냈습니다. 장작도 일가족이 모여서 잔다면 충분했고, 때때로 가족이 다함께 온수로 목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했던 겨울이었던 기억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우리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 저녁에 우리 집에서의 하루를 청하던 행인을 집 안으로 들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에구, 이걸 어째.' 하며 그녀의 판초 위에 쌓인 눈을 정성스레 털어주었고, 아버지는 일단은 환영하는듯 했지만 그녀에게 순무 이상의 음식을 제공할 의향은 없어보였습니다. 나는, 나는 그저 그녀가 뒤집어쓴 후드를 벗자 드러난 기다란 귀를 보고 '허억' 했을 뿐입니다.


"이 근방은 사람들이 다들 친절하군요." 그녀가 귀를 쫑긋거리며 말했습니다.


"얼마 남지 않았지." 아버지가 수프 한 숟가락을 뜬 채 말했습니다. "대왕의 유언을 지키는 사람들 말이오."


 실로 그러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육백년 전, 카비라의 샤이라 여왕은 당시 카비라를 비롯한 북방의 도시국가들을 위협하던 옛 제국에 맞서 거대한 전쟁을 벌였습니다. 옛 제국이란 농경의 발상지이자 야금술의 중심지였고, 카비라와 북방의 도시국가는 물론이요, 남부의 유목민족과 안개숲의 장이족들, 습지의 어부들은 모두 옛 제국의 강력한 중장보병들을 두려워하였기에, 옛 제국의 왕중왕들은 강철로 온 몸을 두른 부대를 앞세워 이웃나라에 쳐들어가 그들을 무릎꿇리고 공물을 요구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제국에 공물을 바치는 민족 중에는 카비라인들도 있었습니다. 안개숲의 장이족들이 궁술에 관한 혁신을 발명하고, 산악 민족이 거대한 요새를 건설하였고, 대초원 유목민들은 강력한 기마궁술로 옛 제국에 어느정도 대항할 수 있던 것에 비해, 샤이라 여왕의 카비라 민족은 그다지 특출난 능력도 없었고, 이렇다할 혁신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카비라의 여왕은 자기 스스로 등자를 고안하였고, 긴 창을 사용하는 위세등등한 기병대를 조직하여 옛 제국에 맞섰습니다. 옛 제국이 자랑하는 중장보병들은 샤이라 여왕의 시민보병대의 전열을 붕괴시키기 위해 들이닥쳤지만, 막상 자신들의 뒤를 노리는 여왕의 기병대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여왕이 손수 이끄는 기병대가 옛 제국의 전열 후미로 들이닥치자 전투는 그대로 끝났으며, 이후에 벌어진 학살은 평원을 까마귀들의 연회장으로 바꾸어놓았을 정도라지요.


 그리하여 샤이라 여왕은 대왕으로 거듭났습니다. 옛 제국을 구성하던 제후국들은 제각기 독립하였고, 샤이라 대왕은 그대로 삼각만까지 치고 내려왔습니다. 분명 대왕의 군대는 그 너머까지 진격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카비라 민족이 제국을 지배하고 그 곳의 지배층으로 군림하게 되면, 몇 세대가 지나지 않아 자신들 역시 옛 제국의 귀족들처럼 퇴폐적으로 물들고 말 것이고, 더 나아가서 카비라의 보잘것없는 문화는 옛 제국의 문화에 그대로 침식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이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삼각만에 새로운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였고, 정복이 아닌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은 다름 아닌 민족과 종족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옛 제국은 물론, 그 자랑스런 카비라 민족조차도 다른 종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같은 종족임에도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고 하여 야만인이라 차별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대왕은 백성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런 차별을 철폐해야 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대왕의 통치 아래 제국은 번영했습니다. 분열되었던 옛 제국의 제후국들은 비록 다시 통합되지는 않았지만 차차 안정을 찾아갔고, 이내 그들은 대왕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왕은 공부를 깨나 한 학자들을 모아서, 새로운 법전을 만들었고 그 법전의 첫 문장을 이렇게 장식했지요. '인간의 범주는 언어를 보유한 모든 종족으로 한다.'


 물론, 대왕의 처사에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다수였지요. 대왕의 통치는 순조로웠으나, 인간의 몸으로 감히 그러한 대업을 이룬 것을 신들이 시기하였던 탓일까요, 아니면 애초에 신들이 그 대업을 허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샤이라 대왕은 채 마흔이 되지도 못해 죽었습니다. 죽을 당시 그녀의 뱃속에는 유일한 후계자가 있었고,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모여 아이만이라도 살려보려 했지만, 후계자는 태어난지 두 시간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대왕의 마지막 유언은 '법전의 첫 문장을 기억하라' 였습니다. 그녀는 후대인들이 종족과 민족에 구애되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를 구성한다면, 이 세상에 전쟁이 사라질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부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비록 대왕의 사후에 그녀가 이룩한 제국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으나, 대왕의 계승자들은 모두 그녀의 휘하에서 종군하던 장군과 귀족, 친척들이었고, 그들은 대왕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왕의 유언은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왕들과 공작들은 더이상 수백년 전의 아득한 전설로만 기억되는 문장을 중요시 하지 않았고, 이전의 노골적인 종족차별 정책과 사회제도를 다시 구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직도 남아있던 종족 간의 화합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창칼의 법칙 아래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요.


 대왕이 마지막 숨결을 뱉은지 600여 년이 지난 지금, 대왕의 유지는 그저 산악지대의 몇몇 소국에서만 지켜지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을이 속해있던 카르밀로스 공국이 그 몇몇 소국 중 하나였고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그 순간에 모두 대왕의 친위 기병대가 전장을 달리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그 찬란한 모습이란. 그리고 우리는 이후 그 친위 기병대원들이 이내 대왕의 눈과 입이 되어 제국 곳곳에 새로운 법령을 퍼트리는 더욱 찬란한 모습을 떠올리며 애수에 젖었습니다. 우리 집을 방문한 이방인도 마찬가지였고요.


"빵이라도 좀 드시겠소."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따듯한 죽은 우리가 다 먹어치워서 없지만, 빵은 조금 있다오." 


방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의자에 앉았습니다. "제게 남은 고기가 조금 있는데 나눠먹읍시다."


 어머니는 작은 나무그릇에 잘라낸 빵 몇 조각을 얹어 이방인에게 건내주었고, 빵을 건내받은 그녀는 허리춤에 매단 주머니에서 작은 소시지를 꺼내더니, 자신의 단검으로 소시지를 몇 조각씩 잘라서 우리에게 나눠주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소시지 한 조각을 주워먹더니, '이거 맛이 좋군.' 하며 연거푸 두 조각을 더 먹었고요.


"그래서, 어디서 오시던 참이오?" 아버지가 소시지를 우물거리며 물었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안개숲 쪽인가?"


이방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서쪽입니다. 분쟁 지역이요."


나는 잘 몰랐지만 이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분쟁 지역이라고.' 아버지는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어머니도 재빨리 먹던 그릇을 정리하고는, 탁자에 앉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가 떠나던 때 아네리다스 왕조가 코르피오스를 점령하던 참이었습니다."


아! 아네리다스 왕조가 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네리다스는 샤이라 대왕의 친척이었는데, 대왕이 죽자마자 제국의 수도를 비롯한 인근 지역을 차지하고 스스로를 대왕이라 칭하였습니다. 물론 다른 장군들과 귀족들은 그러한 오만을 잠자코 지켜보지 않았고, 그에 대항하여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그를 압박하였습니다. 결국 오 년 뒤에 아네리다스는 대왕의 칭호를 포기하고 왕으로 만족해야만 했다고 전해집니다.


"코르피오스는 몇 안되는 정직한 사람들이 살던 도시였는데." 아버지의 침울한 말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이방인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뭔진 모르지만 안좋은 소식이라 생각되어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윽고 짧으면서도 긴 침묵이 시작되었고, 그 침묵은 이방인에 의해 끝났습니다.


"저는 달빛이 잠든 언덕입니다." 그녀는 우리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의 호의에 감사를 표하고 싶네요."


"아니오."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오히려 오늘 밤, 대왕의 유언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준 그대에게 감사하네."


 달빛이 잠든 언덕은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고 소개하였고, 안개숲의 전통에 따라서 사제가 되기 위한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안개숲에서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십 년 동안 단이족의 땅을 여행하며 견문을 쌓고, 그 과정에서 옛 신들의 지혜 중 적어도 하나를 깨달아서 사람들 앞에서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바람의 지혜를 좇고있지요." 그녀의 보충 설명이었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베풀어준 친절에 답하겠다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그토록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야만족인줄로만 알았던 대초원 유목민들이 사실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민족이며,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되어 이 세상의 영원한 순환을 지켜본다고 여긴답니다. 옛 제국을 통일한 사람은 신기하게도 옛 제국을 멸망시킨 샤이라 대왕처럼 여자였는데, 최초의 왕중왕은 산 속에서 계시를 받아서 자기 겨레를 통합하기 위한 대성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비단 역사 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녀는 우리의 눈물을 자아내는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역시 들려주었습니다. 카비라의 공주와 기병대장이 서로를 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 때문에 궁성의 벽을 사이에 두고 부르던 슬픈 노래에 관한 이야기, 샤이라 여왕의 군대에 맞서 옛 제국이 군대를 소집하였을 때, 머나먼 상업도시 마리온의 남자들은 모두 샤이라 여왕의 기병대를 두려워하여 전쟁터에 나가길 꺼려하였으나, 오직 한 명의 소녀만이 아버지의 갑옷을 훔쳐입고 전쟁터에 종군했다는 이야기, 아, 티론의 유리장이 소년이 바닷가에서 인어를 만나 사랑에 빠진 이야기는 왜 그리 슬펐던 것일까요. 그저 소년과 인어의 사랑 이야기였을 뿐인데, 어머니의 치맛자락은 눈물로 젖어 있었고, 아버지마저 찔끔찔끔 눈물을 몇 방울씩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잠이 오는지도 모르고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 스러져 잠에 들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내게는 물갈퀴와 지느러미가 생겨 바닷속을 여행할 수 있었고, 유리 해안의 깊숙한 동굴에서 어떤 아름다운 인어와 잘생긴 소년이 달빛을 조명삼아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달빛이 잠든 언덕이 들려주었던 인어 이야기에서 나오는 연인들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는진 모르지만, 아침에 깨어난 뒤에 나는 내 뺨을 타고 안도의 눈물이 흐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달빛이 잠은 언덕은 해가 정 가운데에 뜰 즈음에 우리 집을 나섰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판초와 장화를 단단히 동여맨 뒤 길을 나섰습니다. 나는, 나는 그토록 아름다운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그토록 애틋하게 만들 수 있는 그녀가 무척이나 대단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가 나를 채 말리기도 전에 그녀에게 날 데려가달라고 빌기 시작했습니다.


"이야기꾼이 되고싶은건가요." 그녀가 물었습니다.


"네에." 나는 반쯤 울면서 말했지요.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멋진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어요."


 그녀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나를 떼어내려 다가오는 아버지를 말리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내가 이 마을에 오기 전에, 솔라스 성에서 한 노인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내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알자, 그녀는 내 어깨를 잡아서 나를 떼어냈습니다.


"솔라스 성이라면 여기서 눈길로 가도 이틀이면 가는 거리죠. 맞습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아버지를 쳐다보았고, 아버지는 못 미더운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 노인은 내가 본 어떤 사람들보다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에, 내가 알고 있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는 알 수 없었던 이야기까지, 속속히 기억하고 있었답니다."


"어떻게 이야기꾼도 아니면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냐고 묻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그냥 이야기가 좋아서, 찾아오는 이야기꾼마다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라대곤 했다고요." 그녀는 그러면서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나는 이내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달빛이 잠든 언덕은 우리에게 짧은 인사를 건낸 뒤, 아직 눈이 쌓여있어 그 경로를 가늠하기 힘든 자갈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꾸만 멀어져가는 그녀의 모습에 아쉬워하는 나를 보면서, 아버지는 '봄이 되면 솔라스 성엘 가자.' 며 어깨를 쓰다듬어주었습니다.